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리에스가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필름에 담아 대중 앞에 내 놓았을 때, 그것은 일종의 마술쇼에 가까웠다(《달나라 여행》, 1902). 그것은 테크놀로지와 놀이의 경이로운 결합이었다. 따라서 “예술은 애초부터 기술이었다”라는 로버트 저매키스(Robert Zemeckis)의 말은 영화라는 매체예술에 이르러 완전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결합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일정정도의 네러티브가 부재한다면 그 필름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거장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단지 조잡한 테크놀로지의 전시가 아니라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완성된 ‘시네마’(‘무비’가 아니라)로 평가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영화가 기술이고 또 예술이라면, 거기에는 그 기술-예술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창조적 네러티브, 즉 사건구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사건구조는 시나리오만이 아니라 카메라와 편집을 통한 시공간의 분할을 모두 포괄한다. 작가(감독)의 특유성은 이 사건구조의 창조를 위해 이미지를 얼마만큼 극단적으로 또는 근원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 영화예술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초기작인 《강원도의 힘》(1998)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고집스럽고 때로는 시니컬한 작업방식은 이제 ‘딱 홍상수식’이라는 레떼르를 달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 홍상수식 시네마에 물릴 때도 되었건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화가 나올 때마다 (정말) 작정하고(!) 본다.
▲ 홍상수 감독의 신작 <첩첩산중> ©<첩첩산중> | |
희한한 것은 여기에 있다. 내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홍상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필자를 포함하여) 먹물께나 든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홍상수가 영화 안에서 능청스럽게 놀려대고 키득거리게 만드는 대상이 또 이 지식인들이 아닌가? 언젠가 나는 홍상수의 이 끝없는 지식인에 대한 조롱과 희화는 역설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홍상수 자신의 애정, 결국 자기 자신(작가 자신도 프랑스 유학씩이나 다녀온 지식인이 아닌가?)에 대한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파악도 부족할 듯싶다. 왜냐하면 이 ‘나르시시즘’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봉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그 나르시시즘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나는 그래도 창피한 줄 안다’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지만, 어쩌랴, 지식인이란 그런 족속들이다. 간단한 사실을 복잡한 진리(aletheia)로 떠드는 자들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단한 사실을 사람들이 매우 자주 망각(letheia)하고 살기 때문에 (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경매가’가 한없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가 주장한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다. ‘창피한 것을 아는 것’과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사이에 무슨, 루비콘 강 쯤 되는 심연이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다들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홍상수는 지식인들을 놀려대면서도 그 지식인들이 창피한 줄도 알고 그래서 괴물이 되는’(《생활의 발견》 중 김상경의 대사) 않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홍상수의 적정수준의 페시미즘도 한 몫하고 있다. 사실 창피스러운 줄 아는 것과 괴물이 되지 않는 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굉장한 덕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테지만 생활과 욕망이란 것이 그 덕목의 실천을 참으로 힘겹게 만든다는 인생관이 그것이다.《첩첩산중》에 등장하는 지식인들도 그렇게 산다. 창피하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위무하고 때로는 위악을 떨면서 말이다.
거두절미. 홍상수는 이번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후 오랜만에 글쟁이들을 등장시킨다. 주요 등장인물은 4명이다. 전주 어느 대학의 교수 겸 소설가인 전 선생(문성근), 그의 한때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미숙(정유미), 그리고 미숙의 예전 애인이자 데뷔한 소설가인 명우(이선균), 마지막으로 미숙의 절친이며 현재 전 선생의 애인이자 또 제자인 진영(김진경). 그리고 까메오로 잠깐 실제 소설가인 은희경씨가 등장한다.
이들 배우들의 역할 면면만 봐도 벌써 실소가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가 애인이고 친구가 또 그 애인의 애인인 이 요지경 상황이란 게 그리 별스럽지도 않다. 그러니까 홍상수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말이다. 작가가 이들 지식인들의 그 별스럽지 않은 삶을 ‘요지경’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이러한 삶 자체의 비루함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나지만 이 영화에서도 지식인들(또는 그 지식인 중 한 명)은 마침내 그 삶의 비루함과 창피스러움을 깨닫게 되는데, 영화의 종반부에 가서 그러하다.
이 영화도 그래서 당연히 마지막 장면이 핵심이다. 여기서 극중 모든 등장인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두 모인다. 그 전날 과음(과연 홍상수 영화에서 음주란 무엇일까?)을 한 네 명은 각자의 연인(섹스파트너?)과 모텔에서 하루 밤을 보낸 뒤 모텔 앞 식당에서 딱, 마주친다. 서로 데면데면하게 따로 상을 봐서 먹다가 가려던 찰나, 식당 문 앞에서 마침내 전선생이 화를 버럭 내며 다른 커플(미숙-동우)을 불러 세운다. “야! 이 새끼들. 일루와! 너네 왜 인사도 안하냐? 어제 진영이만 버려두고 너네 둘이 갔다며? 그래서 진영이가 나한테 전화했다. 그래서 술 마셨고, 늦어서 잠깐 들어가서 쉰 거야.” 전선생과 진영의 사이를 아는 미숙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훽 던지며 말한다. “그만해요! 창피한 줄 아셔야지! (동우를 보며) 야, 나 간다. 넌 뒤에 따라와!” 그리고 화면전환, 모텔촌의 건물들을 비추는 카메라. 첩첩산중, 아니 첩첩모텔중.
미숙은 혼자 차를 몰고 어디로 갔을까? 평론가 정성일도 지적했다시피 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와 클로징 시퀀스가 매우 정교한 장면의 대칭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씨네21』730호 참조). 나는 정성일의 이 평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즉 이러한 구조적 대치성은 곧장 이념적 대칭성, 다시 말해 이 등장인물들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서로의 욕망을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 말이다. 여기서 미숙의 존재는 네러티브 상에서나 구조상에서나 매우 특유하다. 그녀가 보이스오버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장면의 대칭구조에 파열구를 내는 당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홍상수 감독의 신작 <첩첩산중> ©<첩첩산중> | |
사실 미숙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거래의 대상이나 가벼운 섹스스캔들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매우 절실하게 거기 매달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 그녀가 차를 몰며 전주로 가면서 혼잣말로 뇌까리는 “죽어도 돼, 죽어도 돼”라는 말은 이 절실함이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미숙의 이 절실함의 정체는 분명 문학 창작에 대한 욕망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해 전선생과 사귀고, 그와 헤어지자 바로 동우와 잠자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런 혐의가 짙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은희경의 집을 찾아가서 “선생님이 제일 잘 쓰세요. 이제부터 글만 쓸거에요.”라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는 것도 그런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일종의 ‘전이’(transference)를 바라는 이런 행동은 매우 유아적이며, 그래서 실현 불가능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 욕망에 끝없이 집착하는 미숙이야말로 나름 대로들 쿨한 이들 지식인-작가들과는 달리 지식인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선생에게 쏘아부친 그 말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미숙이 어떤 모범적인(?) 지식인상을 드러낸다고 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홍상수 영화에서 그것보다 더 웃기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건 그저 좀 아는(본질적으로는 스스로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또는 창피한 줄 아는) 그런 존재이지, 어떤 휘황찬란한 아방가르드가 아니다.
흔히들 홍상수 영화를 지식인들의 희화로 읽곤 한다. 그건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몇 가지 첨언을 해야 완전히 옳을 것이다. 그 희화라는 것을 통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의 본질이 유전(流轉)된다고 말이다. 예술(pathos)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로고스(logos))에 대한 상당한 부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로고스가 반겨야할 일이기도 하다. 그 로고스가 당대를 지나 살아남는 것은 그러한 부정성의 전염을 통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언제나 로고스는 파토스를 질투하거나(플라톤), 경외하거나(니체), 경제적 하부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것(맑스)으로 간주하지 않았던가? 존경스런 칸트조차 ‘숭고함’에 대면하여 어쩔 줄 몰라 했으니 말이다.
혹시 홍상수는 ‘구름’이나 ‘개구리’를 선사하려고 작정한 당대 한국 사회의 아리스토파네스일지도 모를 일이다. 창피스러운 줄 모르는 지식인들을 위해 창피스러운 영화를 계속 만드는 그런 예술가 말이다. -
redbrig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