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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서 접한 젊은 청년의 비극
[김형효시인의 네팔기행] 아픔 이겨내며 접한 김선일씨 납치사건
 
김형효   기사입력  2004/11/18 [14:43]

6월 20일  “찐따 버에꼬마 마뿌 거리기누 올라”라는 말을 배웠다. 잠에서 깬 나는 밀런에게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라는 네팔 말을 알려달라해서 배웠다. 그 말이 "찐따 버에꼬마 마뿌 거리기누 올라>다. 힘들게 견뎌낸 시간이라서 아침은 개운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벅터부르를 간다는 밀런의 말에 알았다며 동의를 표했다. 밀런에게 말해 밥에 물을 넣고 끓여달라고 어머니에게 전해달라했더니 어머니는 네팔식 죽을 끓이셨다. 짠맛 때문에 물을 섞어가며 겨우 요기를 했다. 그리고 밀런과 함께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는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간 후 내려서 서점에 들렀다. 나는 그곳에서 밀런을 통해 알아볼 수 없는 네팔 시인 선집을 구했다. 그곳은 오따이띠 거리다. 가는 길에 갈증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 생과일 즙을 내어 파는 과일가게에 들러 파인애플 쥬스를 마셨다. 한결 속이 편했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밀런이 말했다. 디펜 집에 간다고..., 가물가물하다. 디펜이 누군가?

 

▲뉴로드를 지나오던 길, 상점이 즐비한 골목길에 사원을 짓고 있었다. 신의 흉상! 신들은 그들이 지켜주는가? 그들이 신을 지키는가?     © 김형효

 그의 집이 있다는 골목에 들어섰다. 상점들이 북적거리는 한켠에 위치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앉아 있는데 도무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콜라를 내왔다. 마실 수가 없었다. 정중히 사양하고 다른 것을 찾았다. 시원한 물, 그러나 그 물 맛이 한국에 물맛과 너무나 다른 것을..., 허덕이며 누워서 잠이 들었다. 잠들었다 깨고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한참 시간이 흘렀다.

 

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있던 어머니가 내가 잠에서 깨자 일어났다. 나는 어머니에게 화장실을 물었다.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다. 네팔어 책과 영어를 이용해 뜻을 전달하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였다. 어렵게 뜻이 통해서 화장실을 갈 수 있었다.

 

잠시 후 디펜의 동생(디페스,21세)과 누이 동생(디피까,18세) 그리고 삼촌의 딸이자 디펜의 사촌 동생인 어누갸(17세)가 함께 했다. 힘들게 몸을 가눈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디펜의 어머니 크리스너 마야(42세)는 수심이 가득했다.

 

▲가운데가 디펜의 어머니 크리스너 마야(42세) 오른쪽은 디펜의 여동생이며 왼쪽은 디펜의 사촌 동생이다. 맑은 눈망울이 빛난다.     © 김형효

 

드루버 까이스터(46세)를 만난 순간 디펜이 기억났다. 사실 디펜이라는 이름만으로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를 만나고 그를 소개받은 기간이 얼마되지도 않았고 이름을 자주 불러볼 기회도 없었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뉴로드(new road)라 불리는 곳이라고 했다. 특정 시기에 계획된 도시명인 듯하다. 어렵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밀런이 다른 볼 일을 보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한참을 자다깨다 반복한 시간이 오후 네시가 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재촉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로얄 패밀리 아니 그들의 왕자들에 목욕장소였다는 거대한 호수 주변 육교를 지나쳤다. 삼성이라는 광고가 육교의 광고판을 장식하고 있는 그곳에 노점상과 걸인들이 군데군데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눈동자 맑은 네팔 소년의 구걸하는 모습은 안타까운 발걸음을 부여잡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급하게 차를 탔다. 좁은 삼륜차에 올라탄 나는 바로 앞자리에 앉은 교복차림의 학생에게 눈길이 갔다. 좁은 삼륜차에 마주앉다보니 눈길이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올라탄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경사진 허리로 천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앉는 자세를 고쳐 히프만 의자에 기대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한 사람이 더 앉았으나 그 여성은 그 자세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땀을 흘리며 엉거주춤한 채 구부정이고 있는 모습이 보기 안타까워 옆사람과 내 무릎에 걸터앉으라고 말했다.

 

▲엔지니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 웃는 인상은 이방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 김형효

 

모두가 웃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여성은 통역을 맡듯이 했다. 밀런은 좁은 차 안에 한켠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바로 볼 수 없었다. 그와 말을 시작하고 학생이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엔지니어라고 답했다. 그에 나이는 24세라고 했다. 그와 나는 차가 멀어질때까지 서로 손을 흔들어 호의적인 관심을 표했다.

 

조금은 나아진 듯한 느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서 계속 앓아 누워 있어야 했다.

 

▲내가 탔던 버스다. 초라하기는 했지만, 좋은 마음을 싣고 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었다. 추억도 함께 찍혔다.     © 김형효

 먹고 싶은 것들이 하나, 둘 늘었다. 된장국 생각, 콩나물국 생각, 시원한 물맛을 느끼기 힘든 한국에 맛있는 물 생각, 그런 아쉬움 달래기에 충분한 것을 발견한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것은 열대에서 자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 망고였다.

 

몸이 지쳐 있는 상태에서 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는 때, 침대에서도 뒤척임을 멈추지 못할 정도의 고통 속에 밀런의 어머니가 가져다 주신 망고 맛은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기회를 준 그런 느낌이었다.

 

사실 카투만두에 도착해서 처음 며칠 동안 망고를 자주 먹었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건강한 상태에서 색다른 과일맛을 보는 그런 느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새롭게 느껴보는 과일 맛은 건강을 회복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어 주었다.

 

망고를 먹고 10분도 채 못되어 나는 뒤척임을 멈추었다. 그때부터 나는 살겠다는 일념이라도 보여주듯 손님의 본분이나 체면을 잃고 밀런에게 과일을 좀 많이 사다 놓고 먹자고 졸랐다.

 

사실 카투만두 사람들, 보통의 네팔사람들은 우리의 밥을 “밧”이라 부르는데 그 밧을 제외하고는 특별하게 다른 것을 먹는 예가 드물다. 그러나 과일을 사다준다고 혼자만 먹을 수도 없는 일이고 성격상 그렇게 혼자 먹지도 못한다.

 

아무튼 그렇게 제공된 과일을 먹으며 조금씩 기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낀 나는 다시 사는 그런 느낌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행경비란 없는 사람이 그때부터 고향,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은 발걸음을 인터넷방으로 재촉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찾은 인터넷방에서 나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김선일 씨 납치사건이었고, 이어지는 비보였다. 인터넷방에 앉아 있으면서 몇 번이고 한국대사관 앞 시위를 결심하면서 답답함을 달랬다. 그러나,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그 결심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여행객이지만, 외국에 나와서 접하는 모국 사람의 납치 소식은 더욱 더 특별한 감정으로 와닿는 느낌이다. 아마 내가 지금 한국에 있다면 광화문 네거리에 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곳 네팔 사람들에게 그 순간부터 “부스”노 “아메리카 노”라고 말하며 분을 삼켜야 했다.

 

물론 한국 정부의 김선일 씨 문제에 대한 대처방식은 초등학교 학생 수준의 협상력으로 밖에 비치지 않아 세계적인 망신이며, 자국민 보호에 대한 사고체계 자체가 없다는 것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사실 협상력이란 말을 사용하는 자체도 허망할 정도다.

 

도대체 외교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들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말인가? 안방에 앉아 세상 모든 일을 해결하겠다는 안일한 자세만으로 외교무대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현장에 없는 외교는 이제 죽은 외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현장에서 벗어나지 않는 외교력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고통 속에서 견디기 힘든 심적 고통을 더했다.

편집위원,시인,www.sisarang.com,www.nepal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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