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인동. 전경버스들이 흉한 벌레들처럼 움츠리고 있는 곳. 북카페 [길담서원]이 등을 켜고 있다. 어제 발견하고, 오늘 또 온다. 독립영화를 상영한다고 했다. 감독까지 온다니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하이퍼텍 나다]에서 상영하는 걸 보지 못 했었다. 게다가 날을 잘 잡은 것일까? 엉겹결에 두 편을 보게 되었다. 상영작으로 걸린 건 [어느 날 그 길에서](2006)인데 감독을 통해 들어온 작품은 [작별](2001)이다. 길담 영화지기가 급히 연락을 취하고, 서가 가운데 테이블에 예닐곱 남짓 오순도순 앉은 관객들은 [어느날]이 오기 전에 일단 [작별]을 보고 있기로 결정했다.
다큐라면 으레 '시네마 베리떼'를 상상하고야 마는 나로서는 황윤 감독의 카메라를 '읽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카메라는 '베리떼'를 쫓아 이리 저리 현란하게 흔들리지 않는다.
다만 피사체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미디엄 샷의 동선을 미세하게 관찰한다. 그렇다고 사색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작가의 나레이션이 자막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감독이 그 이상의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큐의 기본을 충실히, 정말 충실히 지킨다. 감동은 관객들의 몫이다. 그리고 그건 성공적이다. 와 앉은 몇몇이 눈시울을 적신다.
두 작품 모두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인간들이 등장하지만 관객들은 그들에게 몰입하지 않는다. [작별]의 '크레인'(새끼 호랑이)과 [어느날]의 '팔팔이'(삵)가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주인공. 하나는 동물원에 있고, 또 하나는 야생, 아니 고속도로 옆 위험한 거주지에 있다. 그리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이리 저리 배회하면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조연이다.
그러나 조연들은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더 안타까울 것이다. 동물들은 예외 없이 화면 여기 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간다. 그렇다고 이들이 죽어 가는 현장을 선정적으로 화면에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소리가 들린다. 환청처럼, 울음처럼 말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슬픔일까? 아니면 정말 저들 '동물'들의 슬픔일까?
제 버릇 못 준다고, 난 어느새 인간과 동물을 가르고, 동물들의 '고통'이 과연 '객관적 가치'를 가지는지 속으로 묻는다. 그건 인간 감정의 '투사'가 아닌가, 라고 말이다. 황윤 감독은 동물들도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우리, 인간종보다 훨씬 놀라운 삶을 살아 간다고 말한다. 난 그러한 '감정'이라는 것이 인간이 느끼는 '죄책감'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생각한다. 어쨌든 '죄책감'을 통해 동물들의 고통을 바라본다는 것은 '신비화'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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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로 인해 죽은 삵([어느날 그 길에서] 중) ©벼리 |
그렇다면 그 '고통'의 정체는 무엇일까? 문득 난 그것이 종과 종 사이에 형성되는 '동류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죄책감은 다만 결과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동물들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거부할 수 없는 생물학적 '동질성'이 존재한다는 게다. 그런 한에서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저지르는 우리의 행위는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범죄'에 해당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내내 냉철하게 바라보려고 하면 할수록 이 영화는 지성에 어깃장을 놓는다. 대신 아주 오래된 본성을 건드린다. 자연, 또는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이라는 거대한 본성 말이다. 그리고 한없이, 한없이 애달파지는 것이다. -Noma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