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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됐어" 이제 외침만 남았나...
늦봄 문익환 목사 13주기, 기억하는 이 없어... 추모행사만 가져
 
김명완   기사입력  2007/01/18 [18:03]
18일은 늦봄 문익환 목사의 13주기이다.

늦봄 문익환 목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고, 지난 14일은 박종철 열사의 20주기인데도 20대들은 박종철이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했다.

이번 문익환 목사의 추모행사 또한 통일맞이에서 지난 13일 '가신님의 발길따라 통일맞이 한길로! - 늦봄의 부활, 민중의 부활, 민족의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진행한 13주기 추모행사가 전부이다.

▲ 지난해 1월 14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늦봄 문익환 목사 12주기 추모식 행사가 진행됐다.     © 인터넷신문 참말로 제공

우리시대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몸소 실천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길을 여는데 일생을 바친 늦봄 문익환 목사의 생과 뜻을 기념한다고 했지만 무언가 뒷맛이 씁쓸한 것은 무엇일까.

이 시대에 다시한번 문익환 목사의 업적을 기억하고 싶다.

또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종교적인 것이 아니고,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속에 들어와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기억하고 싶고, "통일은 됐어"하고 외침을 기억하고 싶다.

서울과 평양은 반나절 거리다. 지금 평양에 가려면 중국을 통해서 가야하고 통일교육원에서 교육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인가"하고 생각한다. 전혀 꿈도 못꾸던 일을 지금 남한 사람들은 누리고 있다.

문익환 목사는 89년 3월 25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해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통일에 물꼬를 텄었다.

2000년 6월 15일에 남과 북의 정상들이 만나 통일의 뜻을 마련한 뒤 매년 6월 15일과 8월 15일은 남과 북이 만나 서로 조우하고 있다. 이젠 서로 이해를 넘어 느끼고 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가 물꼬를 튼 통일물결을 기억못하는 시대가 아쉽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발자취

 1918년 6월 1일     만주 분간도 명동에서 아버지 문재린, 어머니 김신묵의 맏아들로 태어남  

 1932년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가운데 신사참배를 거부해 중퇴

 1938년               도쿄에 있는 일본신학교 입학(학병을 거부해 만주 봉천신학교로 옮김)

 1944년 6월 17일  박용길과 결혼

 1947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 받음. 을지교회 전도사 생활

 194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

▲ 문익환 목사     
 1950∼1953년     한국전쟁 때 판문점과 도쿄 유엔군사령부에서 근무

 1954년 8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 신학석사학위 받음

 1955∼1970년     귀국 뒤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학 강의. 한빛교회 목사

 1968∼1976년     개신교·가톨릭 공동 구약성서 번역 책임위원

 1976년 3월 1일   '3·1민주구국선언'으로 첫 투옥됨

 1980년 5월 17일  '내란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 광주교도소에서 23일간 단식.

 1983년 1월         '고난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 교회' 담임목사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1985년 5월          5·3인천항쟁 사건으로 네 번째 투옥

 1989년 3월 25일  통일의 길을 열고자 방북, 김일성 주석과 회담 갖고 통일3단계 원칙 합의

 1991년 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1991년 6월 6일   강경대 열사 등 많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던 가운데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여섯 번째 투옥)

 1992년 1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93년 4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 운동 제창

 1994년 1월 18일    오후8시20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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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1/18 [18: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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