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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의 종교적 현상에 대한 신학적 고찰(2)
핵제국주의 종교는 '이단'이다
 
정연복   기사입력  2008/04/29 [02:52]
3. 거룩한 영역들, 의식(儀式)들, 그리고 핵 제의(祭儀)들
 
핵무기주의의 종교적 기능을 분명히 말하려는 얼마 되지 않는 학문적 시도들 중 하나는 종교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인 아이라 체르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비교종교학 시리즈의 하나로 출판된 그의 책 『이상한 신』(Dr. Strangegod)에서는 내가 여기에서 내세우는 주장과 많이 흡사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어떤 형태의 행동이 주로 반복을 위해, 즉 삶에 있어 고정된 규칙성에 대한 감각과 불변하는 형태   를 제공하기 위해 되풀이될 때, 그리고 그 행동이 무제한적 힘을 갖고 되풀이하여 발생하는 관계를 제공할 때, 그것은 종교제의로 불릴 수 있다.... 행동 속에서, 그리고 핵전쟁을 준비하고 우리의 핵 비축 시설들을 건설함에 있어, 우리는 신성한 행동이나 제의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 그리고 특히 바빌론과의 유사성의 관점에서, 그런 무기경쟁 자체가 엄청난 의식(儀式)화된 전투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앞선 시대들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들의 비이성적 축적이나 핵무기 숫자의 우위 확보,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보다 새롭고 발전된 무기 체계들의 영구적 개발과 배치는 핵의 무질서에 대한 상징적 승리를 의미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한 배치들 자체가 분명한 의식(儀式)을 위한 더없이 좋은 기회다. 정부 고관들과 신문기자들이 이 의식에 참석한다. 기도를 드리고, 미국의 과학기술의 드높은 영광을 변함없이 읊조린다. 아마도 크루즈 미사일이 이런 기회에 전략 공군 사령부 기지에 오거나 새로운 폭격기, 즉 B-1이나 (레이더나 적외선 가시광선에 의한 탐지를 막는) 스텔스璣가 사람들 앞에 첫선을 보이려고 육중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과학기술을 마음껏 뽐내는 이런 의식들은 거짓 창조라는 보다 거대한 핵 드라마의 삽화들이거나 리허설이다.
 
나는 핵미사일을 탑재한 두 번째 원자력 잠수함인 트라이던트(Trident)가 소위 멋진 이름을 부여받는 의식에 참석하려고 미국을 가로질러 이동하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 잠수함은 내 고향인 미시간州의 이름을 따서 미시간(The Michigan)으로 명명되었다. (그 배에 이름을 붙여 처음으로 물에 띄우는 공식적인 의식인 명명식은, 잠수함의 소유권이 그 잠수함을 만든 사람으로부터 펜타곤 당국으로 이전되는 군사 의식과 다르다.)
 
해상에서, 나는 하나의 대항제의를 드리는 데 참가한 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다. 노동자들과 마을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행사장 분위기는 엄숙하게 축제적이다. 길이가 축구장 두 배나 되고 높이는 4층이나 되는 트라이던트 자체는 몹시 거대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두렵고 매혹적인 것이다. 제각기 목표물을 정할 수 있는 다탄두 미사일을 24개나 적재한 트라이던트는 세계의 모든 무기들 중에 가장 치명적이고 강력한 단일 무기 체계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숭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의식들은 이런 충동에 형태와 중요성을 부여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그런 종교적 충동을 처음으로 직접 느꼈던 또 다른 경우를 나는 몇 년 전에 겪었다. 그때 나는 한 군사적 에어 쇼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사실 그것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것을 재현하려고 미 공군에서 계획한 에어 쇼였다.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무려 십만 명이나 비행장 안으로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그날 하루 동안은 사람들이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모인 인파들 앞에 흥미와 감탄을 자아내는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가 가지런히 정렬되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던 전투기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핵 공격이 가능한 것들이었다. 매우 뚜렷한 경외심이 지배적이었다. 수많은 우상들이 숭배를 받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와 집결해 있는 듯했다.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서 미국에서, 그리고 보다 넓게는 제 1세계의 문화들 속에서 거룩함의 구체적 영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은 그 주변에 현대의 제의적(sacral) 세계가 세워지는 확실한 기둥들 가운데 하나라고 쟉크 엘룰은 주장한다. 그것은 그 나름의 신비한 매력과 속박, 그리고 구원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깊고 냉혹한 하나의 신앙적 주제다. 그렇다 치더라도, 군사 기술과 특히 핵무기들에 있어, 그러한 기술-종교적 충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괴력, 그리고 명백한 운명의 신화들, 즉 제국주의적 민족국가의 무한한 힘과의 합병으로 인해 증가된다. 이것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집중이다.
 
이 에어 쇼가 미국 건국 2백 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겸해 당시의 현역 고위 정치 관료들에 의해 눈에 띄게 과장 선전되고 조작되고 성대히 치러졌던 것처럼, 시민종교의 모든 요소들 역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나는 당시 미시간州 남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여러 비폭력 단체들의 연합체인 <그레이트 레이크스 생명 단체>(Great Lakes Life Community) 회원들과 에어 쇼에 갔었다.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했던 것과 같은 형태의 B-29기였다. 우리 그룹 중 일부는 그날 금식했고, 또 이 비행기 앞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그것이 저공 의례(儀禮) 비행에 사용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하지만 그날 더 늦은 시각, 우리 그룹 중 다른 사람들이 그 비행기를 보호하려고 둘러친 밧줄 바리게이트를 넘어 비행기 동체의 양쪽에 스프레이로 죽음(DEATH)이라고 썼다. 여기에서 핵심은 군중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난폭해졌다. 그들은 그 비행기를 보호하고 변호하려고 우리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우리는 질질 끌려갔고, 폭행을 당했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우리를 체포하러 온 헌병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흠뻑 두들겨 맞았을 게 틀림없다. 군중들이 보인 이런 반응의 의미를 모두 헤아릴 수는 없어도, 나는 그들의 이렇듯 격한 분노를 그러한 무기들이 자극하는 일정 정도의 종교적인 포위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쟉크 엘룰은 말한다:
 
"절대 가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을 신성시하는 확실한 표징들 중 하나다. 감히 손댈 수 없는 것, 혹은 다시 말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신성함의 경계를 규정한다.... 비판은 용납될 수 없다. 사람의 본질 바로 그것이 공격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빨의 신경조직이 노출되었다. 반응은 절대로 필요하다. 그들이 그들에게 신성한 것에 대한 아무런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도, 그들이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은 그때에 완전히 벌거벗겨져 있는 것이다."
 
시편 115편의 이미지들로부터 그 제목을 이끌어온 금속의 신들(Gods of Metals)이라는 영화는 그 종교적 충동을 가시적이고 분명히 해준다. 그것은 시험 비행에서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B-1 폭격기의 관점에서 연속으로 찍은 장면들로 시작된다. 속도감과 전능성은 유혹적이고, 전염성이 있으며, 굉장한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장면은 갑작스럽게 워싱턴에 위치한 스미스소니언 공군 및 우주 박물관(Smithsonian Air and Space Museum)으로 바뀐다. 그것은 우리를 한 여행으로 이끈다. 순례자들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두 눈을 들어올려 거대하게 솟은 미사일들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이 동일한 숭배, 눈에 돋보이는 장치들과 무기들에 대한 이 애교 있는 추파를 보는 데는 거의 상상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 박물관은 하나의 성역(聖域)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여기에 다시금 온갖 종류의 신들이 집결되어 있다. 히로시마 폭격기인 "리틀 보이"(Little Boy) 모델, (수중 발사 핵미사일인) 포세이돈과 MX, 실물 크기의 크루즈 미사일 모형들이 바로 그 신들이다. 바로 곁의 TV 모니터에서는 그들의 성공적인 시험 비행을 연속 장면으로 보여주는 비디오가 돌아간다. 예배자들은 꼼짝 않고 서서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종교적 핵무기주의의 의식들 속에는 성능 시험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태평양 서부의 산호초의 섬들로 이루어진] 마셜 제도에서의 수소폭탄 시험, 즉 바다로부터 떠올라 전함들을 그야말로 물기둥 모양으로 들어올리는 엄청난 파괴력의 그 조심스런 입증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세계의 눈들이 그것을 지켜볼 것이 요청되었다. 혹은 [미국 서부] 네바다 사막에서의 지상 실험에서 군인들이 선글라스를 쓴 채로 앞좌석에 정렬해 있는 휴대용 의자에 앉아 있는,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진들도 있다.
 
이런 간략한 실례만 갖고는 아직 불충분하다. 1950년대의 민방위 훈련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그 어떠한 핵 제의들의 실례들도 결코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 훈련은 학교에 다니는 모든 연령층의 어린아이들의 마음속에 핵폭탄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아로새겼다. 리프턴은 그러한 "도피와 은폐"(duck and cover) 훈련의 광범위하게 파고드는 영향력에 관한 한 연구 결과들을 보고하는데, 그는 "그 결과들은 우리 모두와 연관된다. 공습 훈련은 핵 시대의 한 은유이다"라고 결론짓는다.
 
공습 훈련에 대비한 격려 연설, 낮은 소리로 단조롭게 한바탕의 경고음을 반복해 내던 벨 소리들, 혹은 눈에 띄지 않는 학교 지하실 깊은 곳으로 향하던 그 음침한 일렬 종대의 발걸음들, 그곳에서 악몽에 가위눌린 채로 끝없이 펼쳤던 상상력 따위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후에, 나는 보이스카우트 단원으로서 선행 배지를 타기 위해 전시 대비 훈련 분야에서 일했다. 여러분 자신의 가정에 가족용 '방사성 낙진 지하 대피소'를 구축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내 일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뉴욕市에서는 민방위법에 따른 의무적인 대피 훈련들이 해마다 벌어졌다.
 
이런 모든 실례들은 핵무기주의의 제의적 측면을 시사한다. 그것들이 시간이나 형태에서 다양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핵무기주의의 근본적인 종교적 성격의 증거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핵 제의들의 기능적인 효과는 점증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적극적인 민방위 훈련들이 중지되었거나 히로시마의 총체적 재현이 더 이상은 정치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들의 제의적 기능과 영향력이 누그러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약 40년에 걸쳐 비록 그 형태들은 변화되었지만, 미국인들의 정신을 두려움과 경외심 가운데 사로잡고 있는 핵 제의들의 지배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체르누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몇몇 특정한 상징적 이미지들이 우리들의 의식(意識)의 최전선에 떠오를 때, 다른 이미지들은 물러난  다. 그러나 종교적 상징들의 진정한 고향인 정신 깊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생각들과 감정들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새로운 이미지들은 낡은 이미지들을 대체하기보다 오히려 껴안는다. 어떤 것도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전략 방위 구상(지구 또는 위성에서 레이저 광선이나 입자 빔을 발사하여 비행중인 탄도 미사일을 격파하는 계획), 혹은 '별들의 전쟁'(Star Wars) 계획일 텐데, 이런 전략 계획들 속에서 핵 시대의 모든 상징적인 동기들이 하나의 포괄적인 포장으로 한데 결합되는데, 이것은 그 계획의 광범위한 인기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4. 대사제들과 비밀 제의
 
핵무기주의는 그것 자신의 "사제들"과 "신학자들"을 갖춘 채로 우리에게 다가선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펜타곤 집단에서 정확히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후자에는 저명한 이론가들, 터무니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 헤르만 칸과 헨리 키신저, 그리고 (자기 동료들에 의하여 실제로 수소폭탄의 사도로 불리는 물리학자인) 에드워드 텔러 같은 사람들이 속하는데, 그들은 표적 조준 교리들을 주장하며 또 통합적인 장기 전략들을 구상한다. 합리적인 설교의 출현을 강요하고 이런 독특하게 불합리한 무기들을 통제하기 식의 그런 추상적인 수준에서 생각하고 "말하는"(speak) 게 그들의 직무다. 이들은 변함없이 핵무기주의의 신화와 역사에 흠뻑 젖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핵무기주의의 전형적인 실례들이다.
 
"사제들"은 전문가들, 고용된 두뇌들, 기술자들, 그리고 군사적 전문 기술자(테크노크라트)들이다. 이들은 정보와 암호들 그리고 무기들 자체에 아무런 제한이 없이 접근할 수 있으며, 이로써 핵무기들 자체가 그들을 핵무기의 신성한 영역의 중재자들로 만든다.
 
"사제들"과 "신학자들" 모두는 일반 평신도의 시야 밖에서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발휘하는 게 틀림없다. 이 둘 모두 비밀스럽고 불가해한 완곡 어법의 언어를 사용한다. (조지 오웰의 용어를 따라서) "핵의 완곡어"(nukespeak)라는 언어가 오랫동안 인식되어왔다. 마취 작용을 하는 추상 개념에서 핵우산, 선제 무력 봉쇄 공격, 핵무기의 단계적 확대에 따른 우위 확보, 부수적인 피해, 취약성의 창문(window of vulnerability), 거대 죽음들, 전략적 교환 따위의 전문용어가 생겨난다. 이런 용어들 모두는 세련된 어지럽힘으로 살인적인 현실에 가면을 씌운다. 이와 유사하게, 사제적 전문가들도 현실을 신비화하고 또 평신도들이 핵무기주의의 성직자들과 전수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는 데 기여하는 암호화된 구절들, 약어들, 전문용어 따위의 뜻을 알 수 없는 언어를 발설한다.  더욱이 사제들과 신학자들 모두 비밀 정보 사용 허가증을 갖고 일한다.
 
전문 기술자들과 이론가들은 똑같이 핵무기 및 모든 핵무기 체계들을 에워싸고 있는 비밀 제의의 범위 내에서 활동한다. 그러한 비밀주의는 군사적 기능을, 그리고 그 이상으로 정치적 기능을 갖고 있지만, 근본에 있어서 그 충동은 종교적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비밀스러움과 신성함은 결합되어 왔는데, 이 결합은 중앙 집중화된 성전 국가(Temple-state)의 신비들 속에서 가장 돋보인다. 이 신비들은 두려움과 매력을 동시에 결합시키는, 루돌프 오토가 "신비스런 의식"(numinous consciousness)이라고 불렀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종교적 감정을 연상케 하는 핵무기의 비밀주의에 깃들인 두려움과 매력 이 둘에서 참으로 돋보이는 것은, 그것들이 자신들에 대한 일체의 침범이나 약탈로부터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물론 웅대한 물리학의 한 표출로서, 핵무기 계획은 시초부터 "원자의 비밀스런 권능들"(이런 식의 표현은 끊임없이 재발되었다)을 풀어헤치도록 고안되었다. 그들의 숨겨진 실험실에 처박혀진 연금술사들은 자연의 신비들을 탐구했다. "이것은 원자 자체가 하나님처럼 태초부터 이런 비밀스런 신비, 모든 지혜 가운데 이 가장 깊은 지혜를 간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직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그것에 은밀히 관여하게 되었다."
 
핵무기 계획 주변에서 한 완전한 비밀 도시, 그리고 아마 결국에는 한 완전한 국가 안전 보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자라났다. 미국 뉴멕시코州 북부의 도시인 로스앨러모스는 숨겨진 도시의 온갖 신비를 다 갖추고 있었는데,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야영했던 경험들에 비추어 그곳을 원자력 연구의 비밀스런 중심지로 선택했다. 젊은 물리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영문도 모른 채로, 그 사막에 집결하기 위해 여러 대학의 캠퍼스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선택되는 것은 현기증이 나는 영예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비밀주의의 필연성 속으로 말려들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연구 범위나 목적조차도 말해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지식의 구획화라는 레슬리 그로브 장군의 군사 관리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하지만, 그 밖의 사항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라야 한다.
 
익명이나 "트리니티"(Trinity) 따위의 암호명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친구들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들에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자신의 소재를 감추거나 혹은 공허한 일반적 내용들만 담을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 자신도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4년 동안 나는 오직 비밀로 분류된 생각들만 했다"고 적었다. 비밀주의의 부담은 도덕적으로 사람을 쇠약하게 만들며 비인간화시켰다는 정도로까지 말하는 것은 당분간 접어두자. 그 비밀주의의 정도가 대단히 놀라웠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게 북미에서 원자폭탄을 발사했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두목 행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대통령은 원폭의 성공적인 실험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소식을 스탈린, 그리고 자신과 더불어 독일인들의 패배를 경축하고 있었던 미국의 연합국들에게조차도 감췄다. 그리고 히로시마에 투하될 원자폭탄은 완전한 비밀주의 속에 운반되었고, 그래서 원폭 공격을 받고 며칠이 지나서도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덮친 게 도대체 뭔지 몰랐다.
우리의 적들, 무엇보다도 소련 혹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테러리스트들은 "비밀의 도둑들"이 되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우리의 과학적인 문화를 탐지하려는 그런 스파이들이 넘쳤다. 과연 첩보활동을 했는지 여부가 의심스러운, 전혀 과학자가 아닌 줄리우스와 에셀 로젠베르그 같은 이들마저 사형에 처해진 것은 이 신성한 위반에 기울여진 열정을 입증한다.
      
몇 년 전의 또 다른 계시적 사건에서, 하워드 모어랜드는 한 작은 원자폭탄 무기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간단한 사용 설명서를 공포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폭풍우를 야기한 상징적이며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신문이나 잡지 기사에 대한 사전 검열, 법원의 금지명령 따위의 시도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모든 정보는 공적인 신문이나 잡지들에서 이내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비밀이 그 비밀이었던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핵무기는 자신과 동시대의 "위험한 비밀"을 갖고 있는 현재의 비밀 민족국가의 씨앗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핵무기는 전시에 비밀리에 탄생했다. 하지만 핵무기를 보유한 모든 나라, 즉 이스라엘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그 후 계속해서 공적인 인식이나 논쟁 없이 핵무기 개발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비밀주의는 핵무기의 의미의 일부다.
 
암호명들, 충성 시험들, 핵무기 개발 착수나 증대에 따른 의식(儀式)들, 분류 체계들, 더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더 많은 비밀을 간직해야 하는 비밀주의에 있어서 계급 구조적 영향력들 따위의 이 모든 것은 안전 장치의 제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핵무기들은 이 비밀스런 의식의 성장을 위한 재가요 정당화였다.
 
그런 비밀은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을 초래했다. 시초부터 지금까지 핵 정책 결정들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는 교묘하게 회피된다. 그리고 기본적인 결정들은 일반 여론과는 동떨어진 채로 이뤄진다. 게다가 미국 국방부 서류 유출 사건, (1974년 닉슨 대통령 사임의 직접 원인이 된 도청 사건인) 워터게이트 사건,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암시되었듯이, 헌법을 범하고 심지어 민주적 통제를 핑계 삼아 민주주의를 짓밟는, 완전히 성숙한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가 존재한다.
 
미국인들로부터 차단되고 있는 진짜 비밀은, 핵의 신성(神性)에는 아무런 제한이 가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선제 공격에서 핵무기들을 기꺼이 사용하는 게 늘 미국의 정책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그 핵무기들을 실제로 사용해 왔다.
 
시민 불복종 행동으로 미국 국방부의 서류들을 일반인들에게 유출시켰으며 예전에 랜드(Rand)의 분석가였던 다니엘 엘스버그는, 미국이 군사적 혹은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적(소련만이 늘 미국의 적이었던 게 결코 아니다)에게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적극적으로 위협한, 장기간에 걸친 일련의 실례를 최초로 수집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거의 모든 미국인들에게 보편적인, "나가사키 이래로는 어떤 핵무기도 사용되었던 적이 없다"는 생각  은 잘못된 것이다. 소련이 우리에게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그 단일한 역할을 제외하고서는, 미국의 핵무기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용되지도 않고 또 사용될 수도 없는 상태로 쌓이기만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반복해서, 대개는 미국 국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리에, 미국의 핵무기들은 아주 다른 다양한 목적들에 사용되어 왔다. 방아쇠가 당겨졌든 당겨지지 않았든, 당신이 직접 대결하고 있는 누군가의 머리에 총을 겨눌 때 그 총이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오늘날, 최근에 기밀 리스트에서 삭제된 자료들, 그리고 갈색 포장지의 봉투에 싸여 비밀의 장막 뒤에서 가끔 흘러나오는 우편물 속에 담긴 그 밖의 문서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법령(Freedom of Information Act)을 이용하여, 미치오 카쿠와 다니엘 액셀로드는 그러한 사건들에 대한 상세한 역사와 미국 국방부의 다채로운 전쟁 계획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 그들이 자세히 이야기하는 그 역사에서 밝히 드러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핵무기들이 모든 군사 정책에서 그야말로 핵심 부분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빠른 속도로 조금씩, 우리는 핵무기의 종교적 현상학에 대한 고려로부터 그것의 실용적인 제국주의적 기능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핵무기는 한 편만 능력 있게 한 게 아니라 다른 편에도 능력을 가져다주었다. 신성함의 기운은 핵무기주의의 범죄적 음모를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고 추동했다. 우리는 핵무기주의의 범죄적 음모를 먼저 파악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에 서려 있는 신성함의 기운을 파악할 수 있다.
 
체르누스가 핵무기 철폐 운동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 운동은 핵전쟁의 글자 그대로의 공포를 상상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함으로써 우리를 무감각의 수준으로부터 인식의 수준으로 옮겨 놓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운동의 경고들은 묵살되었다....   문자적(literal)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그 운동은 상징적 의미라고 하는 세 번째 수준을 무시했다....  핵 문제는 윤리적인 고려를 넘어서고 있는 게 분명하며, 그리고 핵무장의 불합리성만을 강조해서는 반핵 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도 똑같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핵무기의 불합리한 상징적 의미들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핵무기의 힘 바로 그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핵 이단과의 대결』(Facing the Nuclear Heresy)이라는 책에서, 클라크 채프만은 교회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판을 퍼붓는다. 무기 경쟁에 반대하는 교회들의 여러 노력에서 지배적인 것은 바로 "도덕적"(moral) 쟁점들이었다. 그가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강조할 때, 그는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의 주된 예증은, 핵무기 문제들만 나오면 실질적으로 핵무기에 의한 전쟁 억제력의 도덕성에 집중하는 미국의 로마 가톨릭 주교의 목회서신이다. "그러나 핵무기의 분명한 종교적 도전은 검토되지 않는다."
 
「창조를 지키기 위해」(In Defense of Creation)라는 미국 감리교 감독들의 서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많은 점에서 훌륭한 문서인 그 서신은 핵무기에 의한 전쟁 억제를 하나의 우상 그리고 "교회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자세"라고 명명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그것은 정확한 질문들에 근접한다. 하지만 이런 적절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을 빼놓고는, 그것은 윤리학이나 심리학의 수준을 거의 넘지 못한다.
 
핵무기주의를 종교적, 진실로 명백히 고백적 쟁점으로 다루고 있는 몇 안 되는 문서들 중의 하나는 장로교회의 연구 문서인 「장로교인들과 평화 만들기: 오늘 우리는 저항에로 부름 받았는가?」이다. 이 문서를 놓고 간단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지금 이 문서는 절판되었다.
 
채프만과 체르누스가 내세우는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지금까지의 분석에서 나는 그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음을 진심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그들과 친구로서 결별한다.
 
나의 생각들은 지난 10년 어간에 걸쳐 말과 행동으로 핵무기의 종교적 숭배를 노골적으로 폭로한 신앙에 기초한 저항 공동체로 돌아선다. 나는 그들이 그 안에서 기도하고 행동하려고 몸부림치는 제의적 신조론에 관하여 생각한다. 체르누스는 이 점에 대해 전혀 모른다. 챔프만은 겨우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 서두의 감사의 글에서 옥에 갇힌 두 저항자를 인용한다.) 우리는 지금 바로 그러한 상징들, 그러한 죄수들을 향해 꾸준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변명의 여지없이 분명한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 제국주의적 핵종교의 권능과 관련하여 아직도 말해야 할 게 많다. 그것은 영적 권능이다. 핵무기주의가 영적 권능이 있는 종교가 되는 것은 핵무기주의에 본래부터 담겨 있는 우상숭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핵무기주의가 교회 내부에서 발견되거나 복음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장될 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주장했듯이 이단적인 거짓 교리임이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참으로 핵무기주의는 거짓 교리 그 이상이다.
 
 핵무기주의와 그 기구들은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또한, 그것들이 이 세상의 권세의 천신들과 권력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기 전까지는, 그것들은 아직 충분히 명명되지 못한 것이리라. 그것들에 대한 명명이 올바로 이뤄진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올바른 예배로 그것들을 꾸짖고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Bill Wylie Kellermann의 책 『신앙과 양심의 계절』(Seasons of Faith and Conscience, Orbis Books, 1991) 제3장의 후반부이다. 켈러만은 핵무기에 대한 깊이 있는 신학적 고찰을 통해 핵무기의 종교적 현상을 다루면서 핵무기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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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4/29 [02: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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