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100일을 이어가고 있고, 오늘은 KBS 이사회 정연주 사장 해임 제청안이 통과되었다. 촛불이 지난 교육감 선거 이후 두 번째 타격을 입은 셈이다. 일단 정연주 사장 측은 해임 제청안 무효 소송을 낼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패배주의’가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축들이 더 많다. 내 생각에 지금 촛불을 지탱하는 생명력은 ‘지역촛불’과 ‘조중동 폐간’ 운동(‘언소주’의 활동도 주목해야 한다)과 같은 진지전이다. 그러나 기동전이 완전히 말라 버린 것은 아니다. 매주 촛불들이 청계광장과 종각 그리고 방송사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다. 정권과 경찰의 탄압이 극심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다. 사실 촛불의 체감 지수는 진정한 열기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촛불은 지금 속으로, 속으로 더 크게 타오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감 선거는 패배라기보다는 ‘확인’ 작업이었다. 그것은 강남, 서초, 송파 라인의 승리였으며, 또 한편으로 그들의 ‘고립’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정이었다. 선거에서 이긴 그들은 긴 안목에서는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에 대한 공분이 정말, 속으로, 속으로 타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정권은 이것을 알고도 짐짓 모른 체한다. 그리고 밀어붙이는 것이다. 악몽을 떨치기 위해서다. 고립무원에서 그들은 스스로의 처지를 잊고자 돌진한다. 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낙관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정권의 본래면목이 다 드러나려면 아직 멀었다. 그동안 정권 실세들의 말본새들을 되새겨 보자. 어청수의 ‘80년대 진압 방식’, 김석기(신임 서울경찰청장)의 ‘5만원 포상’ 운운은 그들이 심중에 품고 있는 야욕의 일말일 뿐이다. 그리고 효자동 청와대 들어가는 길목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 있는 전경들과 닭장차들은 이들이 결코 쉽게 정권을 내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핵심은 무엇인가? 이들은 ‘공포’를 통해 통치하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시위 연행자 전원에게 100-200만원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협박한다. 실제로는 몇 십만 원 벌금이고 그나마 받아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말이다. 그리고 불법은 저들이 더 많이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통치술이 가장 저열한 방법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역사상 무수한 독재자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꽤 많은 경우 성공했다는 것도 기억하자.
‘공포’의 첫 번째 표적은 모든 ‘기동전’의 활력이다. 어스름이 질 때마다 촛불을 붙이고 거리를 뛰고, 숨고, 연좌하는 이 기동전의 활력을 빼앗아야만 그 다음 수순이 가능하다는 것을 저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막가파식 진압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촛불들에게 피를 보여 줘라!’ 이것이 저들의 진압 명령의 핵심인 것이다. 한 둘의 촛불을 현장에서 패고(다만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경계하고), 흩어졌을 때 잡아들인다. 기동전의 활력은 이즈음 사그라진다. 일정 지역에 연좌하기 시작하면 진압은 더 손쉽다. 게다가 늦은 시간이다. 힘이 부치기 시작할 때 저들은 마지막으로 깨부순다. 상황 종료. 다음은 조중동의 몫이다.
두 번째, ‘진지전’의 활력을 노린다.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나라당, 검찰이 나선다. 고소 고발, 언론 플레이를 통한 여론 조작은 저들이 상시적으로 해대는 도발이다. 이를 통해 촛불의 정당성을 폄훼하고, 폭도로 몰아 부친다. 언론사 장악은 저들의 이 방면에서의 타격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YTN 구본홍 건에서 보다시피 이들은 진지전에서 밀린다 싶으면 져주는 척 한다. 손을 내민다. 그리고 그것을 덥석 잡기를 기다린다. 우리가 그 손을 잡는 순간 행위의 모든 정당성은 저들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명분이 확보되면 돌변한다. 이 수순은 이명박도 마찬가지였다. 강해질 때 굽히고, 약하다 싶으면 친다. 앞으로 웃고 뒤에서 공작한다. 이런 수작들에 놀라지도 말고, 통탄하지도 말자. 저들은 언제나 그래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씨가 마르지 않는 한 말이다.
확실히 하자. 권력의 모든 정당성과 근거는 우리에게 있다. 원래 그렇다. 민주주의는 그 말뜻 그대로 ‘민’이 주인이다. 그리고 권력은 그 ‘민’으로부터 나온다. 한 줌도 안 되는 강남, 서초, 송파 라인이 아니다(이들은 다만 부르주아일 뿐이고, 그렇게 부르주아로 살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인이고 저들이 노예다. 더 말해 볼까 싶다. 앞서 말한 저들의 행태 면면이 그것을 보증한다.
첫째, 저들의 행동은 촛불의 행동을 따라 다닌다는 것에 유의하자. 언제나, 애초부터 그랬다. 촛불을 들자 방패를 들었고, 가투를 나서자 물대포를 쏜다. 저들은 단순히 ‘반응’할 뿐이지만, 우리는 기획하고 토론하며 결의한다. 저들은 명령 체계의 단순회로를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지만, 우리는 자율적으로 타격하고 방어한다.
둘째, 저들의 권력은 기생권력이다. 대선 BBK 사기 사건에서부터 최근의 공천비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명줄은 더러운 뒷거래를 통해 유지된다. 그런데 그 뒷거래로 이루어지는 모든 돈들은 우리 촛불,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이다. 생산하지 않는 저들이 어디서 그 돈을 가지고 오는가? 노동하는 우리가 그들에게 이윤을 가져다 준 것이고, 노동하는 우리가 그 더러운 손에 쥐어진 돈의 본래 주인이 아닌가? 저들의 권력은 한 순간도 우리 노동에, 또 우리가 건네준 그 대의권력의 활력에 기생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한다. 서울 시내를 휘감고 있는 저 전경버스들은 이 권력의 기생적 취약함을 반증할 뿐이다.
그러므로 답은 하나다. 끝장을 내자. 이 기생권력을 말이다. 스스로 노예임을 망각한 정권을 말이다. 위기감이 짙어질수록 저들은 더욱 더 발악할 것이다. 더 짓누를 것이다. 우리는 그럴수록 날이 선다. 전략과 전술을 벼린다.
기동전에서 진지전까지 우리는 한 순간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든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하나가 게릴라들이라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뛰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인터넷과 전화기, 그리고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촛불의 변방에서 우리는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전사들’이다. 우리는 언제나 승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전사임이 필요 없게 될 때 무기를 놓을 것이다. 언제? 저들이 분뇨를 지리며 달아날 때, 그런 저들을 돌려 세우고 우리의 무기를 저들의 머리에 겨눌 때, 저들이 무릎 꿇고 빌며 목숨을 구걸할 때, 그 때.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고민할 것이다.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법대로 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가 하며 어떤 결정이든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고 있다. 그때 오직 그때. - noma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