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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전해주는 네팔사람들
[김형효시인의 네팔기행] 네팔꼬 컬쳐, 거르, 아트 람부로!
 
김형효   기사입력  2004/09/13 [18:49]
 
▲급한 귀국길을 재촉하는 서영순을 위해 밀런은 헤므라저의 오토바이를 빌려타고 카투만두 시내와 근교를 누볐다.     © 김형효


6월 14일 우리는 일찍부터 서영순의 귀국을 준비하였다. 특별난 준비는 아니다. 소스띠가와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일찍 집을 찾아왔다. 뻐원동굴은 오늘도 “서영순 이쁘다”라 말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그들과 함께 한참 동안 기념촬영을 하였다. 서영순이 공항으로 떠나기전 루빠동굴과 뻐원동굴은 서영순에게 귀국 선물로 네팔의 전통의상을 선물하였다. 막 짐을 챙겨 떠나려던 서영순은 그들이 사온 네팔의 전통의상으로 갈아입었다. 너무나 세련된 색감과 뛰어난 감각으로 옷을 골라온 루빠동굴의 정성에 탄복했고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감각에 우리는 경탄했다. 서영순은 그 옷을 입고 다시 몇 컷의 기념촬영을 한 후 공항으로 출발했다. 어스미와 러지따, 레비카도 그 소식을 듣고 마을 앞에 모여 술렁거렸다. 레비카는 포장지에 무언가를 싸들고 와서는 자꾸 내게 말을 건넸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은 먹을 것이라는 것 밖에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밀런에게 함께가서 말하자고 했더니 자꾸 쑥스러운 듯 몸을 뺀다. 그는 그것을 서영순에게 전했다.

▲급하게 귀국을 서두르던 서영순은 밀런과 동행한 파턴에 사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이날 여행은 밀런과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전쟁을 치루듯...,     © 김형효

11살 레비카가 전한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아쉬운 배웅을 해주는 마을 분들이 고마웠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공항에 배웅을 나갔다. 공항으로 진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운전기사의 말을 밀런이 전했다. 처음 카투만두 공항에 도착했을 때보다 검문이 훨씬 강화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몇 장의 기념촬영을 마치고 나는 검문검색하는 군인들에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밀런이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동네 아는 형님이란다. 공항에는 나이든 여성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밀런에게 물었더니 인도사람들은 죽기 전에 네팔에 꼭 한번은 다녀간다고 했다. 그것은 주요 흰두교 성전이 네팔에 있기 때문이란다. 짧은 배웅을 마치고 밀런이 알고 지내는 동네 형님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내렸다.


오늘은 그의 외삼촌 사무실에 들리기 위해 공항에서 10분여 거리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너무 먼지가 많이 일었고 공기가 너무 탁했다. 차에서 내려 10분정도 걸었다. 대단히 큰 건축물이 보였다. 오래된 건축물로 보였고 그 건물 또한 온통 목각으로 찬란했다. 탄복하는 내게 밀런은 그곳은 호텔이라고 했다. 잠시 후 그의 외삼촌이 일하고 있는 일 터에 도착했다. 입구에 경비원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외삼촌은 3층에 위치한 곳에 있었다. 인력송출회사의 부사장이란다. 그의 이름은 Kumar Shrestha 밀런 어머니의 친동생이다. Ative overseas (P) LTD의 부사장이다. 그와 대화하고 있는 도중 남직원이 쥬스를 가져왔다. 우리는 쥬스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이어서 한국과의 인력 송출 문제가 있었는데 성사단계에서 거금을 입금하라고 하고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 실체를 확인하기를 원했다. 나도 알 수 없는 코람은행이라는 은행의 계좌번호를 알려주고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란다. 미심쩍은데가 많았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고, 내가 아는 한 코람은행이라는 은행의 실체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과 네팔의 인력 송출 씨스템을 설명했다. 그가 보여준 itembanks.com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으나 도무지 검색되지 않았다. 나중에 한국에 가서 확인해보겠다고 말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우리가 생활하는 기준으로 보면 버스라고 하기에 민망할 지경의 네팔의 주요 교통수단 중의 하나인 시내버스!     © 김형효

쨍쨍한 햇살을 뚫고 덜컹거리는 버스를 탔다. 네팔에 와서 처음 타보는 버스다. 난생 처음 타보는 네팔의 버스는 버스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낡았으며 밧데리의 힘으로 움직이는 차라고 밀런이 귀뜸해주었다. 한참 후 버스를 갈아탔다. 좀 점에 탄 버스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형편없기는 마찬가지다. 20분 정도 가서 내렸다. 언덕길을 걸어내려가 밀런이 고모님댁을 찾았다. 언덕 위에 집은 밖에서 보기에 아직 공사가 덜 끝난 집처럼 보였다. 밖에서 밀런이 인기척을 보내고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그의 고종사촌인 너겐드러가 방안을 둘른 목각 조형물에 페인팅을 하고 있었다. 보통의 솜씨없는 사람이 페인팅하기에는 까다로운 곳이었다.


잠시 후 그의 고모가 다른 방에서 나오셨다. 우리는 방안으로 안내되었다. 잠깐이지만 공기가 좋다는 느낌을 가졌다. 한국의 떡과 비슷한 머르피라는 음식과 전통 과자로 보이는 지지 이어서 러스버리라고 하는 레몬쥬스에 담겨 있으며 달디 단 찹쌀떡 모양의 음식이 나왔다. 콜라와 음료수를 연거푸 마시며 방을 옮겨 앉았다. 이곳에서도 사진첩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가족이 다 모여있는데 밀런에게는 사촌동생이자 고모의 큰아들인 요겐드러가 미국에 갈 때 사진이라고 고모가 설명해주었다.


그는 22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항공기 제작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고모는 먼다일(네팔 수공예)이라는 우리나라의 매듭공예와 같은 솜씨를 갖고 있는데 벽 한켠에 네팔에서 유명한 뻐수뻐디 사원 모형의 먼다일은 자신의 작품이라고 했다. 내게 네팔이 어떤가하는 밀런의 고모와 그의 사촌이 묻는 질문에 한국어 작문을 시작했다. 나는 밀런의 도움으로 네팔어 발음으로 한국어 표기를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그 문장을 읽어갔다.

▲가난의 얼굴과 성스런 성자의 모습이 엇갈리는 네팔의 문화와 생활이 엿보인다.     © 김형효

네팔꼬 컬쳐, 거르, 아트, 람부로. 이 말은 네팔의 문화, 건축, 예술은 좋다이다. 나는 이어서 네팔은 환경오염이 문제고 가난이 문제지만 네팔에 젊은이들이 개척해가고 있는 현재 모습은 네팔에 희망이며 네팔을 발전시키리라 믿는다. 내가 만나고 있는 그리고 만났던 네팔의 친구들과 네팔을 찾아와 본 문화, 내가 네팔에 와서 접한 사람들, 내가 알게된 현실은 어렵지만 바로 네팔을 발전시키리라는 확신을 준다. 희망의 근거는  네팔의 청소년들이 보여주는 적극성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네팔의 풍부한 문화예술은 흔들림없는 밑바탕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통 찻잔에도 그들에게서 우러나는 습관같은 조각예술의 단면이 드러난다.     © 김형효

잠시 후 너겐드러의 친구가 모뎀프로그램을 갖고 찾아왔다. 모뎀을 연결시키고 일본에 가 있는 밀런의 여자친구와 체팅이 시작되었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그 방에서 계속 졸음이 쏟아졌다. 잠시 선잠을 자고 일어나 채팅을 하며 밝게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가족들을 보았다.


밀런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냐고 했더니 밀런과 그 여자친구가 결혼문제로 이야기 하고 있고 고모도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친구는 울상이 되다가 이내 밝은 표정으로 바뀌는 듯 했다. 이어서 요겐드러와 접속을 시도하고 있었다. 잠깐 잠들었다. 깨어났다. 3~40분은 잔 듯하다. 여섯시였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밀런을 재촉했다. 너겐드러는 오는 18일이 자신의 생일이라며 꼭 초대할테니 잊지마라며 은근한 협박(?)을 했다.

 

나는 밀런의 가족은 곧 나의 가족이라며 꼭 참석할테니 염려말라 했다. 고모와 고모부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오던 길에 처음으로 한국에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인사로 안부를 전하고 전화를 끊고 곧이어 발해뗏목탐사대 방의천 형과 통화를 했다. 짧은 인사를 마치고 현지분위기를 전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식사를 마치고 어느 곳을 다녀왔는지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곧 잠이 들었다. 지친다. 많이 여행을 했다기 보다 먹고 마시는 것들이 낯을 가리는 탓이다. 고생은 이제 시작인 듯하다. 

편집위원,시인,www.sisarang.com,www.nepa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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