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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지옥으로 변한 신들의 도시, 카투만두
[김형효시인의 네팔기행] 너겐드러의 생일파티에 갔다
 
김형효   기사입력  2004/10/30 [19:33]

6월 18일 오늘 밤에는 한국과 네팔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한국대사관에서 주최하는 [“The Korean Traditional Dance Performance"가 손경순의 춤 2004]라는 부제와 함께 손경순 무용단의 진행으로 열린다. 낮에는 밀런의 고모네 집에서 밀런의 고종사촌동생인 너겐드러의 생일파티가 열린다. 밀런은 밖에서 일을 보고 오겠다며 고모님댁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나는 밀런의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아직 공사중인 헤므라저의 집, 대저택이지만 15년여가 된 집이 아직도 공사중인 모습 그대로다. 살면서 집을 새로 짓고 수선하는 것이 일상인 듯하다.     ©김형효

헤므라저 집 앞에 도착했더니 서바나와 슈르띠, 헤므라저의 아내와 루빠동굴 그리고 소스띠가도 함께 떠날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나는 잘 차려입은 네팔 여성들의 호위를 받듯 거리를 걸었다. 무엇을 선물을 해야하나 고민하며 걸었다. 소스띠가는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착한아이다. 너무도 잘 따라 걸어주니 친근감이 더하다. 10여분 쯤 걸었다. 선물가게가 나왔다. 공기는 탁해 숨 쉬기 곤란한 지경이다. 서바나가 선물가게에 먼저 들어갔다. 나는 향수를 선물로 준비했다. 18세 청년 너겐드러에게는 필요한 선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돈으로 직접 줄까도 고민했으나 그도 수월한 것이 아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데 얼마를 쥐어 주겠는가? 그렇다고 그만 둘 수도 없는 일이니 나도 생각 끝에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선물을 골랐다. 사실 주머니 사정이랄 것도 없다.


10만원의 여행경비는 여행경비라고 말 할 수 없이 처량맞다. 20달러는 태국에서 환전해서 태국돈으로 나중에 태국 공항에서나 사용할 수 있고 나머지 80달러를 환전해 4800루피를 갖고 있었으나 그도 이제 1200루피 정도 남았으니, 속으로 걱정이 많다. 물론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는 밀런이 있지만, 끝까지 그에게 큰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그와 함께 하는 일정마다 차비는 밀런이 다 내고 있다. 지난번 무나에게 선물한 330루피도 아직 갚지 못했다. 환전하기 전이라 내가 직접 지불하지 못했던 돈이다. 내심 빌렸다가 한국에 가서 갚으면 된다지만 그도 편한 일이 아니다. 밀런의 입장에서 단 한푼이라도 부모와 형제에게 남기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그에게 더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 어렵게 구입한 선물을 챙기고 나서 그래도 마음이 홀가분하다. 선물가게 앞에서 작은 택시를 잡았다. 사실 카투만두에서는 보통이니 작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티코 정도의 차가 보통의 영업용 택시이니..., 나와 소스띠가는 앞자리에 낮고 나머지 밀런의 어머니와 사바나, 헤므라즈의 아내, 그리고 루빠동굴과 슈르띠는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뒷좌석에서는 몸 집 큰 다섯 여성과 아홉 살 아이의 즐거운 웃음을 웃고 나는 소스띠가를 안은 채 혼탁한 공기에 쩔쩔매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왼쪽은 너겐드러의 할머니, 가운데 헤므라저의 부인이자 너겐드러의 사촌 형수, 오른쪽은 밀런의 어머니이자 너겐드러의 외숙모     © 김형효

과일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밀런의 어머니와 헤므라저의 아내는 잠시 과일가게에 들렀다. 나와 소스띠가는 앞서 걸었다. 생일파티에 가는 것이니 필름이 준비되어야 할 것 같아 필름가게에 들렀다. 처음 네팔에 도착했을 때는 열리지 않던 입이 이제는 자신있게 열린다. How much? 120루피를 주고 필름 한 통을 샀다. 다시 앞서서 뛰었다. 걷다가 뛰다가 소스띠가와 나는 맨 먼저 너겐드러의 집에 도착했다. 너겐드러는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만나서 “너마스떼!”라 인사하고 악수를 하고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마친 후 안내하는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벌써 많은 친구들이 와 있었고 벌써 생일에 행해지는 의식을 치른 모양이다. 그들 특유의 꽃을 짓무르게 으깨어 이마에 붙였던 흔적이 있고 특히 너겐드러에게는 커다란 붉은 꽃한송이가 이마에 피어 있었다. 그것은 친구들이나 고모 그리고 그의 형제들이 너겐드러에게 축하와 앞으로의 건강 그리고 미래의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붙여주는 것이었다. 땀을 식힌 우리도 그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의식을 치렀다. 맨 먼저 선물을 전하는 밀런의 어머니는 옷을 만들 천에 5루피를 얹고 그곳에 꽃을 짓무르게 한 꽃덩이를 얹었다. 그리고 그것을 너겐드러에게 전하고 그의 이마에 붙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도 갖다 붙였다. 나는 별도로 전하기만 하고 내 이마에도 그것을 붙여달라고 했다. 마치 부처님 이마에 점 같은 그런 것이다.

 

▲밀런의 어머니이자 너겐드러의 외숙모가 생이을 맞은 너겐드러에게 옷감을 선물하고 있다.     © 김형효

우리는 순서대로 선물을 전달하고는 애써 준비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도 한참 후 헤므라저가 도착했고 잠시 후 밀런과 뻐원동굴이 도착했다.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고는 나는 공기 좋은 그곳에서 지친 몸을 쉬며 잠시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인사를 마치고 밀런의 집으로 출발하였다. 우리는 넓은 도로가 있는 길목까지 걸어나와 밀런의 집근처까지 오는 버스를 탔다. 대중 교통편을 이용하는 때마다 매캐한 공기와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을 감수해야한다. 지옥철이네 만원버스네 하며 서울 생활의 불편을 말하지만, 카투만두의 교통은 교통이 아니라 고통이다. 어찌 카투만두의 고통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세삼스럽게 편한 자의 토로란 끝이 없다란 생각을 한다. 버스에서 한참을 불편한 마음으로 손에는 손수건을 쥐고 입과 코를 틀어 막아보지는 사실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잘도 견디고 살아가고 있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안되었다는 생각이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상이니 특별하게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질 일도 아닌 모양이다. 10여분을 걸어 밀런의 집에 도착했다.

  

헤므라저와 밀런 그리고 나는 셋이서 밤에 열리는 한국과 네팔 수교 30주년 기념 “The Korean Traditional Dance Performance"가 열리는 브렌드라 인터네셔널 컨벤션센터에 가야한다. 헤므라저의 둘째아들인 라케쓰가 몰고간 오토바이가 오면 그것을 타고 갈 계획인데 라케쓰가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택시를 잡아탔다. 5시 30분, 밀런의 집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 우리는 왕궁앞 거리를 지나 굿따리셔러 거리를 지나 매캐한 도심을 빠져나가는 길이다. 거리에 중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예의주시의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퇴근길에 정체는 쉽게 빠져나가도록 하지 않는다. 낯선 거리다. 헤므라즈와 나는 뒷좌석에 앉아 한국 춤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문득 이주노동자는 네팔의 문, 네팔의 문고리와 같은 사람들이다는 생각이 났다. 그들은 네팔과 우리를 가장 본격적으로 만나게 한 장본인들이다. 물론 그들이야 생존의 근거지로 한국을 찾았고 더 수월하거나 더 나은 삶의 지향을 찾으려는 노력이었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가 네팔을 인식하고 인정했던 것은 보통의 경우 산악인들이 세계최고봉을 등정했다는 뉴스를 통해서 인 듯하다. 티벳이나 인도처럼 신비한 고산지대 사람들을 목격하며 욕심없이 살아가는 수도승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하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막연한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거리는 삼엄한 경비와 심한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굿따리셔러거리를 돌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20여분간 옴짝달싹 못하고 택시안에 갇혔다. 밀런의 말에 의하면 가까운 곳에서 시위중이라서 길이 막히는 것이라고 말하고 길가에 행인이 운전기사와 나누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였다고 한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100미터도 못가서 또 다시 정체가 시작된다. 비교적 넓은 삼거리였다.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경찰관이 서 있지만 정리는 그리 쉽지 않다. 그곳에서도 10여분정도의 체증을 경험하고 방향을 바꾼 택시는 서서히 우리의 목적지를 향해 진행했다. 나는 이 거리의 이름은 무엇인가 물었다. 바네쉐르 거리 그러니까 오늘 공연이 열리는 행사장 앞 거리다. 공연장 앞에 도착했다. 검문을 하던 군인과 경찰들이 늘어서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차해 걸어 들어가라는 지시에 따른다. 내국인에게는 단호한 그들이 외국인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검문검색으로 그친다.


정문을 통과했다. 앞서 네팔인들이 가족단위로 입장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더러는 친구들 혹은 사업 파트너인지도 모르겠다. 공연장은 드넓은 광장이 포함된 제법 규모가 큰 곳이었다. 나는 밀런에게 물었다. 밀런의 말에 의하면 국제적인 행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열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처럼 생각하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부시설은 세종문화회관에 미치지 못하지만 외부의 광장이나 다른 부대시설로는 세종문화회관을 능가할 정도다. 나는 헤므라저와 밀런에게 건물전체가 카메라에 잡힐 위치에서 포즈를 취하라고 말했다. 행사장에 도착하자마자 출입문에서도 2차 검색이 시작되었다. 짧은 줄이 형성되었다.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형식적인 검색이 있었다. 출입문을 통과하자 제복을 입은 안내원들이 안내를 맡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은 국제교류협력단내 코이카 봉사단원이었다. 그들과 대사관 직원들이 바쁘게 안내를 맡고 잇었던 것이다. 그들은 입구에서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Korea now"라는 문구가 선명한 홍보책자와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이 커버를 장식한 국정홍보 책자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편집위원,시인,www.sisarang.com,www.nepa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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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30 [19:3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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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보 2004/11/11 [13:42] 수정 | 삭제
  • 불교의 천국
    네팔까지 가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계속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