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짝퉁의 향연‘, <시사저널> 사태가 무서운 까닭
[여름씨의 이런생각] 저널리즘 견지하는 매체, 감염시키는 것 더 두려워
 
여름씨   기사입력  2007/01/18 [11:52]
지난해 6월 한 재벌회사 관련 기사가 발행인의 지시로 인쇄 직전에 삭제된 데서 비롯된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사태가 황당한 지경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기사가 빠진 데 항의해 편집국장이 낸 사표는 즉시 수리됐고, 기사 삭제와 편집국장 사표 수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기자들이 직무정지나 대기발령 같은 중징계를 줄줄이 받은 데 이어, 경영진은 노동쟁의의 와중에 대체 인력을 투입해 기자들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은 잡지를 지난주에 이어 두 호째 내 놓았다.

반년 이상을 끌어오다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완전한 대체인력에 의한 제작’이라는 살풍경을(차라리 ‘진풍경’을) 빚은 <시사저널>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가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해졌음을 새삼 확인시켰다. 그러나 자본의 욱일승천 자체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판단을 이 자리에서 내리고 싶진 않다. 한 사회의 모든 가치와 동력이 자본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은 특정한 개개인의 욕망이나 윤리를 떠나서 한국사의(어쩌면 세계사의) 현 단계가 짜낸 구조나 ‘대세’의 문제일 테다.

또 이 사태의 핵심이라 할 편집권의 귀속 문제나 대체인력 투입의 위법성(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 제43조는 쟁의행위 기간 중 그 쟁위행위로 중단된 업무의 수행과 관련해 채용, 대체, 도급, 하도급을 금지하고 있다)에 대해서도 시비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 언론의 편집권은, <시사저널> 경영진이 주장하듯, 최종적으로 발행인에게 속할지도 모른다. 또 지금 <시사저널> 제작에 투입된 외부인력을 이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라 우겨 말한다면, 이 잡지사 경영진은 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 '짝퉁' <시사저널> 이라고 불리는 <시사저널> 899호    
이렇게 <시사저널> 경영진의 입장을 최대한 우호적으로 이해해준다 할지라도, 이번 사태와 관련해 그들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지난 반년 이상 경영진이 보여준 행태가, 위법 여부를 떠나, 몰상식해서다. 편집국장 몰래 인쇄소에서 기사를 들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몰상식했고,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기자들을 줄줄이 중징계 처분한 것이 몰상식했고, 급기야 노조가 파업을 하자 다른 언론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필자들을 동원해 완전히 다른 성격의 잡지를 내놓은 것이 몰상식했다. 말하자면, 이 사태 내내 <시사저널> 경영진이 기자들과 맞선 방식에는 기품이 없었다.

지난주와 이번 주 <시사저널>은 그간 정파적 치우침 없이 시시비비에 공정했던 이 잡지에 강한 정파성의 너울을 씌웠다. 그러나 <시사저널> 기자들이 '짝퉁'이라고 부르는 이 두 호 기사들의 본질적 문제는 그 논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품 없음'에 있다. 기실 한국의 소위 주류 저널리즘이 민주화 이후 드러내고 있는 구접스러움도 그 논조에 앞서서 그 언어의 기품 없음에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게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정권 홍보담당자들의 기품 없는 언어는 주류 저널리즘의 기품 없는 언어가 거울 저편에 만들어놓은 짝패인지도 모른다. 지난주와 이번 주의 <시사저널>은 그간 논조의 공정함에 더해 언어의 기품까지 보여주었던 이 잡지의 역사에서 큰 흉터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들의 기품 없음은 경영진이 이번 사태에 대처해온 방식의 기품 없음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시사저널> 기자들이 지난주와 이번 주 잡지를 '짝퉁 <시사저널>'이라 부를 때, 거기선 얼마간의 경멸감이 묻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 '대체 <시사저널>'이 경멸스럽다기보다 무섭다. 이 두 호는 미국 작가 잭 피니의 SF스릴러 소설 <바디 스내처>(1955)에 나오는, 인류의 신체를 취해 지구에 번식하는 외계생물을 섬뜩하게 연상시킨다. 껍데기는 영락없는 <시사저널>이지만 속은 '스내처(강탈자)'의 것인 이 '가짜 <시사저널>'이 힘겹게 저널리즘의 기품을 견지하고 있는 몇몇 매체들마저 감염시키지 않을까 두렵다. 
  
* 필자 '여름씨'는 전 한국일보 고종석 논설위원의 필명입니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정치공론장 폴리티즌'(www.politizen.org)에서 제공한 것으로, 다른 사이트에 소개시에는 원 출처를 명기 바랍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7/01/18 [11:52]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