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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 의지의 낙관주의, 현실은?
[벼리의 영화보기] 일회로 끝나는 공연 현실은 지옥도, <즐거운 인생>
 
벼리   기사입력  2007/10/03 [17:08]
“[왕의 남자]는 이준익의 영화가 아니었다.”

작년 이맘때 쯤 [라디오스타](2006)를 보고 메모해 놓았던 글귀다. 그리고 “아직은 부족하다”라고도 썼다. 왜냐하면 그 영화에서는 연출력이 도드라졌다기 보다 안성기, 박중훈의 오래되고, 잘 익은 연기 호흡이 더욱 빛났기 때문이다. 한 해가 지나고 난 “이제 좀 알 것 같다”고 쓴다. 이준익이 만들고 싶었던 영화가 이런 거라는 것을 말이다.

▲영화 <즐거운 인생> 포스터     © 이준익 필름
명토 박고 시작하자. 찬찬히 살펴보면 [즐거운 인생]은 명작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 주제나 연출에 있어서 치기나 패기 같은 것도 없다. 줄거리는 개봉 포스터를 보는 순간 감지되며, 그 흔한 해피엔딩도 알 수 있다. 중년의 주인공 3명이 음악을 다시 시작한다? 고난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가족과 직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추석 대개봉의 영화가 비극이 될 수는 없을 터, 결국 감동이 물결치는 음악을 한 무더기로 선사하면서 영화는 모든 갈등들을 해소시킬 것이다. 이러니 욕심 없이 화면을 주시하는 것이 좋다.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졌다. 관객들은 안도 했으며, 난 이상한 행복감을 느끼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을 바라봤다. 그런데 순간. 트랙킹 백. 멀어지는 공연장과 함께 흥겨운 ‘즐거운 인생’의 곡조가 흐려진다. 그리고 나오는 음악은 ‘즐거운 인생’ 아니다. 조용한 휘파람 소리 같은 음악. 어째서 카메라는 공연의 열기 속으로 묻혀 들어가는 줌 인(Zoom In)이나 달리 인(Dolly In)으로 움직이지 않는가? 영화는 그때까지의 열렬한 감정선을 되물리기라도 하듯이 점점 더 냉정해지고, 시선을 곧추 세우면서 자기 자신을 다그치기 시작한다. 공연은 일회로 끝나지만 현실은 지옥도처럼 이어지니까.
 
내 생각에 여기에 이준익의 양자택일이 존재한다. 만약 여느 음악 영화에서처럼 갈등의 해소를 극단화하면서 관객들의 판단을 예단하고 결국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처방으로 이미지를 활용하려 들었다면, 감독은 이런 장면을 엔딩으로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카메라를 뒤로 물리면서 그 여백에 관객의 시선을 채워 넣는 방식이며, 이를 통해 영화는 리얼리티의 미덕을 회복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완연한 리얼리즘을 구현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용면에서 영화는 가족영화의 안락한 내러티브 구조를 벗어나지 않으며, 인물들의 비극성은 현실에 육박한다기 보다 매우 자주, 또한 당연히 그래야 했겠지만, 환상 속으로 도주한다. 그렇지만 그 환상이 영화 본래의 미덕(환상과 무관한 영화가 어디 있는가?)을 온전히 구현한다면, 또한 당연히 용서해야 하며, 관객들은 그 환상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갈 권리가 있다. 이 양자 택일의 상황. 현실과 환상은 롤러코스터의 스피드와 텐션처럼 훌륭한 연출가라면 언제나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개의 ‘뿔’과 같다. 그러므로 영화에서만큼 이 양자택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 <즐거운인생>의 한 장면  © 이준익 필름 
그렇다면 이 마지막 장면을 기점으로 한 다음 현실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인물을 통해 그러한 현실을 재현하고자 한다. 인물들이 처한 비극성 말이다. 이 측면에서 함량을 구분한다면 맨 아래쪽에 기영(정진영 분)이 있고 맨 위쪽에 혁수(김상호 분)가 있다. 사실 영화의 극적 진행을 위해  처음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기영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들의 감정이입의 방향은 기영을 떠나 성욱(김윤석 분)과 혁수를 향한다. 현준(장근석 분)은 이런 시공간적 이행의 매개체다.

다시 말해 현준은 영화 내내 밴드의 보컬로서 도드라져 보이지만 그것은 관객이 영화를 대하는 만큼의 그 거리에서 앞서의 세 인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준은 관객-시선의 아바타(avatar)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현준의 역할이 과도하게 강조되었다면 그에 반비례해서 영화가 그나마 담고 있는 비극성은 떨어졌을 것이다. 그건 애초에 감독이 의도했던 주제에서 벗어난다. 장근석은 매우 잘 숨어 있었으며, 절제했다.
 
관객들이 점점 더 궁금해 하는 것은 물론 혁수의 근황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완전 히 확정되지 않는 사실에 다가가는 인물이란 설정은 매우 고전적이다. 그리스 비극에서조차 인물들은 이런 식의 전형을 따르지 않는가. 기러기 아빠들의 잦은 이혼이란 주제는 너무 익숙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혁수의 사정을 잘 아는 관객으로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다음의 연기력이다(내가 알기로 김상호는 [타짜](2006)에 출연했었고, 조연으로서는 ‘무난’한 연기를 펼쳤다).
 
혁수는 울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들이 모였다. 드럼을 치면서야 운다. 매우 공들인 장면이다. 약간이라도 시나리오가 어긋났다면, 조금이라도 카메라가 길게 이어졌다면 이 장면은 신파로 흘렀을 것이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긴장이 비등점에 이른 장면, 혁수가 “너 혹시 남자 생긴거야?”라고 핸드폰 너머의 아내에게 질문 한다. 대답이 없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이 순간에  감독이 결정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이 인물의 생사가 될 거다. 혁수는 죽는 것일까? 사실 평소라면 이 인물을 죽이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추석 개봉작이지 않은가? 그리고 [라디오스타]를 만든 감독이라면 인물 중 누군가가 피투성이로, 또는 혀를 빼물고 매달려 있는 장면을 넣는 건 불가능하다.
 
약간의 냉소와 약간의 타협, 그것을 위한 장면이 텅 빈 중고차 센터에서 벌어지는 세 명의 무반주 퍼포먼스다. 흡사 뮤지컬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에서 과감하게 360도 아크 쇼트(arc shot)를 쓴 것은 매우 훌륭한 결정이었다. 카메라의 스피드와 인물들 간의 텐션, 환상과 현실, 기술적인 측면과 이념적인 측면이 이 장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관객들을 이미지의 롤러코스터 위에 올려놓는다. 한바탕 푸닥거리가 끝나고 혁수는 괜찮아질 것이다.
 
또한 괜찮아 진다. 나머지 둘 모두 말이다. 기영은 맨 먼저 딸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실업자보다는 낫잖아”란 말은 결코 유쾌하지 않음에도 기영에게는 천군만마와 같다. 성욱은 밴드 활동에 대한 변명을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 “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대단원. ‘활화산 조개구이’집이 웅성댄다. 아마 모든 갈등이 해결될 것이다. 집 나간 성욱의 부인이 올 것이고, 기영의 부인도 올 것이다. 예상이 맞다면 성욱의 부인이 제일 늦게 오겠지? 한 치 어긋나지 않는다.   
 
다시 앞으로, 아니 이 영화의 대단원으로 돌아가자. 참으로 갈등은 해소되었는가? 내 생각에 감독은 고개를 흔들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해결될 것인가? 또한 내 생각에 감독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의지의 낙관. 사람들은 다소 경멸적으로 이 영화를 웰 메이드(well made) 가족 영화라고 부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모여라 꿈동산도 아니고 모든 비극적인 현실이 샤방샤방 꽃천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기에는 혁수의 사정이 너무 안타깝고, 성욱의 남은 일상이 힘겨우며, 또한 기영의 꿈이 자칫 위태롭다. 아직 40대에 이르지 않은 현준의 시선에 그저 머물러 있으면 마음 편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카메라는 번쩍이는 공연장으로부터 멀어지고, 공연장을 휩싸고 있는 강변은 암흑천지다. 지성의 비관. 그러나 롤러코스터는 탈선하지 않았다, 영화 내내. 다행인가? 불행인가? - NomadIa
수유너머N에서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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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0/03 [17:0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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