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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투자협정의 들러리가 된 스크린쿼터제
스크린쿼터제도는 밥그릇싸움이자, 집단이기주의인가?
 
문화연대   기사입력  2003/06/25 [12:23]

▲스크린쿼터제축소를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기자회견모습     ©출처: 한겨레
한국영화산업이 밥그릇이라면, 한국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주장은 어느 정도는 밥그릇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이 맞다. 하지만 멀쩡하게 먹고 있던 밥그릇을 누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면서 뺏어가려고 한다면, 먹고 있던 사람이 지키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문제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밥그릇 싸움이란 말이 밥그릇을 뺏어가려는 쪽과 지키려는 쪽의 구별 없이 양쪽을 모두 비난하거나, 심지어 적반하장으로 밥그릇을 지키려고 하는 쪽을 집단이기주의라는 이름으로 근거없이 매도하기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밥그릇을 뺏으려는 쪽과 지키려는 쪽을 구별해야 하며, 밥그릇을 지키려는 싸움은 정당방위라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그 정당성을 추정해주어야 한다. 다만 예외적으로 뺏으려는 쪽의 정당함과 지키려는 쪽의 부당함을 증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키려는 쪽에 대해 집단이기주의라고 비난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밥그릇을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을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은 전체주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인들의 주장이 집단이기주의가 아니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이런 질문 방식은 옳지 않다. 멀쩡한 밥그릇을 뺏으려는 쪽이 지키려는 쪽에 대해 집단이기주의라는 근거를 대어야지, 지키려는 쪽에 집단이기주의가 아닌 근거를 대라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입장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일방의 양보를 요구하는데, 그 일방이 양보를 거부할 경우 이를 집단이기주의라 비난하기 위해서는, 필자의 판단으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1) 그 요구가 정당한 근거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2) 그 양보로 인한 이익이 양보보다 월등하게 커야 한다. 즉 비슷하거나 약간의 이익이 남는 것으로 한 쪽의 양보를 요구할 수는 없다(물론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계량화될 수는 없다). 3) 그리고 그 이익은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씩 살펴보자. 쿼터양보를 요구하는 근거는 한미투자협정의 체결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이익은 해외자본 유치라고 한다. 우선 순서를 바꾸어 두 번째 기준, 즉 이익과 손실을 비교해보자. 외통부나 재경부 양쪽 모두 구체적인 수치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항간에서는 40억 달러라고 하는데, 그 근거가 박약하다(무엇보다 지난 MBC 100분토론에서 외통부 국장이 직접 한미투자협정 체결로 어느 정도의 돈이 들어올지는 불확실하다고 실토한 바 있다). 그나마 그 자금은 공장을 짓는 것과 같은 건설적인 자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주식이나 선물과 같은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자금인데, 그것도 장기적인 투자가 아닌 치고 빠지기식 핫머니이다. 따라서 항간에 떠도는 40억 달러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국민의 이익이 아니며, 더군다나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양보의 손실은 어느 정도인가? 감히 계량화할 수 없다. 현재 영화산업만의 경제적 손실은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경제적인 관점에서 지적해 둘 것은 한국영화 및 영상산업의 기대가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잠재력이 무한하다는 점 정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문화적 가치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영화산업을 통해 생산된다. 따라서 영화산업의 손실은 그만큼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보지 못함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한국문화의 손실이다. 영화가 문화에서 가지는 위치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어떻게 미국인들의 생활습관, 가치관, 세계관을 내면화하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 우리 공동체의 문제를 확인하는 과정이며, 누군가 우리에게 호소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것인가? 따라서 그 규모가 확실하지 않은데다 그 이익이 국민에게 돌아가지도 않는 이익을 근거로 쿼터 축소 내지 폐지를 주장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집단 이기주의라 주장하는 근거는 이미 원인 무효가 된다.

마지막으로 한미투자협정 체결이 정당한가? 한미투자협정의 핵심인 경제적 효과에도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의문이 있지만, 보다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한미투자협정이 한국 시민사회의 공적영역(보건·의료, 노동, 환경, 교육, 문화 등)의 공공성을 심각할 정도로 위협하며,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정부의 정책을 제약한다는데 있다. 또한 한미투자협정 체결의 과정에서 그 주도권이 일방적으로 미국에게 넘어가 있어, 체결결과 역시 불평등할 것이라는(마치 소파처럼) 점 역시 문제라 할 수 있다. 백보 천보 양보하더라도 한미투자협정이라는 근거의 정당성은 전혀 합의된 바 없다. 따라서 첫 번째 조건 역시 충족되지 못한다.

따라서 최소한 한국 영화인들의 밥그릇 지키기 투쟁에 대해 집단이기주의라는 비난은 어떤 경우에도 성립할 수 없다. 오히려 스크린쿼터 투쟁은 세계문화 다양성(한국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부이며, 세계문화를 풍부하게 하는데 당당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확보와 한국민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투쟁이라고 밝히고 싶다.

p.s. 그렇다면 쿼터가 사라진다고 해서, 어떻게 한국영화산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문화산업의 교역은 근본적으로 불공정한 구조에 기초하고 있다는 필자의 이전 칼럼들을 참고로 해주시길 바란다. 한 마디만 지적하자. 적어도 미국 영화산업이 본격적인 수출을 시작한 191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세계의 어느 나라도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미국영화를 이긴 사례가 없다. 그것이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 영화인들의 재능부족이나 게으름의 결과라고 생각하신다면? 할 말 없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문화연대에서 발행한 주간문화정책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culture.jinbo.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 필자 조준형씨는 영화인회의 정책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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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6/25 [12:2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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