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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아래 첫동네에서 계속되는 새로운 만남들
[김형효시인의 네팔기행] 흥미로왔던 영국신사 제이미
 
김형효   기사입력  2004/08/18 [16:06]
▲박물관 한 부분! 흰두의 눈이 인상적인데 불교사원에도 힌두사원에도 구별없이 존재하는 양식이다.     ©김형효
 
6월 11일 특별히 바쁘지 않은 하루였다. 점심 식사 초대를 받았으니 오전에 어느 곳을 찾기란 버거웠다. 아침 시간 그 동안 밀린 글을 쓰느라 바빴다. 11시쯤 루빠동굴의 시누이인 언즈동굴 집으로 향했다. 점심식사 초대를 받고 가는 것이다. 언즈동굴의 집은 영국 대사관 담장 곁에 위치하고 있었다. 큰 도로변을 벗어나 있어서 비교적 공기가 좋았다. 집에 도착하자 언즈동굴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2층 문앞에 나와 우리를 맞아준 영국신사가 바로 언즈동굴의 남편 제이미이다. 먼저 간단한 인사를 문밖에서 나누었다. 곧바로 응접실로 가서 자리를 권했고 우리는 그곳에 앉아 언즈동굴이 가져온 쥬스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어가 안되는 고통을 또 느끼는 순간이다.

▲왼쪽에서 부터 밀런의 사돈 언즈동굴, 밀런, 언즈동굴의 남편인 영국 신사 제이미, 그 옆은 필자     ©김형효

안되는 영어지만 때때로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알아듣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고 또 내가 그의 말을 알아듣고 밀런에게 물으면 맞다고 할 때 나는 또 스스로에게 신기함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화는 밀런의 통역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나는 사진에서 본 그를 보고 대단하게 뚱뚱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지금 보니 날씬하다고 했더니 그는 언즈동굴을 향하여 왜 그런 사진을 주었느냐고 조크를 던졌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데 그가 여행한 나라는 36개국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언즈동굴이 다니던 여행사에 안내를 받았는데 언즈동굴을 보고 첫 눈에 반했다며 보기 좋은 넉살을 풀어놓았다. 특히 한국에서도 잠시 머물며 영어 강사로 있었다는 그는 한국은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는 네팔에 처음 왔느냐고 묻고 여행이 어떤가 물었다.


우리는 네팔은 오염이 심해서 문제고 공기가 좋지 않은 것이 흠이지만 문화적으로 대단한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가난이 문제지만 이런 문화적 토대에서라면 곧 이를 극복하리란 기대를 갖는 다고 말했다. 그도 우리의 말에 동의하며 그가 여행했던 네팔의 몇 곳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 여행지에 대해 약도를 그리면서 점선을 그릴 때 칙칙칙 첨첨첨 이라고 소리내어 그려가는 모습은 익살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190센티미터의 키와 육중한 체격에 사나이가 작은 펜을 쥐고 첨첨첨 칙칙칙 소리내어가며 약도를 그려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제이미의 메모! 익살스런 제이미의 메모는 그가 다녀본 네팔의 명소를 안내하는 정성이 담겨 있다.     © 김형효

그와 우리는 다양한 여행체험과 한국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주로 그가 체험한 여행담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특히 인도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인도가 좋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언즈동굴과 만나 꽉잡혔다고 수갑찬 모습을 해대기도 하였다. 넘치는 익살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그와 그의 아내 언즈동굴이 함께 찍은 사진을 구경할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세 번에 결혼식을 치뤘다고 했다. 첫 번째 결혼식은 네팔에서 네팔의 전통에 따라 치뤘고 두 번째는 영국에서 세 번째는 인도에서 결혼식을 치뤘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세 배는 더 오래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잠시 웃음기 띤 얼굴로 화답한 영국인 신사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법 긴 이름인 그의 이름은 Jamie Charles Allfrey Russeu-Parsons라고 하는 이름이었다. 그는 보통의 경우 제이미라고 부른다고 말했고 제이미라고 부르면 된다고 했다. 나는 이어서 Jamie! How years old?라고 물었다. 제이미는 38살이라 답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음식을 준비하던 언즈동굴이 준비한 음식물을 가져왔다. 평소에는 부부가 함께 음식을 준비하지만 오늘은 언즈동굴 혼자서 준비했다고 아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제이미가 말했다. 식사를 하며 제이미는 마치 맏형처럼 혹은 어머니처럼 음식물을 챙겨가며 권했다. 우리는 간간히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곧이어 언즈동굴은 아이스크림을 준비해왔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제이미는 다음날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는 그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제이미는 이야기 도중 반복해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그때마다 그는 가끔씩 먹는다고 했다. 아이스크림을 즐겨 자주 먹는 그가 나름대로 재치를 발휘해 연발하는 가끔씩 먹는다는 말은 다시한번 그가 넉살 좋은 영국신사임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언즈동굴과 함께 밖으로 나가기 위한 채비를 했다. 제이미는 문밖까지 나와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집을 나와 탁한 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어스미따 거리를 지나 국립박물관을 함께 둘러보기 위한 발걸음을 옮겨가는 것이다.

▲언즈동굴의 모교앞 가로수에 온갖 광고들이 나붙어 있다.     © 김형효

새로운 거리였다. 그렇다고 특별한 거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10분 쯤 걸었을 때 언즈동굴이 자신이 다녔던 학교라고 말하자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사진촬영을 했다. 길을 걸으며 틈틈이 사진 촬영을 하면서 어스미따 거리에 접어 들었다. 이미 한번 지나간 거리라서 낯설음이란 없었다. 여전히 북적이는 거리는 지친 일상을 사는 서민들의 활기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 삶의 고단함은 뒤에 감춰지고 거리에 일상은 부산하기 그지 없이 활발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어스미따 거리에서 박물관까지 가던 길에 이미 보았던 물건들 사이로 혹여 새로운 것들이 없나 살피는 데 한 어린이가 길을 막고 날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한다. 지난번 거리를 걸으며 오래되어 보이는 목각에 관심을 나타내고 다시 올 것을 이야기했더니 오늘 찾아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알아봐주는 그 모습이 대견스러운 장삿꾼 같기도 하고 그들의 생존이 얼마나 집요한 욕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도 되었다. 물론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생존이란 삶을 사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 싫지 않은 그를 꼭 다시 찾아 작은 물건이라도 꼭 하나 사야할 것 같다. 걸음을 재촉한 우리는 어스미따 거리 끝에 국립박물관 광장에 도착했다.

▲타멜거리를 지나다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네팔의 문화상품, 토우들.     © 김형효

국립박물관 광장은 두 번째 찾는다. 첫 번째 방문에는 관람시간에 쫓겨 방문자체를 거절하였다. 오늘은 1인당 250(4250원)루피로 제법 많은 돈을 내고 광장을 통과했다. 그런데 광장을 둘러보며 사진찍기에 바쁜 우리는 참으로 복잡한 풍경들과 접했다. 마약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노인과 너무나 어린 아이가 생업을 위해 장사를 하는 풍경, 원숭이와 놀고 있는 사람들,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 지고 가는 아이들, 어느 곳에나 있는 신전 앞에서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 사람은 어느 곳에서라도 환영받는다는 그런 느낌을 갖기에 충분했고 심지어 짐승조차 어느 곳에서든 편히 자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잠자고 있는 짐승들을 건드리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신전을 복원하기 위해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도 있었고 사람들은 그 공사중인 신전 앞을 지날 때도 알 수 없는 각자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보는 사람의 눈에는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그들이 기원할 유일한 소원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이랴! 생로병사의 고해에 이성이라는 고행까지 얹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니 그 고행길에 빌어야 할 소원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어스미따 거리의 오래된 건물, 어수선한 전선을 비켜서 보면 조형미 넘치는 건물들이다.     © 김형효

국립박물관을 입장하는 데는 또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실호위병 차림을 한 총을 찬 군인들이 문앞을 지키고 서 있었고 입장료를 다시 200루피씩 추가 지급해야했다. 우리는 집총을 한 군인들에게 다가가 함께 촬영해도 되겠는가고 물었다. 그들은 주저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잠시 촬영을 마치고 박물관으로 들어가려는 데 다시 소지품 검사를 하였고 귀중품을 제외하고는 보관함에 물건을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귀중품만을 맡겨야하는 격이었다. 왜냐하면 여행객에게 카메라는 필수품인데 거처를 정하고 다니는 여행객에게 카메라보다 소중한 귀중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카메라는 소지할 수 없으니 꼭 맡기라는 것이다. 하는 수없이 카메라를 맡기고 관람에 들어갔다. 관람실 입구에서 우리는 실망감을 드러냈다. 주로 왕가의 옷과 왕가의 생활상들이 드러나 있었다. 달리말해 국립박물관이라고 해서 입장한 우리 눈에는 왕립박물관으로 보였다. 그것도 왕립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체제 선전장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친 기우였음을 알게 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수중인 광장의 흰두교 신, 그 앞으로 맨발의 어린이가 다가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김형효
▲힌두교 신자인 언즈동굴이 기도를 마치고 포즈를 취했다. 그 앞에 어린이가 신처럼 응대하고 있다. 근엄한 익살인가?     © 김형효

수많은 왕가의 유품 중에는 귀중한 문화유산들도 눈에 띄었고 거대한 궁전이었던 박물관에 마디마디가 모두 소중한 문화유산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안에 소장되고 있는 유물도 유물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수많은 물건을 지키고 있는 건축물에 대한 것이었다. 마치 포장지는 좋은 데 포장된 내용물이 대단할 것 없는 그런 격이었다. 그래서 포장지에 매력과 포장지에 전통성, 그리고 미적 감각들을 탐구하는 데 열중했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아무튼 꼼꼼히 살펴가며 살펴보는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는 입구에서 실망감을 드러냈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밀런에게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세심하고 섬세한 거대한 건축물이 바로 거대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거대한 목각이었다. 어느 곳 하나 조각가의 손길이 비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의 생활 속에 일상적으로 스며있는 흰두교와 불교의 수많은 신들로 조각되어 있는 신전같기도 했다. 사실 하루하루 지내면서 어쩌면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 자체가 박물관이란 느낌이다. 그리고 거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신비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놀라움과 경탄에 찬 눈을 하고 한 시간여 동안 관람을 마치고 맡겨둔 물품과 카메라를 찾았다.

▲박물관의 한 부분! 필자 뒤에 보이는 박물관은 겉과 안 모두 조각되어 있는 건물이다. 9층 건물인데 사각의 광장을 둘러서 지어져 있다. 경탄!     © 김형효

우리는 박물관 안에서 촬영하지 못한 분을 풀 듯 외부의 찬란함에 대해 말하며 촬영을 시작했다. 사실 카메라를 어느 곳에다 들이대도 멋진 고대의 건축조형이 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둘러쌓인 박물관에서 박물관 안마당과 하늘이 주는 이원적인 느낌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조형물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관람객인 나조차 그 건축물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박물관 안마당과 하늘마저 조형으로 만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응시하던 하늘과 안마당은 사실은 이원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구조속에서 모든 대상들을 더 강하게 하나로 묶어내고 있었다. 마치 하늘로 열려 있는 파이프라인 같은 그런 일원성 말이다.   


오후 다섯시다. 오늘은 일찍 문을 닫는다 했다. 밖에서 입장할 때는 네시 이전에 입장하면 일곱시까지 관람은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람은 원하는대로 이루어졌다. 밖으로 나와 다시 광장을 걸었다. 사람들이 원숭이 가족을 보고 웃으며 함께 하고 있었다. 우리는 원숭이 일가와 촬영을 했다. 원숭이는 자기 몸집보다 큰 개가 덤벼들자 자신도 으르렁대더니 개가 주춤하는 틈을 타서 다른 곳으로 잽싸게 이동을 시작했다. 새끼원숭이에 대한 모성으로 짐작했다. 우리는 원숭이 모자와 사진촬영을 했다. 원숭이나 사람이나 그곳에서는 서로를 인정한다. 그런 문화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넉넉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마찬가지다.

▲박물관이자, 사원과도 같은 광장에서 어른도 아이도 생각에 잠겨있다. 이방인의 눈에는 일없는 풍경, 왜, 그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가?     © 김형효

나는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 거리에서 도대체 초보 기행자로서는 정상적이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사회현상을 보게 된다. 거리를 걸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여럿이 어울리는 법을 너무나 잘알고 있는 것 같은 그들, 어쩌면 그들이 네팔의 신들이 아닌지, 나는 며칠째 거리를 걸으며 아이들을 만나지만,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는 아이를 한 두 번 보았지만, 그들이 싸워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건강하지 못한 아이들, 건강하지 못한 어른들이 눈에 띠었을 뿐이다. 먼지투성이의 거리지만 그들 속에서 인간은 얼만큼 견들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흰두교 성자인가? 밀런의 말에 의하면 흰두교에서 공인한 수행자란다. 수행자와 함께...     © 김형효

덜컹거리고 낡은 자동차를 타고 있으면서도 마치 한국에서 자가용을 몰고 드라이브를 하는 사람처럼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마치 서울의 만원 지하철처럼 짐짝처럼 몸을 부딪기면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태연자약이다. 우리는 그렇게 언즈동굴과 밀런이 오랜 만에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내서 카투만두 거리를 구경이 아닌 관람하는 태도로 둘러보았다. 한참을 둘러보다 옛 물건들이 한국의 벼룩시장처럼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 뒤편 광장을 찾았다. 한참을 보다가 모든 물건들이 한 상점에서 보여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실증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언즈동굴이 음료수를 마시겠느냐고 제물었다. 우리는 탁한 공기에 맥이 풀려 물이라도 마셔야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물을 마시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서 이야기한 언즈동굴이 다녔다는 학교앞 운동장에서는 건장한 청년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제법 실력이 좋아 보였다. 유니폼이 아닌 남루한 옷차림을 빼면 한국의 실력있는 조기축구 수준은 되어 보였다.

      
▲박물관 주변의 흙벽돌로 지어진 사원들에서 여가를 보내는 네팔인들, 그들은 이방인의 눈에 모두가 수행자들이다.     © 김형효

언즈동굴 집 앞에 도착해서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사실 온가족이 초대된 만찬을 갖게 되었다. 루빠동굴의 시아버지까지 함께한 만찬이었다. 분에 넘치는 접대가 이어지고 있다.  

▲박물관 앞에서 익살스럽게 포즈를 취한 언즈동굴..., 건물에는 온통 조각가의 손길로 가득하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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