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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에 몸살... 교회와 성당 민주화 큰 역할"
6월항쟁 시 '외신기자가 본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미나, 회고담 펼쳐
 
김철관   기사입력  2007/06/09 [18:46]
“한국 민주화 투쟁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최루탄이 생각난다. 군사정부는 점점 강도 높은 최루탄을 사용해 사람들을 최루가스에 몸살을 앓게 했다. 그러나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8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주최로 ‘외신기자가 본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미나에서 발제를 한 브루스 더닝 미국 전 < CBS > 기자의 발언이다.
 
▲‘외신기자가 본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미나에서 발제를 한 브루스 더닝 미국 전 <CBS> 기자     © 대자보 김철관
당시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가 한국에 외신기자를 상주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할 때 급파해 취재를 했다고 밝힌 더닝 기자는 “외신에 근무한 한국기자들의 공헌이 컸다”며 “한국 기자들은 정부를 규탄하는 기사를 써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문제로 중앙정보부의 언론인 탄압이 극심했다”며 “언론기관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정부에 충성하라는 경고와 반정부 취재활동을 한다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협박까지 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유일하게 반정부 운동을 펼칠 수 있는 곳이라면 교회와 성당이었다”며 “명동성당 시위에서 중년의 남자와 여성들이 경찰과 대치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한국 취재기간 중 광주민주항쟁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취재기간에 비디오카메라를 사용해 취재를 했는데 계엄령이 발동되자 위성으로 보내야할 테이프는 모두 한국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며 “당시 일본으로 가 위성으로 뉴스를 보내야 했는데, 한국 정부의 승인 마크가 없는 것은 세관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숨진 박정희 전 대통령 광복기념사도 도쿄주재 외신기자로 참석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촬영했으나 정부가 촬영대상을 압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강당을 재빨리 나와 공항으로 향했다”며 “다행히 한국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이어 “암살시도 후 수사가 진행됐으나 의문점과 의혹이 증폭됐다”며 “최근에서야 박정희 대통령 암살시도에 재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 같다”고 밝혔다.
 
▲전 < LA타임스 > 기자로 활동한 지정남 씨     © 대자보 김철관
이날 당시 한국인으로서 전< LA타임스 > 기자로 활동한 지정남 씨는 외신기자들의 6월 항쟁 한국 보도행태는 ‘폭력’이란 단어가 계속 등장했으며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고 밝혔다.
 
지정남 전 기자는 “당시 외신기자가 쓴 기사 제목은 폭력시위, 과격시위대 버스 불질러, 전국에 번지는 폭력시위 등으로 넘쳤다”며 “고귀한 가치 달성을 위한 역사적 사태를 폭력으로 규정한 외신기자들을 설득시키려고 했지만 회의적이었다”고 술회했다.
 
이어 “당시 미국은 한 시간만 정전이 돼도 가게가 약탈당했다”면서 “광주에 시민군이 정부진압군을 몰아내 물자공급이 중단됐던 일주일동안 도시를 통제했어도 단 한건의 강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외신기자들의 반응은 심드렁했고 부정적으로 일관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87년 6월 17일 시위도중 파편을 맞고 사망한 연세대 이한열 군의 장례식이 열렸다”면서 “웨스턴 조선호텔에서 장례식기사를 쓰고 있는데 맞은 편 성공회 성당 스피커에서 큰소리가 들려 내려가 보니 성공회 신부를 포함해 학생들이 방독면을 하고 있는 LA타임스 기자 완장을 찬 첩자를 잡았다. 알아보니 82년부터 마약밀매로 체포돼 청량리 경찰 지시로 학생운동 관찰 등 첩자 활동을 해 온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람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기 1년전인 91년 강원지역에 국회의원 보궐선거로 출마한 후보가 자신의 참모의 부패혐의로 사퇴한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전 모씨라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2005년 러시아 유전개발사기사건으로 신문지상에 이름을 다시 남겼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지 전 기자는 1990년 서울대 졸업식 취재 일화도 소개했다. “졸업식 직전에 노태우 민정당 대표,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표, 김종필 자민련 대표가 갑자기 3당합당을 발표했다. 졸업식에서 서울대학교 총장이 연설이 시작되자 3당 합당에 항의표시로 모두 등을 돌렸다. 교육부장관의 축사가 열렸는데 모두 일어서서 식장을 빠져나가면서 시위현장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 그 이후 서울대 졸업식은 실내에서 진행됐다.”
 
특히 87년 5월 광주민주항쟁 기념일 취재 중 ‘오월의 노래’와 관련된 얘기를 소개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으로 시작된 오월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보이드 기븐스 기자와의 일화였다.
 
그는 "기븐스 기자가 '만약 한국국립교향악단이 TV에서 오월의 노래를 연주한다면 정말 한국의 민주주의가 실현됐다'고 믿겠다고 했다"며 "아직 국립교향악단이 오월의 노래를 부른적이 없다. 어쩌면 올해,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진실로 한국에 민주주의가 찾아왔다고 느낄 수 있게 될지 모른다"고 밝혔다.
 
▲미야타 마리에 일본 전< 중앙공론사 > 편집장     © 대자보 김철관
미야타 마리에 일본 전<중앙공론사> 편집장은 한국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사형을 받은 김지하 시인의 구원운동에 대한 발표를 했다.
 
그는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이 발매금지 되고 반공법으로 체포 투옥됐던 것을 알고, 김지하 시인의 작품을 일본어 번역인에게 의뢰해 출판하게 된 것”며 “김지하 시인의 구명운동에 세계저명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한국정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은 민주화운동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 같다”며 “야당 역량이 없는 탓인지 일본 정부는 현재 퇴행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비롯해 ‘긴 어둠속의 저편’, ‘불귀’,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판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날 행사에 앞서 인사말을 한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한국 민주화 투쟁과정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외 언론이 이었다”며 “ 해외 외신기자들이 진실보도를 해 그것이 알려지면서 한국독재정권이 타도되고 민주화를 이루게 됐다”고 밝혔다.
 
한편 9일 오전 부터 오후 6시까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 국제언론인 세미나가 프레스센터 외신클럽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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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6/09 [18:4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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