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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적 교회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예언자적 교회로
 
정연복   기사입력  2008/07/19 [13:48]
1.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계의 정의를 구현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심지어 지상의 비참한 사람들로 하여금 후세에 풍성한 보상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갖고서 자기네 참상을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함으로써 불의를 조장했다는 공격까지 받고 있다.

성서는 인간 생활에서 무엇이 정의이며 불의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성서를 번역하는 이들의 사명은 성서 기자들의 삶을 이루었던 정의관을 이 시대에 생생하게 옮겨 놓는 것이다. 성서 해석은 반드시 해석자의 사회적 배경에 좌우되게 마련이다. 마틴 루터는 의로우신 하느님과 죄 많은 피조물의 관계라는 중세 말기의 문제와 씨름한 끝에 정의의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풀이했다. 우리 시대의 과업은 그 역이 되어야 하리라고, 즉 하느님의 사랑을 정의의 실천으로 풀이해야 한다고 본다.
(존 호기 편, 성염 역,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 분도출판사)

2. 사실 성서에서 하느님은 정의로 이해되며 죄는 다름 아닌 불의다. 본질적으로 유대 민족이 인류 전체에 준 선물은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정의를 촉구한 것이다. 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은 정의를 외면하는 종교를 끊임없이 비판한다. 우리는 성서를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굴레에서 해방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정의의 책으로 읽는다.
(도로테 죌레)

3.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없으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곡해할 수밖에 없다. 정의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로지 정신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하려든다. 이런 짓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신하는 것이다.
(카라비아스)

4. 복음 메시지의 살아 있는 표징이기 위해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인간을 억압하는 일에 지금까지 기여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사회적 변화를 촉진시키기보다는 기존질서를 유지하는 데 더욱 기여해 왔다. 도에 지나친 불의를 완화시키고자 노력할 때에도, 교회는 그 질서가 안고 있는 죄의 성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교회는 예언자적 신앙 안에서 개인의 회심과 기존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자신의 활동을 개인의 회심에만 한정하고 회심한 개인이 늘어나면서 결국에 가서는 구조적 변화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는 사회구조가 인간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며 조건짓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는 억눌린 자들의 해방이 집권자들의 참회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교회가 예언자들과 예수가 걸었던 역사적 발자취를 좇는다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서 권력을 쥔 자들과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엘라꾸리아)

5. 훌륭한 정치가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정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회 정의는 하나의 정치 현실이다. 사회의 질적 변화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보수적인 시민에 머무는 게 아니라 복음에 불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압제받는 사람들의 외침에 귀머거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보프,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

6. 미란다에 따르면, 마태 25:31-46은 신약에서 최후의 심판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으로는 유일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성서의 그 ‘상세한 묘사’에는 전통적인 최후 심판의 시나리오와 유사한 게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필요에 응한 ‘양들’(의인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말씀을 듣는다. 하지만 ‘염소들’은 천국에 들지 못할 것이다. 왜? 인간의 필요에 응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사람의 아들 앞에서 양편으로 갈라지게 된 사람들은 ‘사적인 삶을 조사받고 있는 개인들’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다. 예수의 비전은 개인적 책임성이 아니라 집단적 책임성에관한 것이다.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여러 ‘민족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나라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주고 있는가? 우리의 형제 자매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가? 우리 나라는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는가? 우리 나라는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있는가? 우리 나라는 병든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가? 우리 나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가고 있는가?

확실히 어떤 민족도 실제로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몇몇 민족들은 그러한 기준에 좀더 근접해 있다. 모든 민족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게 우리 나라의 의무는 아니지만, 모든 민족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모든 나라들의 의무다.
(로버트 브라운, 김정수 역, 『뜻밖의 소식』, 한국기독교연구소)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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