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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찬 삶의 현장에서 아리랑 페스티벌까지
[김형효시인의 네팔기행] 한국과 네팔, 인터넷으로 더 많이 더 빨리 교류를 모색
 
김형효   기사입력  2004/08/09 [11:35]
 6월 9일 셋째 날이다. 어제처럼 밤새 비가 내렸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전날의 친절과 세심함으로 맞아준 큰형님 댁을 찾았다. 헤므라저는 막 그의 일터에 가려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나도 함께 갈거냐고 말했다. 그는 분명 GO! my workshop together!라고 말했다. 나는 어떤 세미나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를 따랐다. 가던 길에도 계속 영어를 징검다리 삼아 네팔어와 한국어를 서로 공부했다. 그가 말한 워크샵은 그의 철공소였다. 직원들은 바쁜 일손에도 낯선 이방인의 너마스떼!라는 인사에 화답해주었다. 잠시 후 공장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왔고 인사를 했다. 아니 어쩌면 거래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곳에서 다시 찌아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주변을 어슬렁거려 보았다.

▲오염된 강, 강 건너 가난한 사람들의 집들.     ©김형효

바로 옆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강이라기에는 너무나 오염이 심각해서 강이란 용어를 쓰기에는 민망할 지경이었다. 온갖 쓰레기와 폐수는 호흡을 곤란하게 했다. 바로 그 옆에 학교가 있고 가난한 서민들이 살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의 난민촌 같았다. 기아와 기근에 허덕이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될 정도로 낙후했다. 그런 풍경을 둘러보고 있는데 헤므라즈도 참 심각하다며 걱정을 하였다. 손 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강을 둘러보다가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오던 길에도 길가에 여러 가지 물건들에 대해 손짓, 몸짓으로 네팔어로 뜻이 무엇인지 한국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서로 공부하며 걸었다. 지나던 길가 학교에 동상이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작가라고 했다. 네팔에서는 유명한 작가라고 말했다. 흰 목도리가 둘러져 있었다. 그를 기리던 추모객들이 목에 걸어둔 것이리라. 아침 일찍 집을 나가 바쁜 일을 보고 돌아온 밀런과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네팔의 남대문시장 어썬 거리를 찾았다.

▲어썬 거리의 혼잡 속에 전선들도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다.     © 김형효

어썬 거리를 찾아 가기 전에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디네스의 누나가 운영하는코닥칼라현상소를 찾았다. 디네스 누나 가게에는 전날도 잠깐 들렸었다. 오늘은 그의 누나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상냥해 보였다. 디네스 누나는 일행에게 찌아를 마실 것인지를 권했다. 우리는 더네바드!라고 인사하고 아침에 찌아를 마셨다며 사양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네팔의 인터넷업체 [VIEW NEPAL] 사장인 M.B. Roka를 만났다. 그는 밀런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내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www.NepalKorea.com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는 사업가이다.


우리가 계획하는 네팔코리아닷컴은 네팔과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양국 사람들이 신뢰를 통하여 서로 간에 우의를 다지며 활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저널과 생활정보지의 구실이 되면서 관광에 그리고 무역에까지 그 역할이 이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양국에 대해서 호의적인 사람들끼리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모색해가면서 초기단계의 준비를 해나가고 있다. 우리는 어제처럼 네팔의 전통과 네팔의 혼이 서려 있는 공예품들을 살피며 그가 안내하는 케이엔느트레더스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먼저 작업실을 구경시키고 직원들과 눈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집무실인 사장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무엇을 마실 것인지 물었다. 콜라와 커피를 주문한 우리는 그와 만나 www.NepalKorea.com이라는 홈페이지의 구성방법과 스타일, 그리고 운영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논의 중에 네팔의 저널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 그 저널의 표지그림을 찍었다. 오늘의 네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두 사진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렇게 사장과 작별하고 다시 타멜거리의 중심거리에 접어들었다.

▲총을 멘 군인과의 대화! 아저씨 왜 총을 메고 있어야 해요?     ©김형효

▲권좌는 어느 나라나 바늘방석인 모양이다. 권좌에 못질을 해놓은 모습의 네팔이라는 시사저널. 내란 중인 네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 김형효

다시 거리를 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이번에는 네팔코리아 상점을 찾기로 했다. 가던 길에 잠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중심지의 베이커리에 들어가 만두(모모), 짜파게티(쪼우민)와 음료를 곁들여 먹었다. 유일한 육교가 있는 곳이란다. 육교에는 영문으로 쓰여진 삼성이라는 대형광고판이 부착되어 있었다. 육교 아래로 노점상들이 즐비하다. 간혹 7~8세 되는 어린 아이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얼마 걷지 않아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노점상 단속반이 출동한 것이다. 노점에 물건들을 챙겨 이리저리 대피하느라 정신이 없다.

▲왕자들의 목욕탕이었다는 육교 건너편의 호수.     © 김형효


혼란한 시국에 시위대나 군인들이 등장한 것은 아닌가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들었다. 내용을 알고는 안타까운 마음만 더했다. 바로 그 옆에 네팔에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서점에 들렸다. 서점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들, 네팔어로 생각되는 책들이 즐비했다. 아랍어들 같기도 했던 그 책들 중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책들은 바로 네팔의 상징인 히말라야 산맥의 수많은 산 봉오리들이 담겨진 사진들이었다. 아름다운 풍경, 그러나 네팔 거리를 바라본 이방인의 눈에는 결코 그런 아름다운 곳들이 아름다움 자체로만 보이질 않았다.


서점에서 나온 우리는 곧 네팔코리아 상점을 향했다. 가던 길에 밀런의 친구를 만났다. 그도 무역업을 한다고 했다. 잠깐의 수인사를 마치고 곧 네팔코리아 상점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부터 한국인임을 알아본 상점에서 일을 보는 아름다운 여종업원이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상점 2층에 오르기 전 밀런의 몸을 잠시 검색하자 밀런은 물건을 맡긴다. 우리 일행은 무사통과다. 곧 상점 케이엔느트레더스의 네팔인 사장인 P.N. Shresta가 나와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케이엔트레더스의 네팔인 사장, P.N.SHRESTHA의 환한 웃음.     ©김형효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고 2층 점포를 밖으로 나 있는 출입구를 따라 나갔다. 그곳에서 찌아를 주문하고 한국인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인 방문객이 왔다고 전했다. 찌아가 도착하자마자 한국인 여사장 이상옥 씨가 도착했다. 네팔에 와서 함께 찾았던 스님과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네팔인을 제외하고 현지에서 정착한 사업가로서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다.


그녀는 방글라데시에서 2년여를 살면서 사업을 했고 현재는 네팔에서 5년째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앉자마자 현지에 정착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내게 도대체 무엇을 알아보기나 하고 그러느냐고 나무래듯 말했다. 마치 폭포수가 떨어져 수면에 꽃을 피우듯 정신없이 주의를 주었다. 마음을 정한 내 입장에서는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염려는 같은 한국인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였다. 우리는 그녀의 제안을 받았다. 그녀가 하고 있는 수공예 작업장에 한번 들려보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신없이 말을 쏟아낸 격정을 보았기에 편안한 마음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안내하는 곳을 따라 갔다. 케이엔느트레더스에서 곧바로 귀퉁이를 돌아 100m 정도 지나 그녀의 작업장이 나타났다. 그녀가 안내하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파트에는 그녀의 비서이거나 직원으로 보이는 네팔인 여성이 다소곳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의 작업실은 아파트 2층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녀가 기거하는 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라고 했다. 오랜 동안 외국 생활을 하며 한국에도 자주 오가며 지낸다고 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향수병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인 이상옥 사장인 선물한 모자를 쓰고, 달구지 수준의 삼륜차(뎀뿌)에 오르다.     © 김형효

그녀는 우리 일행에게 모자를 선물했다. 거절은 잠시 특별한 작품이라 내심 욕심도 있었지만 그것을 탐낼 성질의 것도 아니고 작업실에서 판매할 일이 만무해서 값을 묻지도 못했다. 그녀는 먼저 동행에게 모자를 선물했다. 나는 넉살좋게 나는 뭐냐!고 농반진반으로 말을 건넸다. 그녀는 곧 남자용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찾아낸 모자는 참으로 개성만점의 그런 모자였다. 반가운 고국 사람에게 낯선 네팔에서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게 될 줄은 전연 몰랐다. 그녀는 처음 만나는 고국 사람에게 수없는 말을 일거에 쏟아내는 것으로 동향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후련하게 터 놓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듯 여행이 끝나기 전에 꼭 한번 저녁식사에 초대할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참으로 다양한 색감의 가방과 모자를 수공예품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면서 작별을 고했다. 무나네 집에서는 저녁 만찬이 준비되었다. 우리는 다른 날보다 늦게 집에 돌아았다. 둘루다이(큰형) 헤므라저는 화가 나 있었다.


초대에 응한 사람들이 예정시간보다 두 세 시간을 넘기고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한 일이다.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연속되는 도보기행과 저녁만찬으로 몸은 지쳤다. 그러나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무나는 네팔에서 보낸 첫째 날 밤부터 아리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랑을 너무 잘 배웠고 너무나 좋아했다. 그의 가족들과 우리는 아리랑 페스티벌을 벌이다시피했다.

▲아리랑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탐구적 자세를 보여준 무나는 아리랑도 곧잘배웠다. 나중에는 네팔어로 아리랑을 적어가며 학교에 폐스티벌에서 노래부르겠다고 다짐하였다.     © 김형효

나는 한국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리랑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단어조합형 영어로 설명했다. 물론 필수적으로 몸을 이용하고 손을 이용하였으며 그도 모자라면 밀런에게 통역을 요청했다. 밀런 쉬레스타의 맏형인 헤므라저의 집이자 네팔의 미래를 밝게 인식시켜주기에 충분한 아름답고 학습능력이 뛰어난 무나의 집 옥상에서 식사를 하였다. 식사는 먼저 네팔의 전통주 럭스를 마시면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뻥튀기와 비슷한 네팔쿠키를 안주로 내놓은 듯했다. 벅찰 정도로 독한 술을 마시기에는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온정이 너무나 고맙고 기뻐서 외면할 수 없는 술잔을 맑은 마음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별빛이 빛나고 있었고 늦은 밤이 무색하게 흰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아티컬한 밤이라고 탄성을 질렀다.


술잔을 기울이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나는 나의 넉살을 감추지 않았다. 숨김없이 발산하게 되는 나의 끼라면 끼요. 넉살이라면 넉살인 내 행동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더욱 주체를 못한다. 진하고 독한 술에 음료를 곁들여 마셨지만, 취기는 어쩔 수 없었다. 이어지는 권주를 사양하지 않고 술잔을 받아들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드디어 절정에 오른 내 술기운은 아리랑에 쑥대머리를 혼합해 부르는 것으로 마감했다. 그날 밤 훌륭한 아리랑 송 팬이 되어버린 무나는 아리랑을 거의 다 소화해냈다. 잠시 후 일상적인 식사가 나왔고 후식까지 준비되었는데 후식은 요플레였다. 늦은 저녁시간의 여흥을 마치고 밀런의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옆집인 밀런 집에 와서 급히 씻고 깊은 잠을 청했다. 얼리 수트니! 우리 말로 저는 먼저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편집위원,시인,www.sisarang.com,www.nepa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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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8/09 [11:3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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