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예수의 '인간성'으로
 
정연복   기사입력  2008/07/19 [13:59]
1. 전통적 기독론의 형성에서는 예수의 역사적 삶을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다. 이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어떻게 이론적(관념적)으로 이해할지에 관심을 가졌던 개인주의적이고 지적인 엘리트들의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독론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독론은 살과 피를 지닌 인간 예수의 역사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신비에 싸인 예수의 삶에서 그 베일을 벗기고 그 진면목을 드러내야 한다. (엘라꾸리아).

2.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편의에 따라 예수님에게 적어도 다섯 가지 옷을 입혀 왔다.

첫째, 근본주의의 옷을 입혀 왔다. 우리는 예수를 빙자하여 우리 안의 이견자(異見者)들을 이단(異端)으로, 불순분자로 정죄하여 왔다. 예수를 독선주의자의 전형으로 높이 받들어, 그를 자(尺)로 사용하여 창의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자매·형제를 차별해 온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율법주의자, 위선자, 독선주의자들을 그토록 질책하셨는데도, 우리는 예수에게 근본주의자의 옷을 두텁게 입혀 놓았고, 독선주의의 아성에 단단히 가두어 버렸다. 예수님을 이 옷, 이 성에서 하루 속히 해방시켜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에게 신비주의의 옷을 입혀 왔다. '저 세상'을 실제로 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으로 그토록 사모해 왔기에 '이 세상'을 그토록 증오해 온 우리들은 예수님을 신비주의자의 모범으로, 세속 혐오주의자의 전형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사 세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저 세상 구름 너머로 쫓아내고 말았다. 성육신(成肉身)의 예수가 탈육신(脫肉身)의 예수로 둔갑하여 구름 너머 있는 신비주의의 아성에 갇혀 있게 된 것이다. 하루빨리 이 성에서 예수님을 탈출시켜, 낮고 천한 무리들과 즐겁고 자유롭게 열린 잔치를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너무나 오랫동안 종교적 이기주의 옷을 입혀 왔다. 나 하나 예수 잘 믿고(따르기가 아니라) 천당 가려는 그 영악한 종교적 탐욕은 이기적 예수를 치받들고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현세에서도 축복 받고 저 세상에서도 극락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분으로 예수를 활용하고 있다. 이 옷을 하루 빨리 벗겨 드려야 한다.

넷째, 우리는 예수에게 강자(强者)의 옷을 입혀 왔다. 강자와 승자를 숭배하고, 부자와 권세 가진 자를 축복하는 전형으로 예수를 모셔왔다. 쿠데타로 집권한 강자들을 위해 재빠르게 조찬기도회를 베풀어 주는 교회 지도자들이 특히 강자 예수를 사모한다. 항상 승리하는 예수는 무슨 방법을 활용하든지 간에 세속 권세를 틀어쥐고 있는 자들을 축복하는 예수로 둔갑한다. 이 옷을 입고 괴로워하시는 약자의 참 친구 예수로부터 그 옷을 벗겨 드려야 한다.

다섯째, 서양 문화의 옷을 입혀 왔다. 예수라면 으레 우리는 하얀 피부의 백인종, 날카로운 콧대를 지니고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 예수를 생각한다. 이런 예수가 머리 되는 교회가 바로 서구 교회다. 서양의 봉건주의 구조, 그 후의 자본주의 구조와 침략적 제국주의 구조, 특히 타종교를 박멸시키려 했던 십자군 구조의 한 중심에는 언제나 그 구조의 총 우두머리로 백인 예수를 떠받들고 있다. 이 서양 옷으로부터 하루 빨리 예수님을 해방시켜야 한다.
(한완상, '괴로운 옷을 입고 계신 예수', 전 교육부총리)

3. 원시교회가 하느님을 발견한 것은 한 인간 존재 안에서였다. 인간 나사렛 예수는 ‘오직 하느님만이 그토록 인간적일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심오한 모습을 자신의 인성 가운데 계시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격의 참된 뿌리와 참된 인간성에 대해 익히게 된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우리 신앙의 기초는 심오하게 인간적인 그분의 모습, 이 세계 내에서의 그분의 철저한 인간적 행동 방식에 자리잡고 있다.
(레오나르도 보프, 황종렬 역,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분도출판사)

4. 우리가 ‘인간적’(human)이라고 부르고 또한 ‘신적’(divine)이라고 부르는 자질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 통하는 것인가? 인간성과 신성은 서로 통한다. 하느님은 내가 접근하고자 하는 한 존재, 즉 바깥에 계시며 초자연적이며 유신론적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내 인생의 심층적 차원에서 발견되는 현존(presence)이며, 생명의 잠재력, 사랑의 능력, 존재의 용기 속에서 발견되는 현존이다. 하느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계시한 것은 바로 예수의 존재,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이었다. 예수는 나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하신 생명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내게 하느님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주장한다.
(존 쉘비 스퐁, 김준우 역,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

5. 신앙은 인간을 인간화하고 인간으로서 완성시키고 인간의 고유한 사명을 깨닫도록 한다. 신앙과 인간의 성장 사이에는 아무런 분열이 없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생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삶과 희망과 행동이다. 신앙은 인간 정신의 혁명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단지 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을 변화시킨다. (도로테 죌레)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07/19 [13:59]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