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구독하십니까? 내 저고리 안쪽에는 항상 <한겨레> 신문과 <한겨레21>, <씨네21>, <이코노미21> 등 주간지의 구독신청서가 들어 있다. 국내에서 산 나이로 치면 아직 젊어야 하는데 어느새 정년이 다가오고 있다. 귀국하기 전부터 가졌던 희망의 하나인 출퇴근하기도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퇴직 후에도 내 주머니에는 <한겨레> 구독신청서가 늘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귀국한 뒤 사람들과 만나면서 뜻밖의 일이었던 것 중의 하나는 <한겨레> 신문을 당연히 구독하리라고 여겼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독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 기회가 되는 대로 구독신청서를 들이미는 게 내 습관처럼 되었다. 물론 효과를 보는 일은 드물다. 외환 위기 때보다도 더 힘들다는 최근의 경제 상황이라지만 ‘인터넷’으로 본다는 사람이 얄밉게 느껴지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무튼 나는 막무가내로 구독신청서를 들이댄다. 심지어는 일용직 노조에 가서도 “ <한겨레> 구독 안 하시죠?”라면서 구독신청서를 내밀었다.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가 얼마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나의 ‘계면쩍을’ 수 있는 요구에 대해 웃어넘기거나 나름의 이유를 댈 만큼 영악하다. 그래도 나의 집요함은 내 머릿속에서 ‘실존’이라는 말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겨레가 어려운 이유 조직생활에 그리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출퇴근을 희망으로 갖게 된 것은 물론 내 정서나 기질의 변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기름 덩어리 속에서 하나의 물방울처럼 살았던 시절이 소망하게 만든 소속감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받아주겠다는 <한겨레>가 있었고 귀국 직후인 2002년 2월부터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아니, <한겨레> 출퇴근을 겨냥하여 귀국을 준비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한겨레>에 대한 나의 애정과 친화력은 내가 출퇴근하는 근무처이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민주와 통일을 향한 신념과 기대로 기적처럼 만들어진 시민 역량의 상징으로서의 <한겨레>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 산적한 국민주 신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겨레>가 지금 ‘살려내야 한다’는 표현이 적절한 상황에 처해 있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를 벗어났다고 하여 <한겨레>의 출발을 열망하게 만든 이유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독재에 의해 오랫동안 유린돼 왔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은 그 긍정적 가치를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재라는 부정적 실체 때문에 그 반사로서였다. 그래서 절차적 민주화를 이룬 것에 일정 정도 만족하면서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일면 구체적인 듯한 민주주의는 그 한계가 불분명한 이중성을 갖는다. 쉽게 규정할 수 있는 조건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성립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구체적이지만, 민주주의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민주주의의 경계는 우리가 다가갈수록 저 멀리 물러선다. 이를테면,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민주화된 시대’와 ‘노동자의 분신’은 모순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독재정권의 경험이 유일한 기준이 된 탓인지 사회구성원들은 절차적 민주화의 성취에 만족하고 긴장을 이완시켰다.
<한겨레>의 어려움에는 몇 가지 구조적 요인이 있지만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끝났다는 것으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회구성원들의 인식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이 확정되고 가장 먼저 찾은 언론사가 한겨레신문사였고, <한겨레>는 그 사실을 크게 기사화했다. <한겨레>에게 그것은 오히려 어두운 그림자일 수 있었다.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한겨레>가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화가 자본주의를 규정하기보다는 자본주의에 의해 민주화가 규정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가령 한국사회가 이루었다는 민주화는 조중동이 한국 신문시장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들이 신문시장의 75%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그만큼 보수ㆍ수구적인 여론 형성 기제에 의해 일상적으로 지배받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인터넷 매체의 보급으로 종이신문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여론 형성에서 종이신문이 갖는 영향력은 여전히 막대하다. 거대 신문들은 자본과 권력을 견제해야 하는 신문의 본디 소명을 저버리고 스스로 권력화, 자본화의 길을 걷고 있다. 사회의 공익보다 거대신문의 사익에 더 충실한 것이다. 그런 조중동은 매일 500만이 뿌려지는데, 정론을 펴기 위해 노력하는 신문은 그 10%도 안 되는 실정이다. 그 자신이 족벌자본인 부자신문들이, 그리고 경제신문들이 온통 자본의 이익만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데, 전교조 조합원 10만 등 양대노총 조합원이 150만 명이라는데 신문시장의 현황은 그렇다.
모든 정치사회 현상이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듯이 이러한 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자의 의식을 가진 노동자도 적지만 그 의식조차도 특별한 자리나 기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철의 노동자>를 부를 때에나 일시적으로 확인될 뿐 일상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한겨레>에 대해 사회적으로는 필요한 매체라고 인정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젊은 층의 반응도 그런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소유’와 ‘존재’ 사이에서 우리 국민은 최근 몇 년 이래 선거를 통해 조중동이 도모하고 추구했던 대통령과 의회를 선택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 뒤집힌 상황이다. 국민의 의식이 조중동보다 앞서간다고 말할 수 있는데 신문시장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조중동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대부분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그렇듯이, 조중동의 의지와 다르게 국민에 의해 선택된 선량들도 조중동에 의해 휘둘린다. 누구도 조중동에 대해 “소수 의견을 반영할 뿐”이라고 당당히 말할 줄 모른다. 국민들도 이러한 헤게모니 작동에 휘둘리게 된다. “영국인들은 5년에 단 하루 자유로울 뿐”이라고 했던 장 자크 루소의 말이 다른 의미로 유효한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에 “신문이 변했다”고 말했다. 스스로 산으로 다가가면서 산을 움직인다고 말했다는 마호메트의 얘기를 돌이키게 하는 발언이다. 이처럼 신문시장에 대한 시민의 안일한 태도는 ‘비자발적 복종’을 부메랑으로 요구받게 된다. 조중동이 다수를 칭하며 여론형성을 주도하도록 방치했다는 점에서 시민들은 미필적 공범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피해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포괄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의 힘이다. 사회구성원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본의 힘에 비해,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의식이 미흡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전에 활성화되었던 ‘안티조선운동’이 지금 시들해진 이유도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퇴색과 함께 정치권력에 대한 자본주의의 포섭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력이 약한 국민주 신문이 기댈 곳은 성숙된 의식을 가진 시민들밖에 없다. 시민의식의 출발점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누군가 대신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언론 환경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바라는 언론 환경을 결코 누군가 대신 마련해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숙된 시민의식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자본의 힘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할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요컨대, 언론 개혁이라는 우리 사회 공동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비판적 시민의식의 일상성 확보를 통해서 담보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적극적 공세 아래 비판적 시민의식의 형성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존재냐, 소유냐?” 에리히 프롬의 질문을 빌어서 말한다면, <한겨레>는 ‘소유’보다는 ‘존재’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조중동은 ‘존재’보다 ‘소유’에 더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구독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한겨레>가 절차적 민주화 이후에 더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이 실존적 고민을 덜 하게 되면서 존재보다는 소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이 글이 실리는 <인물과 사상>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 출판계의 어려움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관심을 갖기보다는 소유에 대한 관심을 주로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의 탓으로 돌리기엔 오늘의 젊은 사회구성원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도록 강제당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안보, 반공이데올로기로 사회구성원들을 통제했을 때의 안보와 반공은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엔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장래에 대해 실제로 불안을 느끼며 살고 있다. 탐욕을 긍정적인 가치로 만들고 효율과 경쟁을 구호로 무한경쟁 속에 내몰면서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작용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겨레>는 존재 이유 때문에 어려움을 안고 갈 수밖에 없겠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지지는 비판적 지지이다 소유보다 존재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이 신문을 구독하는 일차적 이유는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나 견해를 신문의 논조를 통해 확인하기 위해서다. 존재보다 소유에 관심을 가진 독자는 생활에 이로움을 주는 정보에 일차적 관심이 있다. 생활의 이로움에 그 주된 구독 동기를 갖는 조중동과는 달리, 논조에 일차적 관심이 있는 독자를 주된 층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겨레>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신문 구독과 관련하여 조중동을 절독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기 어려웠던 반면에 <한겨레>를 절독하겠다는 사람은 자주 만났다. 한겨레의 논조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독자층은 엷은데 조중동의 독자들보다 까다로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지는 본디 비판적 지지이다. 디제이와 와이에스의 분열 이후 한국사회에서 ‘비판적 지지’라는 말은 그 본디의 의미를 상실하고 부정적이거나 왜곡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지지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나의 지지가 그렇고 <한겨레>에 대한 나의 지지가 그렇듯이 비판적 지지인 것이다. 비판적이지 않은 지지는 맹신이거나 광신을 뜻할 뿐이다. 그러나 비판이 거절의 행위로 나타날 때 그것은 반대의 의미가 된다.
나도 <한겨레>의 논조에 비판적이다. 그러나 <한겨레>가 지향하는 가치에 반대할 만한 것은 아니다. 진보에 대한 열망은 보수의 그것보다 강렬하지만, 사회구성원의 의식은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분명히 규정한다. 뿐만 아니라 사익추구세력이 사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가지는 성실성에 맞서야 한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최근 ‘희망 퇴직’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구성원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한겨레>가 새로운 대표이사와 함께 제2의 창간에 버금가는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고 있다. <한겨레>의 행진은 계속되어야 한다. 나는 계속 구독신청서를 들이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도 반갑게 맞아주길 기대한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에서 제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