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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공동묘지서 미사봉헌 체험 뒤 사제 결심"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기사입력  2006/09/01 [14:18]
민주화의 열기로 온 나라가 들끓던 시절,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이름은 자신도 정의롭게 살고 싶다고 다짐하는 이들에게 부드러운 힘을 상징하는 인상적인 존재였다. 특히 사제단이 썼던 글은 투쟁적이거나 과격하진 않지만 우아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사제단이 출범한 지 32년. 그 긴 시간 동안 사제단을 이끌었던 함세웅 신부는 십계명조차도 인간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민주화 정신의 이념과 인권 수호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전당 건립 추진위원장으로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신의 관용과 인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함세웅 신부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진행 공지영 :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나셨죠?

함세웅 신부 : 원효로 3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성심여자고등학교 바로 아랫동네예요.

공지영 : 대대로 가톨릭 집안인가요?

함세웅 : 아니에요. 저희들 대부분은 유교적 배경에서 성장했는데, 6·25 전쟁 이후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그 근처에 있는 성모병원을 다니게 됐어요. 그러면서 수녀님을 자주 뵙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됐어요.

공지영 : 성당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함세웅 : 제의를 입은 신부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서양적이면서도 신비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신부님 밑에서 도와주는 복사 어린이들을 보면서 저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공지영 :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함세웅 : 특별히 어떤 책이라기보다는 안중근 의사나 유관순 열사 등 학교에서 배웠던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공지영 : 왜 안중근 의사를 좋아하셨나요?

함세웅 : 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결단을 존중했어요.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가톨릭 신자였는데 당시 프랑스 주교님들이나 신부님들로부터는 많이 외면당하셨어요. 내가 안중근 의사였다면 그렇게 외면당하고 거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게 됐어요.

공지영 : 왜 신부님이 되셨나요?

함세웅 : 어렸을 땐 해군이 되고 싶었어요. 해군복이 하얗고 깨끗하잖아요. 성당에서 수녀님들과 신부님들께서 사제의 매력을 설명해주셨지만 그렇게 크게 감명 받진 못했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11월 2일 위령성월이라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 바치는 날 신부님을 따라서 잠실성당 있는 쪽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갔어요. 낮 시간에 학교도 빼먹고 왜 거길 갔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요. 공동묘지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이랄까, 문득 이 세상을 넘어선 영원한 세계에 접함을 느끼면서 사제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무덤에서의 체험이었죠.

공지영 : 사제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엔 여자 친구와 데이트한 적도 없나요?(웃음)

함세웅 : 제가 고등학교 때 신학교를 갔거든요. 아무래도 우리 시대는 엄한 때였어요. 신학생 뿐 아니라 일반 학생들도 유교적 전통 때문에 지금처럼 남녀 학생들이 같이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여자 친구들은 있었어요. 지금도 만나서 옛날 얘기를 하곤 해요.

공지영 : 신학대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함세웅 : 저희는 신학교라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요. 제가 대학 1학년 때 4·19가 일어났고, 4월 26일에 이승만 대통령 하야 소식이 전해졌어요. 학장 신부님께서 4·19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전해주시면서 불사조 신화 얘기를 해주셨는데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불사조는 중동 지방에 있는 신화를 갖고 있는 새인데, 이 새는 삶을 다할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나무 둥지에 가서 자기 몸을 비벼요. 열이 나면서 불에 타서 죽는 거예요. 그러면 남은 재속에서 하얀 알이 생기는데, 그 알이 부화되면서 새로운 불사조가 동방으로 날아간대요. 그런 말씀을 해주시면서 그 당시 숨진 청년들이 모두 우리 시대의 불사조다,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우리에게 자유와 민주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불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이기도 하다, 사제가 될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불사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공지영 : 유학은 언제 떠나셨나요?

함세웅 : 65년 10월에 로마의 우르바노 대학으로 갔습니다.

공지영 : 왜 로마로 가셨나요?

함세웅 : 대학 2학년 마치고 군 복무를 했는데요. 제대하고 나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학장 신부님께서 유학을 가서 윤리신학을 전공하라고 권하셨어요. 로마는 가톨릭 신학의 중심지라 로마를 가게 됐어요. 거기서 8년 정도 신학생 시절을 지내고, 사제가 되고, 대학 논문을 썼어요.

공지영 : 로마에서의 생활이 신부님께 미친 영향은?

함세웅 : 처음엔 너무 좋았어요. 감동적이었죠. 성녀 테레사도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시면서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췄거든요. 처음엔 그런 감동을 느꼈는데, 지내보면서 교회의 허구성도 눈에 보였어요. 누구나 외국에 가면 자주성이나 민족의식이 강하게 생기잖아요. 신앙이 보편적이고 아름답긴 하지만 신앙의 주체는 개개인이고, 개개인의 주체는 민족과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태리는 가톨릭 국가니까 대체로 그들의 문화와 가톨릭의 성인들이 일치되잖아요.

근데 우리는 신앙과 나라의 문화가 분화된 거예요. 그래서 저는 학생 때부터 '왜 우리는 성당에서 안중근 의사나 유관순 열사의 삶이나 정신을 못 듣나'라고 생각했어요. 민족을 위해 역사와 함께 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좀 아쉬웠어요. 바티칸이나 국제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역시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뿌리와 힘을 잊을 수가 없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민족 자주성이 생겼어요.

젊은이들의 남녀 관계를 보면서도 좀 놀랐어요. 로마의 신학대 앞에 아름다운 공원이었는데, 그곳에서 10대 중반의 젊은이들이 새벽부터 사랑을 나누는 거예요. 그러나 몇 년 지나니까 그 문화에 익숙해졌어요.

그것보다 더 큰 충격은 공산당이 있다는 거였어요. 공산당의 낫과 망치를 보면서 깜짝 놀랐죠. 그들은 시위를 할 때도 모택동을 불렀어요. 나중에 깨달았는데 이태리 공산당은 인간적 공산주의랄까. 좀 달라요. 그런 측면에서 많은 걸 배웠죠. 그리고 우리는 6.25가 북한에서 남침한 걸로만 배웠는데, 우리 선배 신부님들이 말씀하시길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거예요. 미국이 유도한 부분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깜짝 놀랐죠. 이 신부님들이 유학을 일찍 오셔서 사상이 변질됐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서서히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중성을 읽게 됐죠. 미국은 자국을 위해 우리를 도와주고 여기에 주둔하는 거지, 꼭 우리를 위해서는 아니라는 거죠.

공지영 : 유학에서 돌아오신 후 우리나라에서는 유신이 시작됐는데요.

함세웅 : 제가 귀국하기 직전에 프랑스 루르드를 갔어요. 프랑스 남부의 성모 발현지죠. 그곳에서 혼자 미사도 봉헌하고,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어요. 특히 남북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바치고 나서 6월 20일에 한국에 왔는데요. 총든 군인들이 곳곳에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중고등학생들이 두 짐은 될 것 같은 책가방을 들고 6시 반이면 학교에 가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청소년들을 너무 학대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6·25 행사라면서 고등학생들이 서울역에서 동대문운동장까지 반공 행진을 하는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안보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이건 학생들을 핍박하는 거라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 느낌을 동료 사제들에게 얘기했더니 처음엔 절 의아하게 보더라고요. 하지만 나중엔 공감하면서 시대와 현실에 대한 더 깊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공지영 : 74년에 '정의구현 사제단'을 만든 결정적 계기는?

함세웅 : 지학순 주교님의 구속 사건이었는데요. 74년 1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1, 2, 3, 4호를 발동했어요. 유신헌법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체제를 위한 것이었는데, 유신헌법에 대해서는 언급을 못 하는 했어요. 비판을 전혀 못하게 했죠. 비판하다가 걸리면 징역도 받고, 사형도 받고. 지학순 주교님은 15년 징역을 받으셨는데요. 지학순 주교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었어요. 김지하 시인이 '학생들 모임이 있으니 회합비를 주십시오'라고 해서 90만원을 도와주셨대요. 그런데 자금 제공으로 배후 조종을 했다고 잡혀 들어가셨어요. 그것도 로마에서 돌아오시는 김포공항에서 뒷문으로 그냥 납치당하신 거예요.

민주국가에서 가톨릭의 공식대표인 주교가 공항에서 납치된 거예요. 그래서 원주를 중심으로 해서 서울, 인천, 수원, 춘천의 신부님들이 주일미사가 끝난 뒤 7월 8일에 모였어요. 주교가 이렇게 당할 정도니 일반 시민들은 얼마나 더 당하겠나 싶었죠. 그때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203명의 학생들, 교수님들, 목사님, 변호사님 등이 구속됐어요. 그래서 처음엔 지학순 주교님의 석방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구속된 203명의 석방을 요구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구속시킨 불합리한 유신 체제의 타파를 외쳐야 한다고 고민하면서 매 월요일 저녁에 서울, 인천, 수원, 대전, 광주, 부산, 제주, 원주 등 전 교구를 다니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구속된 분들의 석방과 인권회복을 위해서였죠.

당시엔 다른 집회는 제재가 심했지만 종교 집회만은 자유로웠어요. 그래서 미사 봉헌이 끝나고 2부에서는 호소문도 듣고,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주고받았어요. 그리고 좀 더 체계화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9월 24일에 지학순 주교님이 계시는 원주의 성당에서 결의를 했어요. 하느님과 우리나라의 민주화, 인권 회복을 위해 사제적 삶을 바치겠다는 결의였죠. 그리고 이틀 뒤가 천주교 순교자 축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명동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결단의 표시로 제의를 입고 명동성당 밖을 나오면서 평화적 시위를 했어요. '유신헌법 철폐하라, 민주정권 이룩하자'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데, 옆에 있는 모든 시민들이 박수를 쳐주시는 거예요. 박정희 정권의 불법 무더기 구속 사태가 사제들을 성당에서 세상 밖으로 불러낸 것이었죠.

공지영 : 그러다가 76년에 첫 번째로 구속되셨죠?

함세웅 : 75년 4월에 베트남이 공산화가 됐어요. 그때 우리 정부에서는 '베트남을 봐라, 민주를 부르짖으면 공산화가 된다'면서 구호를 발동했어요. 유신헌법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못 하게 했는데요. 때로는 고려대학교 하나를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도 발동했어요. 기가 막힌 상황이었죠.

그 당시 저희는 매달 모여서 기도하면서 변호사님들과 전문가들을 모셔다가 시국에 대해 세상 공부를 했는데요. 학생들은 계속 구속되는데 종교인들은 가만히 있는 게 너무 죄스러워서 76년 3월 1일에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를 봉헌하기로 했어요. 3.1 정신을 이어받고, 그 정신으로 민주정권을 이룩하고, 구속된 분들의 석방을 위한 기념미사였죠. 그때 저는 미사 계획 일지를 세웠는데요. 그 한 주 전에 명동에서 우연히 문익환 목사님을 뵀어요. 문익환 목사님도 뭔가를 하고 싶은데 장소가 없으시다길래 저희와 같이 하시자고 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미사를 봉헌하고, 김승훈 신부님이 특별방문을 하시고, 문동환 목사님이 특별설교를 하시고, 문정현 신부님이 호소문을 말씀하시고, 이우정 교수님이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셨어요. 그걸로 끝이었어요.

그런데 3·1 민주구국선언 내용에서 민주 정권을 요구하자는 내용이 있었고, 또 선언문 서명자 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 씨가 서명자로 포함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흥분했다고 해요. 그래서 전원 구속을 시키라고 명령을 해서 목사님과 저희 사제들이 구속된 거죠. 사실상 미사를 봉헌한 것밖에 없는데, 정치적인 사건이 되면서 '정부 전복 음모'라고 신문에 난 거예요. 이렇게 돼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님과 제가 구속됐어요.

공지영 : 김승훈 신부님에 대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함세웅 : 김승훈 신부님은 저희 신학대학 3년 선배였는데, 학생 때는 멋쟁이였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이 있으면 흰 구두에 중절모도 썼죠. 그리고 아주 정이 많고 따뜻한 분이에요.

저는 유학 갔다 와서 10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신부님이 많이 아프셨어요. 연탄가스 때문에 의식을 잃고 40일 동안 입원하셨거든요. 당시엔 깨어나더라도 뇌가 손상돼서 상태가 안 좋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뜻밖에 40일 뒤에 회복되셨어요. 그 후 76년 3월 1일 명동성당 미사 때 제가 김승훈 신부님께 강론을 청했는데요. 저는 신부님이 원론적인 말씀을 해주실 거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 너무 강하게 말씀을 해주신 거예요. '3.1 정신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인데, 그 십자가의 정신은 불의와 싸우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불의는 유신정권이다'라는 얘기를 하셔서 저희는 너무 기뻤죠.

공지영 :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의 이사장직도 맡고 계시죠?

함세웅 : 신앙과 현실의 삶을 연결시키는 면에서 안중근 의사가 중심이 되어야겠다는 측면에서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게 됐는데요. 안중근 의사 승모회의 구성원 중 과거에 친일과 관계된 분들도 많이 계시고, 안중근 의사 동상의 조각가도 친일파에요. 그래서 우리가 진실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뜻있는 사람들끼리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2009년은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입니다. 그래서 역사 교수님들과 함께 안중근 의사 전집 발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청소년들을 위한 안중근 의사의 전기는 400여권 정도 되는데, 안중근 의사의 전문적인 전집은 없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그 부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송두율 교수님께 안중근 의사 평화상을 드렸는데요. 남북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분께 상을 드리는 것이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드높이는 것이고, 남북의 화해를 위한 새로운 주춧돌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의도에서 상을 드렸어요. 물론 반대하고 비판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그건 당대에 비난이었을 뿐이에요. 신앙인이 하느님을 마음에 품듯 우리가 북한을 마음에 품고 북한도 남한 국민들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물리적으로는 갈라져 있지만 마음으로는 일치되어 있다는 내재적 접근법은 철학적, 신학적 주류이면서 신앙의 아름다움인 것 같아요.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송두율 교수를 선택했습니다.

공지영 :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함세웅 : 힘든 경우는 있었지만 숨고 싶었다든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그럴 때마다 요나 예언서가 가르침이 됐어요. 요나가 너무 힘드니까 하느님을 떠나서 도망가려다가 결국 잡혀서 바다에 빠져 살게 되는 이야기인데요.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이 있듯 결국 이 세상이잖아요. 어디로 숨겠습니까. 그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삶이 구원이고 부활이고 십자가인 거죠.

공지영 : 힘든 순간에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함세웅 : 제가 사제가 될 때 택한 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였어요. 바리사이파와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데, 바리사이파는 자신만만한 기도를 바쳤지만 세리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하느님께 죄 많은 절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우리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다 죄인이에요. 그래서 저는 늘 하느님께 '죄인인 절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사제로서 예수님을 따라 다른 분에게 잘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전적 봉헌의 기도, 초심의 기도, 사제의 기도를 반복해서 올립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루의 일과가 기도로 시작하거든요. 매일 미사 때 성서 말씀에서 늘 새로운 가르침과 교훈을 얻고 거기서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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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01 [14:1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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