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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루저 파동’, 정신 못차린 방송국
[하재근 칼럼] SBS 뉴스 제작진 ‘루저’ 자막, 정말 해도 너무한 무신경
 
하재근   기사입력  2010/08/14 [14:47]
SBS 뉴스 <나이트라인> 때문에 또다시 ‘루저 파동’이 일어났다. 지방대 출신이고 한때 간판일을 했었다가 국제광고제 수상자가 된 이제석 씨를 소개하며 ‘루저에서 광고천재로’라는 자막을 내보낸 것이다.

당연히 시청자들의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SBS 측은 이제석 씨의 저서에 나온 표현을 인용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이제석 씨 본인에게도 미리 방송내용을 알려주고 양해를 받았다고 한다. 단순한 해프닝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뉴스 제작진의 평소 의식을 의심케 하기 때문이다. 

방송이 이제석 씨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제석 씨의 양해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방송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이 양해를 했건 안 했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은 안 했어야 했다. 

루저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극히 예민한 단어다. 이미 ‘루저녀’ 파동으로 그 민감성이 증명된 바 있다. 당시 루저 발언은 국민의 공분을 불렀고 국회에서 관련 토론회가 개최될 정도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었다. 

얼마 전엔 한 여가수가 그 일을 연상케 하는 발언을 했다가 또다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이렇게 민감한 단어를 방송에서 쓸 땐 깊이 주의했어야 했다. 

뉴스 프로그램은 사회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므로 제작진은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통찰력을 유지해야 한다. 이번 사태의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 의심된다는 데 있다.

한국의 무한경쟁 승자독식 체제는 수많은 국민들에게 열패감과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 학벌주의로 인한 지방대 출신들의 좌절도 심각한 사회문제다. 직업차별도 심각하다. 평소 이런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다면, 지방대나 간판일 등의 키워드가 등장하는 구도에서 ‘루저’라는 단어를 절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유야 어쨌건 결과적으로, 방송이 지방대 출신자나 간판일하는 국민들을 ‘루저’라고 낙인찍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차별을 조장하고, 승자독식 위계체제를 공고히 하며, 국민의 상처를 깊이 건드리는 일이 될 것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루저라는 대단히 민감한 단어를 ‘무심코’ 썼다면 제작진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평소 깊이 통찰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혹을 갖게 한다. 또, 약자들이 겪는 설움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혹을 갖게 한다.

그런 상태에선 제대로 된 뉴스보도가 나올 리 없다. 지나가는 꼭지로 학벌주의, 청년실업이 문제라고 할 순 있겠지만 거기에 진정성이 담겨있지 않을 것이다. 이러면 시청자가 뉴스를 신뢰하기 힘들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루저 파동은 제작진의 너무한 무신경이었다. 뉴스 제작진이라면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보다 예리한 통찰이 요청된다. 또 항상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성의가 필요하다. 연예인이 해도 큰 질타를 받을 실언일 텐데, 뉴스 제작진이 그랬다니, 정말 해도 너무한 무신경이다.
*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블로그는 http://ooljiana.tistory.com, 저서에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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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8/14 [14:4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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