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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경제가 튼튼해야 노동자가 산다
홍성관 기자 반론에 대한 반론, 진보는 화석이 아닌 과학
 
최용식   기사입력  2003/08/26 [16:23]

우선 반갑다. 모처럼 반론다운 반론을 받아본 느낌이다.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도 갖췄다. 이런 글에 반론을 한다는 것은 내게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런 일이다. 그러면 홍성관 기자의 글에 대해 성의를 다해서 조목조목 반론해보고자 한다.

[관련기사] 홍성관, 노동자의 생존권이 '제밥그릇챙기기'인가?, 대자보(2003. 8. 25)

▲최용식 님이 21세기경제학에 기고한 주5일 근무제와 노동계의 전투적 행태에 대해     ©21세기경제학홈페이지
첫째, 홍성관 기자는 법률의 의의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현대 민주국가의 법률은 거의 모두 '네거티브 체제'(Negative System)이다. 법률이 규정하지 않은 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법률은 최소한의 것만 규정한다.

둘째, 근로기준법은 주5일 근무를 의무화하고 있지만, 주4일 근무제를 실시하겠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막거나 처벌할 수는 더욱 없다. 이것이 현대 민주국가의 법정신이다.

셋째, 노조는 근로기준법이 규정한 것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얼마든지 쟁취해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주5.5일 근무제가 실시되고 있는 지금도 현대자동차와 금융계 등은 정부의 법률개정안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으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지 않더라도 다른 노조 소속 노동자들도 노사협상을 통해 지금 당장 주5일 근무제를 즐길 수 있겠지만, 노조를 조직조차 못한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언제나 주5일 근무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다섯째, 양대 노총이 근로기준법 개정을 거부하려면, 비노조 노동자들이 주5일 근무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을 먼저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한 것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양대 노총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방적인 주장만 부르짖고 있을 뿐이다.

여섯째,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나는 양대 노총의 법률안 개정 거부투쟁을 명분이 없는 짓이라고 단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홍성관 기자가 명분을 문제삼은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일곱째, 근로기준법 개정이 어째서 "조합원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노조의 입지를 위축시키는 행태"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주5일제가 어떻게 생존권을 박탈하고 노조의 입지를 위축시키는 것일까? 내 눈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보일 뿐이다.

여덟째, "수구언론 조중동이 노조를 국가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몰아세웠던 논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나의 "인지도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이 글은 조선일보의 탑에 실려 노조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됐을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조선일보 기고를 반대하는 지식인 선언에 나도 동참했다는 사실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홍 기자도 안티조선에 관한 내 글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홉째, "정부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5일제를 가만히 내버려둘 것이지 왜 추진했느냐고 반문하는 것"과 관련하여 반론한 부문은 못 본 것으로 하겠다.

열째, "노동계가 이번 정부 개정안을 반대하는 이유는(중략) 여성·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되고 이로 말미암아 노동계의 연대를 깨뜨리기 때문이다"는 주장은 도저히 받아이기 어렵다. 이들과 양대 노총 소속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사이에는 이미 넘을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이 두 집단 사이의 임금격차만이라도 따져보기 바란다.

열한번째, "생리휴가를 유급에서 무급으로 전환"하는 등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사례를 모두 합하더라도 주5일 근무제 실시에 따른 혜택보다는 훨씬 적다는 사실을 강조해두고자 한다.

열두번째, 비노조의 노조조직은 노동자의 몫이지, 누가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패배자의 발상일 뿐이다. 양대 노총이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계는 이런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열세번째, "노무현 정권 출범 6개월만에 78명의 노동자들을 구속시켰다"는 주장도 너무 일방적이다. 노동계도 그에 못지 않게 전투적 투쟁을 벌여왔다고 해야 한다. 이런 불행한 사태는 어느 일방의 책임이라고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다만, 국민경제의 앞날을 걱정할 뿐이다.

열네번째로, 반론문 도입부분에 "오늘날에는 자본가 세력들이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들을 비인간적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진보가 얼마나 화석화된 논리에 빠져 있는가를 증명한다. 진보는 과학이다. 과학은 현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현실에 입각한 글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진보는 과학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세계화가 없이 번영을 누리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역사상으로도 없을 것이다. 또한 경제가 번영하지 않는 곳에서 노동자가 잘 사는 곳은 하나도 없다. 참고로, 과거에 내가 썼던 "세계화"에 관련한 글을 뒤에 첨부해두고자 한다.

끝으로, 진보는 약자의 편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기업주보다는 노동자의 편에 서야 하고, 12%의 강한 노동자보다는 88%의 약한 노동자의 편에 서야 하고, 노동자보다는 실업자의 편에 서야 하며, 또한 일하고 싶어도 일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 내 믿음인 것이다. 이런 약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경제가 더욱 튼튼해지고 더욱 번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참고자료] 세계화와 반세계화

▲주5일제를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국회앞 기자회견모습     ©참세상뉴스
요즘 들어 세계화에 반대해야 지성인인 것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조성되는 듯 하다. 특히 진보진영에서는 반세계화가 지성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명제인 것처럼 설정되어 있다. 세계화의 부정적인 모습만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을 뿐, 세계화가 왜 세계적인 조류가 되었는지를 꼼꼼히 따져보려는 노력은 눈에 잘 띠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반세계화의 추구는 경제의 파탄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말에 거부감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우려스런 일이 이미 벌어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세계화가 심정적으로는 이미 시대조류를 형성했고, 반세계화가 정책적으로 추구될 날도 머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런 경제정책이 실제로 추구된다면 우리 경제의 미래는 기약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이 문제를 한번 따져보자.

유럽에서는 세계대전 직후 유럽공동체(EC)가 구성되었고, 이것이 유럽연합(EU)으로 발전했으며, 이제는 통화를 통합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국경까지 사라지는 날도 조만간 올지 모른다. 왜 유럽은 이처럼 통합의 길을 걷고 있을까? 이것도 일종의 세계화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데, 반대가 드세지 않았던 이유는 또 무엇일까? 만약 반대가 대세를 이루었다면 유럽통합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일이 지금처럼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비교적 간단해서, 시장의 크기를 키우자는 것과 이를 통해 미국경제와 대항하자는 것이다. 시장의 크기를 키우면 경제성장이 쉬워지고, 미국경제에 대항할 수 있게 되면 유로화도 국제적인 기축통화의 지위를 확보할 수가 있으며, 이에 따라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좀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우선 기축통화가 되면 어떤 이득이 주어지는가를 따져보자.

지금 미국은 매년 수천억 달러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규모도 해가 갈수록 빠르게 커지고 있다. 상품수지 적자가 97년 1,947억 달러, 98년 2,449억 달러, 99년 3,433억 달러, 2000년 4,471억 달러 등을 기록했다. 96년이래 연평균 24%나 증가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외환보유고는 97년 589억 달러, 98년 707억 달러, 99년 605억 달러, 2000년 566억 달러 등을 기록하고 있어서, 연간 수입액의 10% 밑으로 떨어진지는 오래되었고 이제는 5% 미만으로 떨어졌다. 2천년에는 국제수지 적자와 비교해도 10%를 겨우 넘는 수준을 기록했다.

이런 정도라면 미국은 이미 오래 전에 아르헨티나보다 더한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경제는 2천년까지 10년째 호황을 지속했다. 왜 그랬을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미국 달러화가 국제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미국은 달러화를 발행하여 필요한 재화를 해외에서 수입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쓰는 재화를 애써 만들고 있는 나라로서는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는가? 미국은 비용이나 노력이 거의 들지 않는 돈을 찍어서, 다른 나라가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재화를 수입해가고 있으니 말이다. 기축통화라는 지위는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럼 미국은 달러화를 무제한 발행해도 될까? 그것은 아니다. 달러화의 가치를 유지할 수 없으면 국제적인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도 상실되고 만다. 그렇다면 대규모 국제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까지 계속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달러화는 왜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도 간단하게나마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국제무역이 증가하면 할수록 국제적인 통화량도 늘어나야 한다. 즉, 국제무역이 매년 늘어나는 것이 국제 기축통화의 역할을 하는 미국 달러화의 수요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에 따른 달러화의 유출이라는 공급을 소화해주고 있다. 그렇더라도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증가하는 속도는 지나치게 빠르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만으로 미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를 충분히 해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경제에는 실물분야의 흐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금융분야의 흐름도 있다. 국제자본들은 수익성이 높은 곳을 찾아서 흘러다니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미국 경제가 90년대 내내 초장기 팽창국면을 지속함에 따라, 다른 어느 나라에 못지 않게 투자의 수익성이 높은 나라에 속했다. 더욱이 군사적 초강대국이라는 이점을 안고 있어서 투자의 안정성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이점까지 안고 있다. 그래서 국제자본들이 미국 땅으로 대거 몰려들면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상에서 거론한 문제는 언뜻 보기에는 세계화라는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왜 세계화를 계속 추구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간접적으로나마 연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화를 통해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고 빠른 시일 내에 선진국으로 진입함으로써, 우리나라 원화도 세계적인 결제통화로 지위를 격상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최소한 다른 나라 돈을 수입하기 위해서 피땀을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머지 한 문제를 다뤄보자. 세계화를 통해 시장을 키우는 일이 경제적으로 왜 중요한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세계화란 시장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시장의 확대는 분업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으며, 분업은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생산량을 산출할 수 있게 해준다. 경제학의 창시자인 스미스(1723∼1790)는 2백여년 전에 '숙련자라도 혼자서는 하루에 핀을 하나 만드는 것도 쉽지 않지만, 비숙련자라도 여럿이 공정을 나누어 만들면 한 사람 당 4,800개를 만든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세계화에 따라 시장이 커지면 분업이 더 잘 이루어지고, 분업이 더 잘 이루어지면 생산성도 그만큼 커진다. 현실적으로도 세계화는 국제무역을 촉진하고, 국제무역의 확대는 세계의 총생산을 늘리는 효과를 나타나게 한다. 이런 효과는 리카도(영국의 경제학자, 1772∼1823)의 '비교 우위설'에 의해서 이미 이론적으로 충분히 증명되어 있다. 따라서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잠깐, 비교우위설에 대해서도 설명해둘 필요가 있겠다. 갑이라는 나라는 쌀과 옷을 60 단위와 30 단위를 생산하고, 을이라는 나라는 각각 30 단위와 20 단위를 생산한다고 할 때, 두 나라 사이에는 비교우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쌀을 생산함에 있어서 갑은 옷을 생산하는 양보다 2배나 더 생산할 수 있으나, 을은 1.5배만 생산할 수 있다. 반면에 옷을 생산함에 있어서는 갑이 쌀의 절반밖에 생산하지 못하지만, 을은 그 절반보다는 큰 2/3를 생산할 수 있다. 이것을 비교우위라고 부른다. 갑은 쌀을 생산하는 일을 상대적으로 더 잘 할 수 있고, 을은 옷을 생산하는 일을 상대적으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의미로서, 이 경우 분업이 이루어지면 경제 전체적으로 생산량이 커진다는 것이다.

갑과 을이 쌀과 옷을 각자 모두 생산할 때는 갑이 생산한 90 단위와 을이 생산한 50단위를 합한 140 단위를 생산할 수 있다. 그런데 갑이 옷을 포기하고 쌀만 생산할 경우에는 120 단위를 생산할 수 있고, 을은 쌀을 포기하고 옷만 생산할 때는 40 단위를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모두 합하여 160 단위를 생산할 수 있다. 국제분업이 이루어지면 전체적으로는 20 단위나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세계화가 멈추고 보호무역주의가 팽배해질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먼저, 국제분업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비교우위에 따른 생산량 증대효과가 사라지고, 세계경제의 생산량은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산량은 비교우위의 효과만큼만 줄어드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 것이 경제의 독특한 특징이다. 생산량이 줄면 소득이 줄고, 소득이 줄면, 소비량이 다시 줄어들며, 소비량이 줄어들면 생산량은 더욱 줄어야 한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이 경제이다.

1930년대에 발생한 세계대공황이 마냥 악화의 길로만 걸었던 것도 이런 원리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각국 정부는 관세를 올리는 등 보호무역의 장벽을 더 높게 쌓았고, 이에 따라 비교우위의 원리가 축소재생산의 방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경제의 악순환이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신용수렴에 따른 금융공황이 여기에 가세함으로써 경제재앙을 더욱 키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세계화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계화의 추세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할 수 있다. 경제의 악순환에 따른 축소재생산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공황의 무서움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세계화를 마냥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뉴욕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금융공황이 시작된 지 불과 두 달만에 미국의 공업생산은 10%나 감소했다. 이처럼 급속한 경기수축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 3년 동안에 공업생산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실업률은 5.3%에서 37.6%로 뛰어올랐다. 이후 경기침체 기간은 10여 년 간이나 지속되다가 세계대전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그 사이 수많은 가정이 대부금이나 임대료를 내지 못해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집을 잃은 사람들은 공터를 찾아 나무와 양철로 집을 짓고 빈민굴을 형성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와 잠자리를 얻지 못해 길거리를 떠돌아다녀야 했고, 이런 부랑자들이 도시의 뒷골목을 메웠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서 먹을 것을 찾아야 했고, 연약한 사람들은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가야 했다.

공황이 진짜 무서운 것은 그 끈질김에 있다. 뉴딜정책 등의 대대적인 경기부양정책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살아나지 못했으며,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미국의 실업률은 두 자리 숫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돌파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공황인 것이다. 실제로도 세계대전이라는 또 다른 재앙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세계화가 무조건적으로 추구해야 할 지상목표는 결코 아니다. 인류의 먼 장래를 위해서는 꼭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부작용은 나타나기 마련이며, 이것을 예방하는 데에도 충분한 관심이 기울어져야 한다.

부작용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겪기 마련인 인류문화의 다양성이 소멸되는 일이다. 사실, 진화의 전제조건은 종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종의 다양성이 진화에 결정적인 계기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이런 다양성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세계화를 마냥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부정은 자동차가 매연과 교통사고를 불러왔으므로, 자동차를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동차를 없앨 것이 아니라, 매연과 교통사고라는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국 문화의 다양성을 어떻게 유지시키면서 세계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현대 인류에게 주어진 또 다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월 31일에는 세계화와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두 개의 국제모임이 동시에 열린 바가 있다. 세계 정치촵경제 지도자들의 모임인 제32회 세계경제포럼(WEF)이 3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뉴욕에서 열렸고, 브라질에서는 제2회 세계사회포럼(WSF)이라는 비정부 사회기구들의 모임이 5만여명이나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 한 쪽에서는 지속적인 세계화를 모색하는 모임이, 다른 한 쪽에서는 세계화를 반대하는 모임이 열렸던 것인데, 세계화에 따른 이득이 있으면 부작용도 나타나가 마련이므로,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강압적이고 수탈적인 세계화는 주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군사적 우위에 기초한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려는 속성을 너무 자주 내보인다. 대외적으로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을 들을 정도의 무차별적인 시장개방 압력이 가해지는 한 편에서는, 국내적으로는 자국내 산업의 보호만을 내세워 무차별적인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는 등의 조치가 종종 취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유럽통합과는 반대로 극렬한 반대에 휩싸이는 지도 모른다. 
 
* 필자는 '21세기경제학연구소'(http://www.taeri.org/)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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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8/26 [16:2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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