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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오른 노무현식 정계개편, 배경과 전망
노무현 정치혁명 제1과제, 지역주의 극복과 정계개편 어떻게 끌고왔나
 
심재석   기사입력  2004/04/17 [13:07]

말도 많고 탈도 많던 17대 총선이 드디어 끝났다.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압승, 한나라당의 체면유지, 민주당과 자민련의 몰락, 민주노동당의 도약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총선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관전자마다 참여자마다 각기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겠지만, 거칠게 말해 지난 4월 15일은 2년동안 진행돼 온 '노무현식 정계개편'의 꿈이 이루어질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결정을 짓는 날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노무현식 정계개편 시동은 2년전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15일 아침 국립서울농학교 강당에 마련된 종로구 청운동 제1투표소에서 투표한 뒤 나오고 있다.     ©뉴시스
노무현식 정계개편이 정치권을 흔들기 시작한 것은 (구)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이 시작되기도 전인 2002년 3월 4일이다. 물론 최초로 정계개편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10월 인터넷신문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였지만, 변방의 한 정치인이던 시절에 주장하던 것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유력자의 파괴력은 달랐다.

노무현 당시 민주당 고문은 이날 전주리베라호텔에서 열린 '국민후보 노무현 추대 결의대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 기득권을 포기하고라도 정계개편을 주도해 동.서 통합의 정치를 이뤄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시절만해도 '정계개편'이라는 단어는 의원협박, 의원매수, 의원빼오기, 의원꿔주기, 3당야합 등의 단어를 연상시키는 매우 부정적인 단어였다. 그러나 노 고문은 이 때부터 긍정적 의미로 '정계개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개혁세력 중심의 전국정당'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노 고문은 민주당 대통령 경선과정의 TV토론이나 합동연설회에서 "내가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해 대통령후보가 되면 기존의 정치판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큰 틀의 정계개편을 추진하겠다"거나 "정책과 노선구도의 정계개편이 이루어지려면 민주세력과 개혁세력이 통합하는 큰 판을 짜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당시 노 고문의 이같은 주장은 민주당내 개혁파, 한나라당 개혁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은 물론, 자민련 김종필 총재마저도 "확실히 진보적 정당을 구성한다면 정당구도가 보·혁으로 갈라지게 되는 만큼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반면, 이인제 후보나 이회창 후보는 이에 격렬한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이인제 후보는 정계개편설에 '배후가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노 고문은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승리한 후 정계개편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의 당시 주장은 "양김의 분열로 시작된 민주화세력의 분열을 원상복원 시키고, 지역주의 정당구도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신민주대연합론'이다.

YS와의 만남, 치명적 실수

그런데 이 순간부터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악수를 두게 된다. 이른바 '영삼시계' 사건이다. 노 후보는 5월 1일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부산시장 후보 선택권'을 김 전 대통령에게 넘겼다. 김 전 대통령의 대변인 격인 박종웅 의원을 미끼(?)로 김 전대통령을 유혹해 87년 이별한 YS와 DJ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에게 받은 시계를 자랑하고 굽신거리는 듯한 행동은 노무현식 정계개편을 지지하던 유권자들이 물음표를 던지게 할 만한 것이었다.

이 때부터 노 후보는 그때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보수언론의 극심한 공격을 받게 된다. 여기에 박종웅 카드와 영삼시계는 개혁세력에게 조차 실망감을 안겨줘 노풍을 급격히 식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이 노 후보의 제안을 거부했고, 때맞춰 일어난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사건'으로 인해 노 후보는 지지층내에서 욕은 욕대로 먹고, 성과는 없는 불행한 상황이 돼 버렸다. 이 같은 노 후보의 실책은 결국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 후보는 그 시절에 이미 "지방선거에 후보직을 걸겠다"는 특유의 올인(?)전략을 구사했는데, 지방선거에서 참패함에 따라 이후부터 대선까지 정계개편은 커녕 대통령 후보자리마저 흔들리게 돼 버린다. 후단협으로 대표되는 당내 노무현 반대파는 '약속을 지키라'며 노 후보를 흔들었고, 정몽준 대안론이 떠올랐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패배의 수렁에 헤매던 민주당은 '신당'으로 살길을 모색한다. 그런데 신당을 둘러싸고 한화갑 당시 민주당 대표의 '백지신당론'과 노 후보의 '개혁신당론'이 엇갈리는 동상이몽 상태에 빠지게 된다. 노 후보는 여전히 '노무현식 정계개편'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를 추진할 힘이 모자랐던 것이다. 따라서 신당론은 끊임없는 논쟁만 야기했을 뿐 현실로 전혀 실천되지 못한 채 대선에 가까이 가게 된다. 더불어 정몽준 후보의 등장으로 신당론은 반창연대냐 아니냐를 두고 싸움만 일삼게 됐다.

결국, 대선까지 노무현식 정계개편은 현실화되지 못했고, 대신 노무현 후보의 지지자들이 모여 창당한 개혁국민정당이라는 조그만 정당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노 후보는 대선직전까지도 "2004년 선거를 앞두고는 전부 헤쳐모여 새로하자고 주장해왔고 앞으로 그렇게 돼야한다고 생각한다(11월 26일 오마이뉴스 인터뷰)",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정책과 비전이 비슷한 사람들이 헤쳐모이는 정계개편이 이뤄질 것(12월 10일 국민일보 인터뷰)"이라고 말하는 등 정계개편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대통령 당선 이후, 인적청산론이 화근

우여곡절 끝에 결국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더불어 모든 언론은 정치권에 대규모의 정계개편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민주당은 노무현식 정계개편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조순형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 등 개혁성향 의원 23명은 대통령 선거 3일만인 12월 22일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의 발전적 해체와 지도부 인책론을 제기했다. 이들은“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이 아닌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해온 낡은 정치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의 승리”라며 “지역분열 구도와 낡은 정치 틀을 깨기 위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이들은 “김대중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책임 있는 세력과 인사들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민주주의 원칙을 부정했던 기회주의적 구태정치 행태도 단호히 심판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나고 봤을 때 조순형 전 민주당 대표와 추미애 민주당 선대위원장이 이 명단에 포함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이들의 주장에 "흐름 자체가 누가 막고 말리고 해서 될 상황이 아닌 것 같다"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노 당선자의 의중과 벗어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의 주장은 노무현식 정계개편의 본격적인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민주당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에 의뢰, 12월27일부터 이틀간 전국 만 20세이상 남녀 1천명에게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1%가 정계개편이 이뤄지길 바라고 있는 것으로 조사돼 이들의 주장은 국민적 공감대도 얻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활발하던 정계개편 움직임은 인적청산이 강조되면서 탄력을 잃기 시작했다. 여기에 피투성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이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민주당 살생부'를 보수언론이 대대적으로 확대보도함에 따라 정계개편 움직임은 제동이 걸렸다.

가뜩이나 노 대통령에게 밉보인 민주당 구주류는 인적청산론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여기에 노 대통령의 측근인 이강철 전 노무현대통령후보 조직특보가 실명을 거론하며 인적청산론을 제기해, 이후 민주당은 극심한 내분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자그만치 7개월이나 지속돼 정치권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민주당 신주류측은 2003년 4월 28일 연쇄모임을 갖고 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당내외 모든 개혁세력이 참여하는 '헤쳐모여식' 개혁신당 창당을 추진키로 결의했다. 4.24 재보궐 선거를 통해 원내를 진입한 유시민 의원과 개혁국민정당이 범개혁세력 단일정당 창당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 구쥬류측은 '호남소외론'을 제기하며 강력 반발했고, 끝내 폭력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민주당 분당'이라는 형태로 정리됐다. 노 대통령이 주장하던 '헤쳐모여'식의 정계개편이 아닌 '분열'에 의한 정계개편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개혁세력 내에서도 평가가 분분하다. 강준만 교수를 비롯한 일부 개혁적 지식인들이 '민주당 분당'은 개혁세력의 분열과 '호남에 대한 잔인한 선택'이라며 반대했고, 반대편에서는 '구주류가 개혁을 거부했다'며 분당이 '어쩔 수 없었음'을 강조했다.
 
이 모든 사건들 사이에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중심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노 대통령은 '당정분리'를 외치며 직접 개입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최소한 미필적 고의의 혐의는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열린우리당의 창당, 총선의 승리

결국 민주당 신주류와 신추위(개혁신당추진위원회), 한나라당 탈당파가 모여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졌고, 분당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의 4당구도로 노무현식 정계개편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노무현 대통령이 꿈에도 그리던 '개혁세력 중심의 전국정당'인지 여부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일각에서는 민주당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정당을 뭐하러 만들었느냐는 비판을 가하고, 다른 편에서는 '정치개혁' 하나 만큼은 민주당과 차별성을 띄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범개혁세력 단일정당'을 주장하던 것과 달리 추미애, 심재권 의원 등은 아직 민주당에 남아있고, 설훈, 정범구 의원 등은 이쪽도 저쪽도 싫다는 입장이다. 한나라당에서도 탈당파는 겨우 5명에 불과해 '헤쳐모여' 했다기 보다는 민주당 분당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결국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압승했다.

그렇다면 노무현식 정계개편은 이제 끝난 것인가? 열린우리당은 꿈에도 그리던 전국정당과 '범개혁세력 단일정당'을 완성한 것인가?

물론 이같은 평가는 역시 총선을 지켜보는 개개인의 몫이며, 열린우리당도 내부적인 평가에 들어갈 것이다. 더불어 정치가들이 흔히 하는 말로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식 정계개편의 핵심이었던 '지역주의적 정당구도의 해체'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단지 대구경북에서 열린우리당이 의석을 내지 못했다는 표면적인 모습만 봐서도 그렇고, 특정지역이 상대지역에 갖고 있는 묻지마 적대감, 우월감이 전혀 변화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이같은 상황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지역주의를 먹고사는 야당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같은 한계점이 노출되기도 했지만, 각 언론들과 시민사회에서는 이번 총선에서 지역주의적 정당구도가 와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내리기도 했다. TK지역은 여전히 강고했지만, PK에서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다. 여기에 진보정당이 원내진출에 성공하면서 이후 지역주의가 더욱 약화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형성됐다.

이제 다시 공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노 대통령이 업무에 복귀한 이후(복귀한다면) 어떤 정치 스타일을 보일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된다. 노 대통령은 스스로 통합의 정치를 내세웠지만, 대통령이 되기 이전이나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줄곧 통합을 이끌어내는 통치자의 모습보다는 정적과의 한판승부를 벌이는 파이터(fighter)의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는 평가다.

그리고 끝내 모든 싸움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승리로 귀결됐다. 노 대통령이 2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정치구도가 과연 자신의 주장대로 '통합의 정치', '개혁세력의 단결'을 이끌어 낼지, 아니면 자신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일 뿐이었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평가할 때가 왔다.

이런 의미에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말대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와 역사적 의무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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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4/17 [13:0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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