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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매력적인 개인, 홍세화 생각
[여름씨의 이런생각] 헌걸 찬 운동가나 지식인 아닌 가장 매력적인 개인
 
여름씨   기사입력  2006/03/03 [15:17]
그를 처음 만난 것이 1992년 9월이다. 파리 중앙시장 언저리의 한 카페에서였다. 나는 유럽연합(그 때는 유럽공동체였지만) 집행부가 후원하는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 유럽에 발을 딛은 신문기자였고, 그는 14년째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 도시에 살고 있던 망명객이었다.

며칠 뒤 그는 내 아내와 나를 자신의 차에 태워 영불해협의 한 항구도시로 데려갔다. 지금처럼 그 때도 나는, 기자답지 않게, 채 친하지 않은 사람 곁에서는 말수가 적었다.

그러나 그는 나보다 말수가 더 적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말을 거는 쪽이 돼야 했다. 물 건너의 잉글랜드를 상상하느라 가슴이 두근거렸던 그 날, 바닷가에서 그와 많은 말을 나누지는 못했다. 그러나 파리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나는 그가 이내 내 생애 속 깊숙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이듬해 6월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나는 그를 여남은 번 만났던 것 같다. 그는 처음보다는 말수가 늘었지만, 말을 거는 쪽은 여전히 나였다. 내가 파리를 떠나기 며칠 전에 만난 자리에서, 그는 그 때까지의 삶에 대해서,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서, 나락 같은 절망과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해서 길게 얘기했다.

그가 나보다 말을 많이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그 해 여름휴가를 이용해 <기자들>이라는, 소설 비슷한 이야기책을 썼다. 파리 체류 때의 이런저런 일들을 이리저리 일그러뜨려 만든 그 이야기 속에다, 나는 그 도시에서 내가 만난 망명객 이야기를 살짝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이 끝나갈 무렵, 회사에 사표를 내고 파리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아내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함께 비행기를 탔다.

내가 다시 파리로 돌아간 것은 아홉 달 동안 거기 머무르며 그 도시에 환장을 해버린 탓이었지만, 그 곳에 그가 살고 있지 않았다면 결정을 그리도 쉽사리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와 이상(李箱)이 그렇게 선망하고도 끝내 가보지 못한 그 도시는, 내게, 보들레르와 벤야민과 헤밍웨이와 사르트르의 도시라기보다 홍세화의 도시였다.

다시 찾은 파리에서 그는 점점 말을 거는 쪽이 되었다. 그는 나를 파리의 이 골목 저 구석으로 데리고 다니며 그 도시의 속살을 보여주었고(나는 좋은 학생이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나는 형편없는 학생이었다), 가족수당을 안 주려고 버티는 공무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나는 그만그만한 학생이었다).

그를 '위험인물'로 여기지 않는 젊은 한국인들이 파리에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나는 즐겁게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저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책의 성가는 그의 오랜 가난을 꽤 눅여냈지만, 그의 향수를 눅여내지는 못했다. 아니, 눅여내기는커녕 더 악화시킨 것 같았다. 그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한국인이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이 외로운 한국인을 두고 나는 98년 서울로 돌아왔다. 외환위기의 낙진을 맞아 경제적으로 더 이상 버텨내기가 어려워서였다. 서울에서 전화선으로 듣는 그의 목소리는 대체로 힘이 없었다. 그는 실제로 아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병은 조국에 대한 상사병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런 처방전이 없었다. 그저, 파리에 한 번 들르라는 그의 말에, 못 그럴 줄 알면서도 그러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세월의 어느 아침에, 그가 거짓말처럼 한국에 들어왔다. 한겨레신문사와 지인들의 초청 형식이었던 것 같다. 법적 걸림돌이 치워졌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2002년에 영구 귀국했다. 그리고는 한겨레신문사에 들어갔고,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그가 한국 땅을 자유롭게 밟을 수 있게 된 뒤,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사람들과 만나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는 늘 바빴다. 그는 늘 뭔가를 쓰고 있거나, 뭔가를 읽고 있거나, 누군가를 인터뷰하고 있거나, 누군가에게 인터뷰를 당하고 있거나, 강연을 하고 있거나, 강연장으로 가고 있거나, 집회에 참가하고 있거나, 집회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 일들에 얽매여 있지 않을 때에는, 그의 몸이 그 많은 일들을 감당하지 못해 집에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는 마치 서울을 비웠던 23년 세월을 단숨에 벌충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파리에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보던 그를 정작 그와 나의 고향인 서울에선 몇 달에 한 번 보기도 힘들다.

타고나기를 우익인 나는('타고나기를'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나는 이미 갈 데 없는 우익이지만) 역사의 진보에 대한 그의 낙관주의를, 민중의 근원적 건강성에 대한 그의 믿음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난 92년 9월 어느 날을 내 생애의 가장 큰 길일(吉日) 가운데 하나로 치고 있다. 신념의 일관성에서,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반성의 철저함과 항구성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에 대한 점검의 부단함에서 그를 앞설 사람을 나는 얼른 떠올리지 못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헌걸 찬 운동가나 논객이나 지식인으로 떠올리기에 앞서 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개인으로 떠올린다.

나는 그와 띠동갑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지금의 나보다도 한 살이 젊었다. 그런데 어느덧 그는 하나 모자란 예순의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한국이 이미 고령화 사회가 되었다고는 해도, 그는 이제 상대적으로도 젊다고는 할 수 없는 세대가 되었다.

그는 가장 활기찬 나이를 이방의 도시에서 보냈다. 그 곳이 다른 도시가 아니라 파리였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지만, 누구도 그 고립된 세월과 고향에서의 세월을 바꾸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고립돼 있지 않다. 그의 연대의 세월이, 그 더불어 살기의 세월이 그가 고립돼 살았던 세월만큼만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의 그 세월이 꼭 일에만 바쳐지는 것이 아니라 놀이에도 바쳐졌으면 좋겠다. 일도 그렇겠지만 놀이야말로 더불어 할 때 진짜배기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가 그 놀이에(일에는 말고!) 가끔 나도 끼워주었으면 좋겠다.     
 
* 필자 '여름씨'는 전 한국일보 고종석 논설위원의 필명입니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정치공론장 폴리티즌'(www.politizen.org)에서 제공한 것으로, 다른 사이트에 소개시에는 원 출처를 명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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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3/03 [15: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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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2024/04/21 [01:10] 수정 | 삭제
  • 0909씨 똘레랑스가 뭔지도 모르고 아무말이나 씨부리지 마세요.
  • 0909 2006/03/06 [15:34] 수정 | 삭제
  • 그의 똘레랑스라는 단어 유행은 참으로 역겹다.
    우리나라에도 똘레랑스와 유사한 단어가 있다. '관용'
    우리나라는 관용이 너무나 난무하는 바람에 망가진 나라다.
    관용 이전에 적절한 응징이 필요한데 그게 안 되는 나라에서 관용이라니. 그것도 외국의 것을 받아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