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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밍마의 카펫공장을 가다
[김형효시인의 네팔기행] 어웅시가 있는 날 머우다에서
 
김형효   기사입력  2004/10/05 [13:07]

소스띠가는 저만치 뛰어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가 다가가면 다시 뛰어가고 그렇게 몇차례 반복하며 걷다가 소스띠가와 루빠동굴은 집으로 돌아갔다. 소스띠가가 밝아보여 좋았다. 처음 생일파티 때는 몹시 불편해 보였으나 날마다 밖은 모습을 보여주는 소스띠가를 보면 즐겁다. 그도 내 마음을 아는지 나만 보면 즐겁다. 이제 아무에게나 즐거운 웃음을 웃는 그런 아이로 성장해주기를 내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소스띠가와 루빠동굴의 생기있는 웃음을 뒤로 하고 길을 재촉한다.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언즈동굴과 밀런은 쉬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며 번잡한 왕궁앞 거리를 지났다. 내일 있을 대사관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티켓을 받으러 가는 길이다. 언즈동굴은 어디 가느냐고 밀런에게 물었다. 언즈동굴은 안경을 고치러 간다고 했다. 우리는 케이엔느트레더스에 함께 들렸다.

 

막 가게에 들어갔는데 네팔인 사장인 P.N.Shresta가 박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을 좀더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모든 물건들에 KOKEAN이라는 상표가 선명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밀런과 우리는 그의 사무실에 들려 내일 있을 페스티벌 티켓에 대해 묻고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또카에 갔었으며 그의 집을 방문했고 그의 딸 너비나가 귀엽더라며 인사를 건넸다. 밖으로 나와 카메라 배터리를 구입했다. 그러나 작동이 수월하지 않았다. 상점에 종업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리저리 조작해 보았다. 카메라 점검을 마치고 왕자들이 목욕을 하던 목욕탕이라는 대형 호수를 향해 사진을 찍고 머우다로 향했다.

▲오른쪽에 밍마! 그의 카펫 공장가는 길에 밀런이 밍마와 함께 걷고 있다.     © 김형효

밍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밍마는 지난 번 제이미와 함께 머우다 불교 사원에 갔다가 만났던 한국 이주노동자이며 지금은 카펫공장을 하는 사업가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중무장한 군인들이 군데군데 총을 메고 검문을 하기도 하고 무리지어 순찰을 돌기도 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지난번 밀런의 삼촌 사무실 앞을 지나서 하얏트 호텔 앞을 지나 머우다 거리에 도착했다. 덜컹거리기는 했지만, 자리를 잡아 그렇게 큰 불편은 없었다. 이제 8~1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차장도 있었고 그보다 좀 더 나이든 차장도 있었다. 그들은 연신 차가 가는 방향을 외치며 손님이 없으면 차에 올라타며 훈처! 훈처!를 외쳤다. 버스는 2~30분 후 머우다 거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불교사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밀런은 전화를 걸어 밍마를 만날 것을 청했다.


15분 정도 기다리며 원형으로 돌아 걷게 되어있는 사원을 걸었다. 가끔씩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걸에 손짓을 했다. 나는 1달러라도 건네고 싶어서 막 지갑을 열려는 순간, 밀런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 가난한 살림을 알고 있는 밀런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며, 그 수많은 걸인들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아무튼 마음이 아팠다. 그 중에는 승려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독경을 하며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구걸이라해야 할지, 시주를 받는다고 해야할지 참으로 민망하고 난감한 모습이었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찍고 입구로 걸어왔다.

▲머우다 사원의 대형 붓다 상징물! 사실 이 상징물은 흰두와 붓다의 두가지 상징으로 혼합되어 쓰여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김형효

밍마가 와 있었다. 밍마와 만나 사원을 잠시 걷다가 그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무더운 날씨 탓이다. 밍마는 밀런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가서 쉬었다가 서늘한 저녁 때 나오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밍마의 안내로 택시를 타고 10분도 체 못되어 밍마의 집에 도착했다. 밍마의 집은 한국의 부자집처럼 큰 저택이었다. 그의 집, 계단과 복도는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카투만두 공항과, 하얏트호텔, 머우다 사원 그리고 또카와 카투만두 교외의 수많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곳이었다. 마당가에는 어른 키보다 큰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밍마와 우리는 1층부터 3층까지 세를 내어주고 4층에 살고 있는 밍마네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 또한 잘 꾸며져 있었다. 우리는 앉을 것을 권하는 밍마의 권유로 커다란 응접실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밍마가 가져온 쥬스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밍마네 집 분위기로 봐서 커피가 있을 것 같아 커피를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사오면 된다며 금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20여분 동안 커피를 사러가서 이 상점 저 상점 찾아 헤맸을 밍마에게 미안했다. 밍마는 괜찮다면 편히 자리를 잡고 쉴 것을 청했다. 쉴 틈없는 일정을 보내고 있는 밀런은 피곤했던 모양이다. 쾌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밍마네 집 응접실에서 밀런은 잠을 청했다.              


밀런이 잠을 청한 동안 나는 밍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 끝에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그의 누나들과 가족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8남매의 막내였다. 그리고 그 집에는 그와 부모님 그리고 가정부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의 2명에 형은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그도 모른다고 했다. 그의 큰형님은 인도에서 건축일을 하고 있고, 그의 누이 둘은 결혼해서 네팔에 살고 있고 둘은 한국에 나염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North Korea가 있는 철원이라고 그가 말한 것으로 보아 3'8선을 지칭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불교를 신앙하던 집안으로 네팔의 카스트에 의하면 그의 계급은 라마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밍마 라마(28세)가 정확한 이름이다.

 

네팔의 많은 사람들은 그 계급에 맞는 성을 쓰고 결혼한 여성은 시집의 성을 따른다. 그의 아버지는 76세이며 어머니는 73세라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밖에 나가고 없어 나는 그가 내민 사진첩을 보면서 한국에 있는 누나 까말라 라마(셋째), 도오마 라마(넷째) 누나에 대해서 물었다. 그와 밀런 그리고 그의 누나들은 함께 나염공장에서 일했었다고 한다.


참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에겐 아무런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우리가 생활할 때, 얼마나 나이나 관습에 얽매이는 일이 많은가? 그는 누나의 나이도 몰랐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벌써 몇 번째 그런 일을 접했다. 나는 그들의 관계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돈과 사돈이 만나 경계없이 만나고, 형제와 형제가 어느 곳을 떠날 때, 온 정성을 다 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게 표를 내는 일이 없고, 돌아온 형제에 대하여 따뜻한 정감을 보여주는 그런 모습은 새로워 보였다. 미묘하고 물론 한국에 형제애도 어느 나라 못지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색 달라 보였다. 밍마는 형님들과 누나의 사진을 가르키며 저거는, 이거는 이라고 호칭했다.

나는 한국어 강의를 시작했다. 이 분, 저 분이라고 해야한다고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이왕에 말할 수 있게 된 한국어이니 틈틈이 배워서 정확하게 쓸 수 있으면 언제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바르게 쓰는 법을 배우기 바란다. 그는 동의에 뜻을 표했고 다른 가족관계에 대해 묻다가 외가와 친가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일반적으로 Uncle이라고 칭하는 삼촌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이해하겠다고 말했고 나는 영어와 한문을 써가며 그 이해를 돋았다. 그러나 얼마나 옳게 이해했을지 확신은 없다. 내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그들에 입장과 문화에서 다르게 쓰여지고 있다면 그건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망마네 집 옥상에서 바라다보이는 카투만두 시내, 거대한 붉은 기와집이 하얏트 호텔이다.     ©김형효

밀런이 잠들어 있고 밍마가 부엌에서 무언가 도마질을 하는 듯했다. 잠시 후 카메라를 들고 그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하얏트 호텔과 머우다 사원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 나를 본 밍마가 그의 집 옥상에서 보는 풍경이 더 좋다며 옥상으로 안내했다. 밍마와 나는 함께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얏트 호텔과 머우다 사원을 배경으로 밍마와 나는 각기 포즈를 취했다. 그때 잠에서 깬 밀런이 옥상으로 올라왔다. 밀런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포즈를 취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카투만두 공항과 산 풍경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밍마가 네팔식 라면인 라라를 끓일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밀런과 나는 밍마와 나눈 이야기 그리고 오후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면을 함께 먹고 밍마의 카펫공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시간은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밍마가 사는 띤쭐라 마을을 지나 쪼르뻐띠 시장 근처에 있는 밍마네 카펫공장에 도착했을 때 밍마의 외삼촌과 밍마의 외사촌 여동생이 나와 안내해주었다.


카펫을 짜고 있는 직공들은 쉴새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고 작업지시서와 카펫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직공의 아이들이 그들 곁에서 놀고 있는 모습은 예전의 한국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지금도 아이를 기르고 있는 극빈한 가정의 부모들이 보여주는 그런 모습이리라. 그들은 낯선 이방인의 방문에 아랑곳않고 일에 열중했다. 밍마에게 사진을 찍어도 괜찮을까 물었고 그들도 싫은 기색은 없었다. 직공의 아이들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즐거워하며 포즈를 취했다.

▲카펫공장에서 밍마의 오른쪽 끝이 밍마의 삼촌이고 그 옆은 그의 딸이다. 필자 뒤로 직공과 직공의 자녀들 그리고 밍마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 김형효


밍마의 외삼촌은 실과 카펫 완성품을 보여주며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나는 밍마에게 내가 판단할 때는 한국인들에게 실용적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카펫이 너무 무겁고 색상 또한 어두운 분위기여서 지금 한국의 유행을 따르는 데 어려움이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선진국에 카펫 산업에 대해 학습을 할 것을 권했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각기 그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양과 칼라 그리고 현재의 선호도가 담겨있는 책자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우선은 그것을 참조해 보고 비교해야만 세일즈에서도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공기가 좋지 않고 탁한 거리를 걸었다. 머우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머우다 거리를 걷다가 유명한 만두가게가 있다면서 그곳에 가서 만두를 좀 먹자고 했다. 밍마가 자주 가는 듯 했다. 1인분이 20루피 정도하는 만두가게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하는 수없이 합석을 했다. 밀런은 우리와 다른 자리에 앉아야 할 정도로 손님이 밀려들었다. 대기중이던 우리 앞에 손님들이 나가자 우리는 그때야 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제법 맛있는 만두와 콜라를 곁들여 마시고 머우다를 향하는 중 밀런은 내 구두 앞꿈치를 수선할 것을 제안했다. 나는 20루피를 들여 밤색 구두를 수선했다. 구두수선을 하는 도중 바로 앞 과일가게에 눈길이 멈췄다. 우리 나이로 10세 전후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과일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어린 동생들이거나 동네 여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에게 무어라고 장난을 치는 듯했다. 그는 나를 향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줄 것을 청하는 듯했다. 나는 카메라를 들이댔고 그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가까운 머우다 거리는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머우다 사원에서 어웅시를 맞아 심지에 촛불을 켜며 중생들의 염원을 달래주는 붓디스트 여인! 그들은 촛불이 아닌 심지에 불을 붙였다.     © 김형효

사원 주변으로 원을 그리며 기원을 하는 신자들 사이로 또다른 원을 그리며 구걸을 하고 있는 아이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몸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가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오늘은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기회가 되고 있는 듯했다. 더러는 승려들도 그 사이에 끼여 있었다. 밍마에 말에 의하면 행사는 매월 1회 어웅시가 있는 날에 열리는 데 그때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고 했다. 네팔말로 어웅시가 있는 날이란 달이 가득찬 날이라고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을 해주기에 한국에서 말하는 만월 즉 보름날을 말하는 것이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 일행과 함께 한바퀴를 돌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원을 했다.

그들이 절박한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를 또한, 나의 무사한 여행을 바라기도 했다. 기원행렬에는 밍마와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밍마의 친구에 어머니들이라고 했다. 한바퀴를 돌고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다. 밍마는 집에서 하루 쉬어가기를 청했다. 우리는 갑작스런 초대에 응하기가 멋쩍어 다음에 날을 잡자고 말하고 정중히 사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한국에 기아자동차에서 만든 승합차이다. 정확한 사양은 모르나 봉고 15인승 쯤 되어 보였다. 다른 교통편보다 상태가 좋은 자동차였다. 우리는 그렇게 사마카시 거리에 도착해서 밀런의 집까지 말없이 걸었다. 나는 수많은 까마귀떼가 인상적인 카투만두 초저녁 거리에 까마귀를 향해 카메라 후레쉬를 터트렸다. 밀런은 말없이 앞서 걷고 있었다.

▲어웅시를 맞아 인파로 북적대는 머우다 사원 앞에서 밀런과 함께.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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