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용산 참사 타협 소식이 나오는 티비를 망연자실 바라보며 “아, 이렇게 끝나는 구나” 했다. 아니 몇몇이 기뻐했을 것이다. 정운찬 총리, 오세훈 시장, 이명박 대통령, 아마도 김석기 전 경찰청장. 그들은 용산 참사 ‘타협’을 ‘해결’이라고 했다. 많은 노력을 했으며, 서로가 공을 세웠노라고 추어주기 바빴다.
하긴 총리는 그러라고 기용했고, 시장은 대권을 잡고 싶은 것이며, 대통령은 삽질을 계속해야 하니까. 그러나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보상을 해 줄 것이라고? 살인을 했는데? 유감이라고? 사람을 생짜로 태워 죽여 놓고? 이제 장례를 치러도 좋다고? 죽인 것도 모자라 그나마 산목숨을 드잡이하고, 겁박하고, 기어이 감옥엘 보내 놓고? 한 마디만 하자. 지랄이다. 아주 생지랄이다.
그러니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신부님이 유족들을 껴안고 그저 서러워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자회견 내내 영정을 바라보고 끌어안고, 또 쓸어 보며, 이젠 말라 비틀어져 나올 것 같지 않던 눈물이 쏟아졌던 것이다.
그동안 남일당 건물은 해방구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또 나갔다. 이렇게 용산은 시퍼런 새벽, 한 국가의 수도 한 가운데에서 권력이 저지른 살인행각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장소가 되어간 것이다.
▲ 지난해 1월 20일 용산 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건물. ©CBS노컷뉴스 | |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빈소이면서 또 해방구라니. 동시에 이것이 현실이다. 여기 이 땅에서는 죽음으로써만 비로소 해방된다는 그 섬뜩한 현실 말이다. 또한 그것은 상처와 같았다. 자본이 생살을 뜯어 먹고 간 자리.
그리고 그 자리는 그곳을 지나가는 시민들의 가슴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외면하든 또는 슬퍼하든, 그 장소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죽고 나서야 해방이 허용되는, 그래서 늘 슬픔 속에서 쓰린 가슴을 한 뭉치씩 부여안고서야 비로소 저들 권력의 부라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시민들은 인정해야만 했다. 용산을 잊은 시민들은 그들처럼 자신들이 죽어갈 수 있다는 그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신부님들과 유족들 그리고 용산의 동지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용산은 고립되었고, 엄동설한이 온 것이다.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그 대부분의 책임은 방관자들에게 있다.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우리들, 운동 주체들, 지식인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 왜 그들이 울어야 하나? 우리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어야 하지 않나? 그들의 울음을 보면서 ‘그나마 이것이 절반의 승리다’라고 입바른 소리나 해야 하는가? 그래서? 수고했다고? 살인자들이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장례라도 치룰 수 있어 잘 되었다고? 아들이 제 아비를 죽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지금 똑같이 지랄하잔 건가?
이제 남일당이 헐리고 그 선명하던 모순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망각이 찾아올 것이고, 희번덕거리는 건물이 들어서고, 돈 없는 민중들은 쫓기듯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철거가 시작되고, 거래를 하고, 사람이 죽을 것이다.
살인자들. 우리는 알고 있다. 용서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너희가 똑같이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신도 남일당을 방치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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