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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와 함께 죽어 다시 살아난 민중
[정연복의 민중신학] 한국교회, 십자가 처형을 기억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정연복   기사입력  2008/07/11 [16:48]
한국교회가 이원론적 신앙과 잘못된 축복관에 사로잡혀 있고, 교인들 스스로 목사의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지내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은 결국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되었다. 그 핵심은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에 대한 기억이 교회와 신학에서 사라지거나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억,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존재가 아닌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예수, 십자가의 예수는 사라지고 하늘의 초월적 그리스도, 부활의 주님만을 숭배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모든 왜곡은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고, 성령체험이 강렬하고, 교회가 성장하더라도 그 안에 구체적 인간 예수의 모습이 없다면 모두 가짜에 불과하다. (길희성 교수·새길교회 평신도 설교자)

기독론은 예수의 신비를 파악하려는 시도다. 십자가에 처형된 갈릴리 출신의 예수의 그 무엇이 그리 특별한가?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그의 두 “본성”이 아니라 그의 “행함”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 기독론에서 벗어나 행동과 실천을 지향하는 기독론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도그마(교리)에서 벗어나 이야기로 기독론을 풀어 가야 한다. (도로테 죌레). 
 
예수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난 그 자체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숨결로 말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운명지어진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성서를 해석하는 우리는 예수가 걸었던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의 사회적 처지가 그와 유사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지위는 그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언어는 복잡하기 그지없으나 예수의 언어는 단순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무엇보다도 서글픈 것은, 바로 그 차이점을 우리가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호세 까르데나스 빠야레스)
 
한마디로 복음서는 “그리스도론”의 전개에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예수 민중운동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와 민중은 주객 관계가 아니라 함께 사건을 일으키는 “우리”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은 예수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사건이다. 그 사건에 가담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모른다. 십자가의 사건을 핵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정치적 성격과 그 민중사건성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또 이른바 부활경험은 예수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사건이다.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의 부활 기록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탄생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교회는 오순절 날 120명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데서 시작되지요. 언제 뒷덜미를 잡힐지 몰라 숯불에 올라앉은 새처럼 오들오들 떨던 제자들,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숨죽이고 숨어 있던 것들, 그 가운데는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던 겁쟁이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몇몇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뿔뿔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쳤던 하나같이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 겁쟁이들이 하루 아침 잠갔던 문을 박차고 나와서 “예수는 죽지 않았다”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예수의 부활과 성령강림이라고 하지요. 이 둘은 둘이 아니요 하나입니다. 그들 몸 밖에서 일어났던 예수의 부활이 그들 속에서 그들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사신 예수의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이란 바로 예수의 뜨거운 마음인 거죠. 그래서 교회를 “다시 사신 예수의 몸”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죽었던 제자들, 죽었던 갈릴리 어중이떠중이 민중이 예수의 뜨거운 마음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데서 교회가 탄생했다는 말입니다. 교회란 예수의 부활이 민중의 부활이 되는 데서 시작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란 예수의 뜨거운 마음, 뜨거운 가슴, 뜨거운 정의감, 뜨거운 사랑으로 다시 살아난 민중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란 예수와 함께 죽어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 민중이라는 말이죠. 민중과 함께 죽어 민중과 함께 다시 산 예수의 몸인 거죠. 예수로 다시 살아난 민중이요, 민중으로 다시 살아난 예수인 겁니다. 별 볼일 없는 갈릴리의 어중이떠중이, 힘없는 사회의 밑바닥 천덕꾸러기들이 대로마 제국 속으로 누룩처럼 무섭게 퍼져들어갈 수 있는 데는 바로 그런 비밀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익환,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민사, 68-69쪽.)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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