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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의 교회에서 평신도(만인사제직)의 교회로
 
정연복   기사입력  2008/07/19 [13:51]
1. 사제의 카리스마는 근본적으로 ‘직책의 카리스마’이다. 또한 종교적 제도나 전통으로부터 떨어져서 말하는 예언자와 달리, 사제 계층의 일원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제의 역할은 대체로 전통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기울어 있다. 천주교의 역사가 웅변하듯이, 천주교는 변화와 개혁을 선호하지 않는다.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2. 교계 제도에 의해 통제되고, 그 하위자들은 규범을 지키고 관행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대한 조직을 교회라고 한다면, 이것은 현재의 교회를 잘못 본 것인가? 거의 그렇지 않다. (이브 꽁가르).

3. 마가복음의 본문에는 베드로의 고백만 있을 뿐 그리스도의 약속(“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주목하자(마가 8:27-30).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설명하는 것은 원인론적 설명에 해당한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던 탓으로 공동체에서 이 이름을 얻었다. 마태 공동체에서 베드로에게 맡겨진 권한은 교리적 권한을 뜻한다. 마태 16:18-19은 부활 이후의 공동체의 작품 또는 공동체의 성찰이다.
(레오나르도 보프)

4. 일반신자, 수도자, 신부, 주교 모두가 공동 책임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을 수 없고 모두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라는 집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주교, 신부, 일반신자, 수도자를 막론하고 우리 각자는 집을 이루고 있는 벽돌 한 장일 따름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엮음, 『하느님 나라의 일꾼』, 일과놀이, 58쪽.)

5. 나는 어느 누구도 위에서 아래로 요술 지팡이를 휘두를 수 없는 그런 교회를 원할 것이다. 세계는 권위주의적이고 교권적인 공적 생활형태로부터 변해가고 있지만 교회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언어조차도 로마 제국주의 시대 이래로 변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를 지시해 주는 대신, 출산 억제나 인공유산 같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최대한의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존 도미닉 크로산, 한인철 역, 『예수는 누구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229-230쪽.)

6. 예수는 뚜쟁이가 불필요한 하느님 관계를 가르쳤다. 성직자 혹은 교회, 교단 등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체의 권위, 곧 하느님 나라 뚜쟁이들을 거부했다. 그러나 신약은 이를 무시하고 당시 교회에서 교권을 잡고 있던 자들의 권위를 보호하려고 애쓴다. 부활하신 예수가 누구누구에게 나타났다는 보도가 바로 그렇다.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 그 종교의 내용은 정말로 나사렛 예수에게서 시작된 것인가? 혹은 그 후대의 교회 지도자들의 ”투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인가? 예수 이후의 교회들처럼 우리도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 행동, 거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중적 신조주의는 예수의 기적적인 출생, 공인된 기적들, 피의 제물로 이해되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몸의 부활, 그리고 우주적 재판을 위한 예수의 재림 등을 주장했다. 이런 교리들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역사적 예수로부터 유래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을 예수가 정당하다고 인정할 것인가?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의 대중적 형태는 자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예수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사실상 예수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교리주의는 예수의 죽음만을 예외로 하고 전혀 예수의 말씀들과 행적들과는 무관한 신화들로 예수를 대체시킨 종교, 예수를 폐기 처분한 종교다.

나는 나의 신앙이 중고품 신앙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신앙의 기원을 베드로나 바울 등의 처음 신자들에게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진정하고 근본적인 신앙은 어떤 식으로든 나사렛 예수에게까지 직접 연관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가 본 것, 혹은 그가 들은 것, 혹은 그가 느낀 것, 즉 너무 매혹적이고 그토록 그처럼 도전적이어서 예수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그것을 발견하고 싶다.
(로버트 펑크, 김준우 역,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7. 주님과의 만남은 내게 있어 하늘과 땅이 만나는 날카로운 첫 키스였습니다. 주님과의 첫 키스는 한용운의 시처럼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으며 전 세계가 뒤바꿔져버리는 대변혁이었습니다... 오늘 신앙의 위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우리를 대신해 미리 대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봉사와 희생으로 스스로 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나 사찰만 살찌우고 신도의 마음은 위선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이제 종교는 초기의 가난한 종교, 말씀을 직접 구하는 종교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믿어 복받을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돌아가 항상 우리 삶에, 진리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소설가 최인호).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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