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노매체 서프라이즈에서 공희준이라는 논객이 현재의 노빠들을(혹은 서프에 모인 노빠들) <반공노빠>라고 한 모양이다. 한때 <중산층 노빠>라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이 <중산층 노빠>의 겉떼기 속의 하얀 속살은 <반공 노빠>였던 모양이다. 그럼 공희준은 <서민 노빠>인 모양이다. 그의 칼럼방 제목이 <서민의 정치>인 것을 보니 말이다. 아마도 '공희준'은 이제 서프 혹은 노빠 내에서, <서민노빠>의 한축을 이루던 <노동자-노빠 >들이 더이상 개혁 세력 내에서 설 위치가 사라졌음을 느끼는 모양이다. 조금 버티다가 이제 공희준도 노빠 논객의 자리에서 물러날 모양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안티-조선 혹은 反-조중동 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얼핏얼핏 보면, 그런 것도 같다. 그러나 어느 순간, 결정적인 지배 블럭에 대한 저항의 국면에 오면, 그들은 <안티 조선>이 아니라, <조선 혹은 조중동>과의 암묵적 연대를 형성하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을 보면, 그들의 <안티 조선> 혹은 <수구와의 전쟁>이라는 것이, 상층 정치 권력 사이의 세력 다툼 이상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하층의 생존의 문제 등과 갈등하는 순간, <조중동>과 <노빠式 안티 조선> 사이의 거리는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너무 자주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율스님의 단식이 있었을 때, 많은 노무현 지지자들은 환경이 아니라 개발의 논리에서 서서 <20 여분의 단축>을 옹호했다. 이라크 파병에 있어서 그들은 <평화의 원칙>보다는, 미국과의 <한미동맹>의 편에 섰다. 그리고 노동의 문제에 오면, 그들과 <조중동>의 논리는 하나의 연대 세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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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구호를 흔들고 있는 공무원노조 조합원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
역시나 전공노의 노동권 인정 투쟁과 더불어, 노무현 지지자들 전반이 가진 태도는 ‘철밥통’에 대한 비난이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논리가 등장한다.
아직도 국민-국가의 논리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뜨기-자유주의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정부의 단호한 법집행과 공권력의 사용을 요구한다. 국가주의적 그림자를 짙게 간직한 자유주의자, 아마도 그래서 이들을 정확한 용어는 아니지만, 공희준은 <반공 노빠>라고 한 모양이다.
사실은 <국가주의 노빠>가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조중동의 사설과 공명하고 있다. 정부의 엄정한 법집행과 국민을 팔아먹는 국가주의적 시선과 파업에 대한 알레르기를 가진 특이 체질의 논리가 조중동의 사설을 이루고 있다. 홍세화 선생의 책을 통해 다시금 유명해진, 똘레랑스의 논리는 속된 말로, 상식적인 자유주의의 기초를 이룬다.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생각의 차이 자체를 억압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것이, 근대 자유주의의 기본 논리이다. 즉, 파업에 찬성하지 않지만, 노동자가 파업할 권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것은, 빨갱이의 논리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논리인 것이다.
조중동은 바로 이런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논리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反-민주적인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급진 자유주의자처럼 행동하는 유시민과 이에 호응하는 노무현 지지자들 또한, 조중동과 같은 같은 행동패턴과 반응 양상을 보이는 것은, 정말 아이러닉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티 조선(물론 노빠式 안티조선이지만)>의 선봉장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리 닮았다는 말인가?
아마도 곧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있을 모양이다. 역시나 한떼의 반공-수구들과 사이비-자유주의-개혁세력들이, 노동자의 총파업에 보낼 시선과 내뱉을 언어들이, 벌써 귀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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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교문 앞에서 경찰이 체포영장이 발부된 전공노 지도부의 사진 목록을 들고 검문ㆍ검색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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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로...엄정히...단호히...좌시해서는 안된다...경제가 위기다....외국자본의 유치가 안된다....철밥통 노조들의 이기적 행동이다.... 등등....> 과연 <조중동>과 <노빠式 안티 조선>의 어느 쪽에서 먼저, 이상의 말을 꺼낼 지가 다만 궁금할 따름이다.
p.s) 한겨레 신문에서 다음 사진을 보았다. 무장공비가 침투한 줄 알았다. 역사의 시간은 계속 흐르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몇몇 풍경들이 있다. 바로 이 사진은 그 과거의 풍경 하나가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정치공론장 폴리티즌’(
www.politizen.org)에서 제공한 것으로 필자는 필명 ‘꿈꾸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