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그녀는 항상 특별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특별한 관계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그/그녀와의 사이에서만 통용일 될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그/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한 여자이고 남자일 따름이다.
가끔 열렬한 노무현 지지자들에게서 나는 낭만적인 사랑의 한 형태를 본다. 사랑의 대상을 아주 숭고한 높이에 세운다. 물론 애초 그들이 사랑했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가 대표한 어떤 시대적 이념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시대적 이념의 한 상징을 담지했고, 그래서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관계는 전도되기 시작한다. 바로 시대적 이념의 매개체였던 한 존재가, 시대적 이념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시대적 이념에 의해 그가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통해 시대적 이념이 평가되는 희안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일부 <광노빠>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현상이다. 물론 나는 많은 건전한 개혁 세력들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수가 많건 적건 간에, 인터넷에서 개혁 담론을 이끌어가는 목소리는 이들 <광노빠>들이다.
시대 이념 그 자체가 되어버린 존재는, 더이상 비판의 영역이 아니다. 이제 이 사람이 걷는 모든 행동는 시대의 이념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시대 이념과 이 존재 자체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는, 진정성과 고뇌에 찬 결단과 상황적 조건과 혜안이라는 말에 의해 메워지게 된다. 물론 이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견고한 하나의 믿음과 사랑의 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 하나 이 괴리-시대 이념과 그 구현자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한 방법은 희생자와 적대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현재 그 희생자의 하나가, 열린우리당과 안개모이다. 그리고 현 정부의 무능한 관료 조직과 그 행태가 또 하나의 희생자이다. 이렇게 나아가면 어느 순간 시민사회 전체와 대한민국의 무식하고 열등한 수준 자체가 하나의 희생자가 된다. 아마도 마지막 희생자는 그를 잘 보호하지 못한 그들 자신이 될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희생되고 난 다음의 최종심급, 누구의 말대로 결코 적용이 되지 않을 최종 심급의 그가 남게 된다.
한 정치가는 공적인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 정치가는 공적인 행위를 통해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가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 전쟁을 일으켰다고, 그가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사적으로 그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는 있다. 이건 사적인 영역이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는 그의 진정성이나 결단에 찬 고뇌 등은 증명될 수 없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일으킨 전쟁의 행위이다.
|
▲자이툰부대 본진 파병에 항의하는 시민단체가 노무현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다. ©대자보 |
현재의 정치담론들에서 자주 보이는 것들 중의 하나가 사적인 담론을 공공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라크 파병이 반평화적인 행동이라면 반평화적인 행동이라고 말하면 된다. 아니 그것이 한미동맹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아마 그 중간의 어느 영역에 불가피론도 들어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적인 판단과 가치를 중심으로 판단하면 된다. 그런데 그의 고뇌에 찬 결단을 믿기에,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지만 파병을 추진한 그의 정책에 찬성한다는 말도 안되는 합리화가 횡행하고 있다. 천성산 공사의 폐지까지를 고려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가, 이를 사과 한마디 없이 번복한 것조차, 대통령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용서를 한다. 아니 생까기를 한다.
그리고 15년전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의원으로서, 한 파업 지지와 공무원들의 노동3권 부여에 대해 찬성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그의 행동이 모여서 그는 대통령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무원들이 노동 3권을 인정하라고 하면서, 대통령의 이전 행위와 발언들을 들이대니, 어느 분은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와 지금의 공무원은 다르다, 그 당시의 노조와 지금의 노조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바뀐 것은 오직 주변일 뿐, 노무현 대통령은 전혀 바뀌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
▲문정현 신부와 부안군민 일부가 대로변에 드러누워 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고 나섰다. ©대자보 |
검사와의 대화는 노무현의 참여정치의 표본이고, 부안의 폭력은 시민들의 무식과 이기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또한 탄핵은 민주주의에 대한 쿠테타였기에 분노하면서 거리를 메운 사람들이, 노동자와 장애인의 외침이 경찰의 폭력적 진압 속에서 억눌려가는 것에는 눈을 감는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바로 시대정신으로서의 총화인 노무현 대통령이 있다. 시대정신이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기에, 그의 반대편의 외침과 그를 둘러싼 외침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포지션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시대정신은 볼모가 되어 끌려다니는 꼴이다. 나는 공론의 장이라면 분명한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 아래서 말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것은 이분법과는 관련이 없다. <올바른 정책이 아닌데, 이해는 한다.> <그의 정책에는 반대하지만, 그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만해 한용운의 역설 미학도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나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론적 판단은 그의 정책이 올바르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이해하고 불쌍하고 안쓰럽고는 개인적 영역에서 간직할 담론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가 섞여서 나오니, 역설이 되고. 신앙간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보수나 수구의 논리더라도, 그것이 개인적인 감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면, 인정을 한다. 자신의 정당한 이해관계를 밝히고 그의 정치적 가치관에 의해 일관되게 내뱉어진 말들은, 분명히 존재할 가치가 있고, 토론될 사회적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물을 중심으로, 그것도 정치인으로서의 공적인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사적인 개성까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물 중심주의는 공론의 담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끼리 서로 유대와 동질성을 느끼기 위해서 사용하면 된다. 공론의 영역에서는 보다 분명한 정치적 입장에서 내려진 판단을 말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진정성이니 고뇌니 하는 단어들로 정치적 언어와 사회적 언어들을 오염시키는 것은,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가 공론의 장에서 내뱉을 단어들은 아니다.
나는 한 인물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그 인물의 담설로 세상을 재단하는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는 가짜라고 본다. 물론 사적인 영역에 이 말이 머물때는 다르다. 그러나 그 말로 공론의 대화 장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분명 문제가 있다. 당신의 그 언어는 개인적 사랑의 언어이고 믿음의 언어일 뿐이다. 따라서 정책은 보수적임에도 변명은 진보적인 이중성과 정책의 실패를 인간성을 통해서 무마하는 이상한 합리화는 공적인 담론에는 어울이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노무현 지지자들은 말한다. 다양한 입장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있다고. 즉, 학자에서 노점상까지 아주 다양한 노무현 지지자들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노무현 지지자들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노무현 지지자들은 일반화되고 가끔 단순화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 모든 노무현 지지자들의 다양한 욕구와 희망이 몇몇 광노빠들의 언어에 의해 갇두어지고 강제로 합병되어, 일정한 방향으로 조정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를 따라서 정치적 동원을 위해 조절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깥에서 오해를 한다느니, 과도한 단순화를 행한다느니 하면서 억울해하기보다는, 그 오해(?)를 만들어내는 당신들의 내부의 문제부터 살피는 것이 본질이라고 본다.
과연 현재의 지지율이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이간계 때문이라고 보는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신들을 대변하지 못하는 현 정부와 여당으로부터의 일정한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탈하고 있다고 본다. 바깥의 오해를 무서워하면서, 다양성으로 변명하려고 하지 말길 바란다. 다양성을 조절하고 획일화하는 일부 광노빠와 정치적 논객들의 폭력적 여론몰이부터 비판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진정 당신들이 현 정부가 개혁에 성공하고 성공한 대통령을 바란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시대의 이념을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의 행보에 끼워맞추지 말고, 시대적 이념의 높이에서 당신들의 노무현 대통령을 바라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잘한 것도 잘못된 것도 모두 그의 몫이다. 잘한 것만 그의 몫이고 잘못한 것은 적들과 환경의 몫이라는 그 변명과 회피의 언어부터 바꾸길 진심으로 바란다.
물론 이상의 말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일부(?) 광노빠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의 말들이 개혁 담론들을 뒤덮어 오염시키면서, 많은 개혁지지자들의 요구와 희망을 희석화시키고 있다. 개혁 지지자들의 다양성을 단순화하는 원인은, 사실 바깥에만 있는 것이 있지 않고, 바로 당신들의 내부에 더욱 많이 있을 지도 모른다. 정치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과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은 전혀 관련이 없다.
단점을 감싸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서로 간에 단점을 고치면서 더욱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어쩜 더 좋은 사랑의 방식이 아닐까?
p.s1) 제가 진보누리와 폴리티즌 두 군데 글을 올립니다. 근데 폴리티즌과 대자보 사이에 기사 제휴가 있는 모양입니다. 저의 본의와는 상관없이, 대자보에서 논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 논쟁의 내용을 보고 적은 그저 생각나는대로 적은 감상문입니다.
p.s2) 판은 제 글로 벌어졌지만, 논쟁은 참가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봅니다. 좋은 내용들이 오고가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반성하고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이 평소보다 길어졌습니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정치공론장 폴리티즌'(
www.politizen.org)에서 제공한 것으로 필자는 필명 '꿈꾸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