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운전하지 않는 내가 여성 운전자들이 도로에서 남자 운전자들한테 가끔 듣는 폭언을 듣지는 않으리라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얼마전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내가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고 생각한 남자 운전자의 험악한 욕설을 듣고 난 후 한동안 마음을 수습하지 못했다. 육두문자를 동원한 모욕에 아무렇지도 않을 재주가 아직 내게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직접 겨냥한 욕설을 들을 때만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것도 아니다. 여성을 비하하는 방식에는 직접 대놓고 공격하는 것만 있는 건 아니며, 못됐기로는 에둘러 욕하는 것이 더할 수도 있다.
우연히 YTN 방송을 보다가 방송용으로는 매우 부적합한 대목을 꼼짝없이 시청하고 말았다. 낯익은 국회의원들이 연극 형식을 빌려 대통령에게 시정에서나 들을 수 있는 욕을 실컷 하는 사정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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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의원들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 첫공연 '환생경제' 최종리허설을 보도한 YTN 돌발영상 ©YTN |
문제의 연극은 박근혜 대표 패러디 파문에 대한 한나라당의 응답인 셈인데 그들은 당 대표를 모욕하는 데 청와대가 거들었는데도 그냥 넘기면 체면이 안 선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만약 ‘박근혜 패러디’가 패러디일 뿐이라면 ‘욕설 연극’도 풍자극일 뿐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장파장이다.
이렇게 보면 한나라당의 '욕설 연극'이 연극을 구실로 대통령을 모욕한 것이라는 비난이 한켠에서 나오는 건 호들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방송이 참으로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민망했다. 내가 충격을 받은 건 원색적인 욕설 때문이 아니다. 집권자를 모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도 나는 관심이 없다.
독일의 전 수상 콜은 재임 시절 인식공격을 방불케 하는 꼬집기의 대상이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풍자만화를 접한 그의 반응은 아주 태평스러웠는데, 비서랑 낄낄거리며 보다가 얼마나 정신없이 웃었는지 의자에서 나동그라지기도 했단다. 민주화된 세상이라면 최고 집권자를 '욕보일‘ 수도 있고 그런 것에 관대해질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제는 그 연극이 대통령 한 사람을 욕보이는 것을 넘어설 때이다. <오마이뉴스> 독자 게시판에서 누군가는 한나라당 여성 국회의원들이 남자 성기를 거론한 욕을 들으며 남자로서 모멸감을 느꼈다고 하지만 정작 분노를 느껴야 할 쪽은 따로 있다.
우리말에서 남자의 성을 공격하는 욕설은 그 궁극적인 비하 대상이 결코 남성이 아니다. 남자를 욕한다고 해서 남성이란 존재를 경멸한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남성의 성을 거론하는 사람의 태도엔 이미 여성과의 성적 차이, 아니 여성성에 대한 우월 의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우월함을 믿는 사회에서 남성성의 결핍은 곧 여성적인 것이며, 여성은 남자의 성기가 없는 존재일 뿐이다. 남자를 욕할 때 흔히 언급되는 ‘거세’는 남성 집단으로부터 배제되어 여성의 범주로 내몰리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남성에게 더할 수 없는 불명예로 받아들여진다. 여성을 전혀 입에 올리지 않고서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란 이처럼 쉽다. 그러나 이런 말을 남자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 나를 슬프게 한다.
대통령을 욕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여성 정치인들 입에서 자신의 성이 속한 집단을 모독하는 말도 거침없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참담할 뿐이었다. ‘욕설 연극’은 한국처럼 성기를 남성성의 우월감과 결부시키는 나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성기를 욕의 소재로 삼는 것이 거꾸로 남성성을 과시하는 것이 되고, 남자에 대한 욕이 오히려 남성 우월주의를 드러내는 것이 되는 한 다른 성이 숨쉴 공간은 없다.
그 폭력성에 여전히 둔감한 사회가 딱할 뿐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