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다. 김기덕은 말이다. 아마 열에 반 이상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온 마음이 쑤시는 영화를 또 만들었구나, 하고. 예전부터 그렇지만 김기덕의 영상은 절대 나붓대지 않는다. 오히려 정수리를 후벼 파거나, 살가죽을 벗기거나, 결국에는 내공을 완전 소진시킨 후 주화인마에 들게 한다. 한 마디로 온 몸에, 온 삶에, 그리고 온 시간에 맹독을 퍼트리고서야 만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다. 김기덕 영상 미학의 정언 명법들. 한 번 되새겨 보자.
# 1. 우선 사랑을 조롱하라
# 2. 그리고선 언어를 교란하고,
# 3.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하여 가벼운 경의를.
이러니 김기덕 영상을 보고 불편해 하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그러길 바란다고 해야 옳다. 삶이 온통 쓰레기장이고, 인간이 고깃덩이에 불과한데다가, 소통은 홍어좆만한 가치도 없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고통의 다른 말이고, 잘 해 봐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 살갗에 조각칼이나 후벼대는 짓인 게다. 세상에, 감독이 나서서 관객과 불화를 조성하는 짓도 김기덕이 독보적이다. 김기덕의 영화들을 잘 살펴보면, 위의 미학적 정언명법들을 실현하기 위해 관객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런 전략은 잘 들어 맞으며, 나아가 기괴하게도 많은 오타쿠들을 양산한다. 사실 영상이든 문자든 예술적 의미라는 거창한 것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매끈하거나, 감성적으로 나긋나긋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1920년대 ‘다다’ 이래 현대예술의 상식이다.
그런데, 이건 영화다. 영화는 관객의 정서를 잡아 당기기도 하고, 놓기도 하면서, 적당한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의 거리감을 부여하고, 그를 통해 절정으로 몰아 가는 게 오히려 상식인데, 김기덕은 그런 영화계의 ‘앙시앙 레짐’ 정도는 혁명적으로(?) 파괴하고 시작한다. 관용이란 불필요하다, 는 거고, 정서라는 것이 어디 나긋나긋하기만 하냐는 게, 김기덕의 주장인 게다. 그건 일견 옳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가장 원초적인 것이, 친밀감이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그 욕망(사도-메저키즘)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몽]에서는 섬뜩한 장면이 그나마 적은 편이다. 하지만 영상이 던져주는 폭력의 밀도에 있어서는 그의 다른 영화에 못지않다. 다 보고 나면, 눈물이 주루룩 나는 데, 그건 결코 슬퍼서가 아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출구가 없다는 느낌 때문에 눈물이 난다. 한 마디로 빌어먹을 훌쩍, 인 것이다.
한 남자가 있는데 매일 밤 꿈을 꾸고, 한 여자가 있는데, 매일 밤 몽유 상태로 돌아다니면서 앞서의 그 남자가 꾼 꿈대로 움직인다. 급기야 뺑소니 사고를 내고, 그래서, 알고 보니 둘은 각각, 사랑했던 옛 애인을 꿈 속에서, 또 몽유 상태에서 찾아 돌아 다닌 것이었다. 사실 이건, 뭐, 말도 안 된다. 도입부를 지나 갈 때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거 좀, 웃기는데, 라고 말이다. 하지만 감독이 이름값을 하는 것은 관객이 방심하는 그 찰나에 카메라 앵글에 마술을 걸고, 편집 가위를 관능적으로 다룬다는 뜻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잠깐 동안,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비웃고 싶을 때, 한 몇 분간 관객을 롤러코스터 위에 올려놓는 명장면이 나온다. 배우 네 명이 연기하는 그 장면. 넷이자 둘이고, 하나이면서 넷인 그들. 이 장면을 뭐라고 이름붙여야 옳을까? 질투? 배신? 광기? 어떤 것이든 좋다. 이 장면 이후로 영화의 모든 스틸이 발화점을 향해 치닫는다. 심상찮고, 또 미친 것 같은 설정임에도 전혀 우습지 않게 된다.
란(이나영 분)이 정신병원으로 가고, 진(오다기리 조 분)이 투신하는 것도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면,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있을 법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작가다. 느닷없이 초현실적인 나비가 나타나서 피 흘리는 진의 손가락을 간질이는 것도 무람히 넘어가는 거다. 도대체 이런 식의 전개가 기상천외한 ‘눈물’을 선사하게 되는 영화적 장치는 뭘까? 사실 가장 궁금한 건 이런 방면이다. 나는 대단히 흥미로운 것 몇 가지를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첫째, 장면과 프레임의 강박이다.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다른 건 몰라도, 몇 가지 프레임을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하나, 그건 문자다. 둘, 그건 가옥(한옥)이다. 셋, 그건 불상(佛像)이다. 마지막으로 그건 색채다. 반복적인 프레임은 그 자체로 영상의 상징적 심도를 높인다. 그리고 이 영화가 유독 잠과 꿈에 관한 영화기 때문에 이런 프레임의 강박적 반복은 상당히 몽환적인 효과를 달성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다시 말해 이 영화 전체가 한바탕 꿈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문득 라캉의 유명한 말(“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이 떠 오른 건 상당히 그럴듯한 연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 작가주의의 강박이다. 가만히 보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도대체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이 영화가 철저하게 작가의 목적의식에 종속된 네러티브와 카메라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김기덕식 캐스팅에 대한 내 감상에 따르면, 그는 남자 주인공에 대해 유난히 까다롭고 섬세한 반면, 다른 배우들, 특히 여배우의 경우에는 매우 무심하고, 때로 상당히 험악하는 점을 짚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그나마 진(오다기리 조)이 특색을 띄며 등장하고, 다른 배우들은 거의 작가주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불행한 피조물처럼 보인다. 또 한 가지. 배우들에게 무심한 건 그렇다 쳐도, 영화에서 언어장벽이 사라지고 없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다. 이건 일종의 반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이 영화에서는 한 쪽이 일본어든 또, 다른 쪽이 한국어든 별 상관도 없고, 그건 언어나, 소통 따위는 아무런 형식적 중요성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가 무성영화라 하더라도 영화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 부분에서 또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건 김기덕의 영화가 나레이션의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폭력’들이 어떻게 ‘로고스’와 합리적 ‘플롯’의 작동을 중심으로 발현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의 영화에서 도드라지는 것, 그건 언어나 구조라기 보다는 정서의 촉발과 신체의 부딪힘, 자기 학대 등등이다. 그러니 ‘말’이란 게 중요하겠는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면 이번 영화도 김기덕 ‘풍’이라는 그 경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희안하게도 그런 ‘틀’ 자체가 관객에겐 신선하다. 처음엔 웃다가, 찡그리다가, 마지막엔 욕을 하며 우는 것, 그게 김기덕 영화고, 어쩌면 삶과 세상에 대해 감독이 내리는 정의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더러운 영혼들이고, 그 적린에 발화점을 부여하는 것이 곧 예술이라고? 김기덕의 ‘자연주의’ 안에서 삶과 세상은 온통 영화적 수사법을 역전시키기 여사고, 그래서 ‘환상’이 곧 ‘악몽’인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총천연색 삶 도처에 ‘제이슨’이 도끼를 들고 쫓아 다닌다고 상상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의 영화를 보고, 한 숨 돌린 후 생각해 보면 이렇다. 즉, 아, 그래서 김기덕이 '거장'이라기 보다는 '연구대상'일 수 있는 거야, 라며, 무릎을 치는 이유가 그런 수긍할 수 없는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것.-nomadia & kalavink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