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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폐허의 땅을 찾은 현대의 이방인들
[김형효시인의 네팔기행] 네팔의 시인 빠리잣, 그리고 어린 친구들
 
김형효   기사입력  2004/08/30 [22:25]
 느즈막한 시간에 밀런의 집에 도착했을 때, 밀런의 누나 루빠동굴은 우리가 처음 네팔에 도착했을 때처럼 일찍 친정집에 와서 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장만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머무는 방에서 루빠동굴 가족과 네팔 여행이 어떤가에 대해 그들이 묻는 궁금증을 해소해주기 바빴다. 언어를 올바로 구사하지 못하는 절박감을 연일 느낀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어와 네팔어를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책과 토막토막 알고 있는 영어 단어는 우리의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첫날부터 아리랑 팬이 되어버린 무나는 오늘도 집요하게 아리랑을 가르쳐달라며 아리랑 춤을 추는 흉내를 낸다. 내가 가르쳐준 한국어로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말하고 “아리랑! 아리랑!”을 멈추지 않는다. 혀가 말리며 소리를 내는 무나의 사운드는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런 예쁜 소녀에게 체면을 차리겠다고 못 가르쳐 줄 일이 없다. 그리고 틈틈이, 이미 전한 이야기지만 한국인에게 아리랑이 어떤 의미인지도 전달한다. 그는 오늘은 작심을 한 듯 아리랑을 네팔어로 정리한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축제 때 아리랑을 부르겠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나 잘 불렀다. 그렇게 아리랑을 배운 무나와 우스운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밀런의 많은 조카들 사실 밀런의 조카가 많다기 보다 이미 나의 친구가 되어버린 밀런의 이웃에 어린 아이들까지 많은 아이들이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소스띠가의 생일날 도착했으니 소스띠가를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무케스, 라케스, 걸바나, 사바나, 무나, 어누, 아까스, 아바아시, 레비카, 어스미, 러짓따, 필리나 등등, 멈추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리랑 송을 배우다가 밀런의 조카 걸바나의 딸인 슈르띠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바아시와 아까스도 함께 나는 그들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좀처럼 외워지지가 않았다. 슈르띠를 연발하다. 아까스를 아가시로 부르고 아까스를 바로 부르고 나서 슈르띠를 버스누라 불렀다. 모두가 파안대소를 한다.

▲왼쪽이 문제의 주인공 슈르띠이고 오른쪽은 그의 이모인 무나.     © 김형효

무슨 영문인지 몰라하는 나를 보고 그들은 어처구니없이 웃는다. 아바아시는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웃는다. 사실 버스누스는 “앉으세요.”란 네팔어인데 슈르띠에게 버스누라 했으니 웃지 않고 베기겠는가? 그래서 아이구 이 돌대가리라고 하며 멋쩍어 하는데,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들었던 무나는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집요한 그의 추궁(?)에 하는 수없이 Stone head!라고 제법 재치있게 답했고 조크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말은 여지없이 불화살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무나는 그때부터 나를 보면 돌대가리 하고 만면에 좋은 웃음을 웃는다. 아이쿠 머리야! 그날부터 나는 아리랑에서 돌대가리로 별명이 바뀌었다. 어째 사람은 못된 단어들은 잘도 배우는지...,


그렇게 어눌하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니 밥 때가 되었다. 우리는 식사가 준비된 안방에서 식사를 청했다. 우리와 다르게 그들은 술잔을 먼저 기울였다. 그것이 내게는 항상 고역이었다. 네팔의 식생활 방식인가 싶다. 그들은 먼저 가벼운 술잔을 기울인다. 그리고 술자리가 정리되면 식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오늘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어서 무나에게 아리랑을 청했다. 오늘은 그만큼 하는 것으로 족했고 무나는 틈틈이 나의 발음을 교정해주었다. 원, 투, 쓰리! 나의 발음이다. 무나는 뜨리 NO! 쓰리 NO! 트리 트리라고 연발하며 돌대가리라고 놀린다. 밀런이 정신없이 웃는다. 웃다가 왜 그런 것을 가르쳤느냐고 만면에 웃음을 담고 내게 질책을 한다. 그래서 그 과정을 설명해주었더니 밀런도 이해하며 한없이 웃는다. 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따라 웃는다. 그밖에도 수많은 발음 교정 사례들이 있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운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날 6월 12일 오늘은 밀런이 아침부터 바쁘다. 전화를 받고 일찍 밖에 나가서 소식이 없다.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 지난 여정을 기억을 더듬어가며 정리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했다. 어스미는 나의 어린 친구다. 그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 러지따와 함께 살고 있다. 레비카네 재봉집 앞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집 또한 밀런의 집을 오가는 길목에 있다. 나는 오늘은 특별히 바쁜 일이 없어서 마실을 가듯 어스미네 가게에 갔다. 내가 골목에 나타나면 동네 아이들이 줄지어 모여든다. 참 기쁜 일이다.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는 내게 아이들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리라. 러지따와 레비카 그리고 어스미와 너마스떼!로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긴 머리에 밝은 미소를 띠며 흰두 의식에 맞춰 대형 원통형의 통을 돌리고 있는 럭스미, 그 뒤는 필자.     ©김형효

나는 럭스미에게 서영순과 함께 헤므라저의 가게가 있는 강변과 네팔의 여성시인 빠리잣 동상이 있는 곳에 가기를 청했다. 모두 동의하여 함께 길을 갔다. 러지따도 함께 했다. 우리는 여전히 네팔의 이방인으로 동네 사람들의 동경에 찬 눈빛을 받는다. 헤므라저의 일터로 가는 길에 흰두 사원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들러 잠시 관람을 하며 사진 촬영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둔치를 따라 빠리잣의 동사이 위치한 학교에 도착했다. 그러나 동상이 위치한 곳은 후문이었고, 문이 잠겨 있어 되돌아가는 길에 들리기로 했다. 럭스미와 나는 네팔의 문화와 네팔의 앞날에 대해 서투른 영어를 징검다리 삼아, 한국어와 네팔어를 동시에 담은 책을 펼쳐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몸짓 연기는 필수항목이다. 서영순은 사원에 있는 수많은 조형들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고정하였다. 간간히 사진촬영을 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빠리잣이 다녔다는 초등학교를 찾았다.

▲강 건너 가난한 마을을 응시하고 있는 네팔의 여성 시인 빠리잣의 동상.     ©김형효

빠리잣의 동상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응시하듯 강 건너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인의 동상은 시인이 명상과 탄식을 교차하며 머물고 있는 석고상 같이 보였다. 나는 동상 주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촬영했고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였다. 알아볼 수 없는 네팔어를 럭스미에게 메모해달라고 말했다. 그의 연혁과 대표작을 알고 싶어서다. 꼭 한번 그의 작품을 읽어보리라. 기필코 네팔어를 배워서 스스로 읽어 보리라 다짐하였다. 평소 생각이기도 하고 다른 나라 시인의 작품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만큼 폭넓게 사유의 공간을 확장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무모한 다짐일 수도 있지만 시인으로서 평소에 생각해왔던 일이다.

▲동상 주변에서 놀고 있던 빠리잣의 초등학교 후배들, 그들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며 놀다가 즐겁게 포즈를 취했다. 태권도 자세를 취하는 걸 보면 내가 한국인인 줄 아는 모양이다.     © 김형효

돌아오던 길에 럭스미의 학교친구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 들렸다.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에게 잠시 럭스미의 남자친구냐고 물었더니 럭스미는 정색을 하며 그냥 친구라고 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only friend!”라고 애교섞인 강조를 한다.몇 마디 농담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길을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소스띠가와 루빠동굴이 와 있었다. 밀린 숙제장을 펼치듯 지난 여정을 정리하고 있는 내 등 뒤로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소스띠가였다.

▲웃는 아이들, 왼쪽이 소스띠가 가운데는 12살 소녀 러지따, 오른쪽은 그의 동생 어스미.     © 김형효

나는 소스띠가 송을 불러주었다. 리듬을 가미해서 계속 소스띠가를 불러대는 것이다. 소스띠가는 깡충깡충 뛰면서 내 주변을 맬돌다. 소스띠가 아우!라고 말했더니 내게로 와 안긴다. 아우란 말은 이리와!라는 네팔어이다. 잠시 후 그의 아버지인 뻐원 동굴이 들렸다. 그는 서영순 이쁘다를 연발했다. Preety의 한국어가 예쁘다라고 일렀더니 그는 계속 서영순을 볼 때마다 서영순 이쁘다 이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아내 루빠동굴 이쁘다라고 하라고 일렀다. 그랬더니 그는 말 잘 듣는 착한 소년처럼 루빠동굴 이쁘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좋은 말에 사람들은 좋아진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좋은 말을 먼저 배운 것을 참 다행으로 생각한다. 람부로(좋다)! 람부럿처(아름답다)! 데리데리 람부럿처(매우매우 아름답다)! 


저녁시간이다. 오늘이 영국신사 제이미가 함께 여행을 하기를 청한 날이다. 우리는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도 우리는 수사관의 눈길을 하고 제이미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소중한 기억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길가를 샅샅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으니 수사관의 눈빛과 무엇이 다를까? 물론 우리의 눈길이 공격적인 눈빛은 아니리라. 언즈동굴은 집 앞에서 밀런이 부르자. 2층 집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너마스떼!라고 인사를 건넸다. 우리도 밖에 선 채 너마스떼!라고 화답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미는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을 것을 청한 후 음료수를 권했다. 간단하게 음료를 마시는 동안 제이미는 나갈 준비를 하였고 우리는 언즈동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이미는 언즈동굴은 함께 가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 갈 것을 권했고 밀런은 더 적극적으로 권했다.

 

언즈동굴은 오랜만에 만난 사돈총각인 밀런의 권유에 응하였다. 그렇게해서 우리는 다섯이 함께 길을 재촉했다. 제이미의 큰 키는 함께 걷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사실 그의 제안을 받았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교통편을 이용해서 어느 곳을 가는지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이미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 길이다. 제이미는 먼저 택시를 잡겠다며 190㎝인 장신의 키로 성큼성큼 걸어 영국대사관 모퉁이의 큰 길에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차가 없자 그는 고개를 갸웃이며 익살스런 포즈를 취하더니, 곧 영국대사관 정문까지가서 택시를 잡았다. 한국의 티코 정도 크기에 15년은 운행된 것으로 보이는 덜컹거리는 차에 다섯명이 함께 탔다.

▲하얏트 호텔의 규모에 놀라며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한 왼쪽에서부터 밀런, 서영순, 언즈동굴, 그리고 큰 키가 돋보이는 제이미.     © 김형효

제이미는 맨 앞자리에 타고 우리는 뒷자리에 앉았다. 밀런은 사돈누나인 언즈동굴의 무릎에 앉아타고 갔다. 한국의 문화로는 상상하기 곤란한 풍경이다. 30분 정도 택시를 타고 가는 풍경은 참으로 고대 폐허의 땅을 찾은 현대의 이방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간간히 검문을 하는 군인들이 집총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총알이 날아들 태세다. 하지만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우리는 험난한 도심을 빠져나와 별천지의 세상을 만났다. 카투만드 머우다 거리 초입에 위치한 하얏트 호텔이다. 입구에서 검문을 하던 경비원은 제이미의 얼굴을 보더니 바로 길을 비켜섰다. 입구에서 하얏트 호텔로비까지 펼쳐진 풍경은 또다른 나라에 온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치 고대의 땅에서 포스트모던한 초현대를 찾아온 듯한 그런 느낌을 주었다. 마술을 부리는 땅, 카투만두였다. 로비에 들어서면서도 제이미의 걸음은 한결같다. 흡사 기린과 토끼가 함께 걷는 그런 분위기였다.

▲놀라운 규모의 멋진 야외수영장 한 켠에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물길이 흔들리듯 네팔이란 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형효

놀라움에 로비 안에서 기념촬영을 시작했다. 그저 한바퀴 로비를 돌고 또다른 충격을 받는다. 내가 바라본 네팔이라는 나라에서 네팔의 특권층이 아니면 엄두를 못낼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로비 바깥에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는 일가가 있었다. 제이미는 그 수영장 곁에 있는 야외 카페에서 차를 한 잔 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앞의 광경에 부담감과 중압감을 느끼며 사양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얏트 호텔을 둘러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일행 중에서 제이미와 보조를 맞추며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제이미는 놀라움을 표했다. 나는 얼떨결에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I Iike running이라고 말했다. 제이미는 달리기는 싫다고 능청스런 표정을 지으며 I Iike walking이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달리기도 좋아하고 걷는 것도 좋아하는 데 경망스러워 보일까봐 걷는 것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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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8/30 [22:2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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