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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진통 겪는 히말라야의 네팔왕국
입헌군주제에서 민주주의 실험국, 네팔 3박 4일의 기록
 
김동민   기사입력  2004/02/15 [13:25]

2월9일부터 14일까지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을 다녀왔다. 정확하게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10일부터 13일까지 3박4일을 체류했다. 인천공항에서 네팔까지는 직접 운항하는 항공편이 없다. 그래서 방콕으로 가 그곳에서 하루를 묵은 후 카트만두로 향할 수 있었다. 돌아올 때도 방콕 공항에서 5시간을 배회한 후 우리 시간으로 새벽 1시 15분에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네팔은 산악인들이나 트레킹을 즐기는 동호인들이 개별적으로 찾거나 인도 여행자들이 더불어 들르는 곳이다. 나는 방송학회 세미나 참석차 30여명의 학회 회원들과 함께 네팔을 찾게 되었다. 여기서 세미나 얘기는 할 필요 없고, 내가 둘러본 네팔에 대한 경험을 정리하려고 한다. 머물 때는 여러모로 짜증이 났지만, 돌이켜보면 안쓰러운 마음에 착잡해지기도 한다.

네팔은 히말라야가 있어 그나마 먹고 사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관광을 위한 인프라는 전혀 준비돼 있지 않았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오로지 히말라야가 있어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있어서 연명을 한다는 얘기다. 물론 인도와 중국,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원조도 한 몫 한다. 네팔의 국민소득(GNP)은 200불을 갓 넘는 수준이다.

농업인구 80%에 40% 이상을 농업생산물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농경지의 90% 이상이 봉건지주계급의 소유이다. 전체적으로 상위 5% 정도의 부유층과 나머지 극빈층으로 극단적인 계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제조업이라야 설탕, 성냥, 맥주 등을 생산하는 경공업이 존재할 뿐 나머지 생필품은 모두 수입에 의존한다. 문맹율이 60%에 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네팔 국민들은 이렇게 가난하면서도 그런 삶을 감수하는 듯 보였다. 그 배경에는 종교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네팔은 힌두교왕국이다. 2천5백만 인구에 신(神)의 숫자가 3천만이 넘는다고 한다. 인구보다 많다는 얘기다.

갠지즈강으로 흐른다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조그만 강의 줄기에 모여 있는 힌두교사원과 화장터, 공원을 찾았다. 입구에서 제멋대로 따라붙은 한 네팔인은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설명을 해주었는데, 헤어지며 15 달러를 달란다. 8 달러를 주었다. 사실 이것도 바가지다. 네팔은 모든 게 이런 식이다. 물건을 팔고 사는데 정가가 없어 사정없이 깎아야 하며,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호텔에서는 정가 판매려니 하고 울 장갑 2개를 14 달러에 샀는데, 다음 날에는 깎아서 10 달러에 샀다.

화장터에서 날아온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억지로 둘러본 그곳은 가관이었다. 네팔 사람들은 냄새에 익숙한 듯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는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는 힌두교 수도승인 ‘사두’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도를 얼마나 깨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해괴한 모습으로 빈둥빈둥 시간을 때우며 사는 것으로 보였다. 이것이 네팔 국민들이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배경으로 보였던 것이다.           

네팔 국민들이 이렇게 체념하며 혹은 그런 삶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동안 극소수의 지배계층이 저항의 걱정 없이 부와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화장터 입구에 사회복지 시설이 있는데, 이곳에는 집과 가족이 없는 이들이 모여 살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이들이나 밖에 있는 이들이나 생활수준은 비슷했다. 물론 복지시설이 훌륭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 반대다. 국민들은 이런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국왕과 지배자들은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네팔은 히말라야가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성싶었다. 그런데도 관광객을 유치하여 달러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인 나가르포트의 에베레스트 전망대로 가는 길이나 교통편, 숙박시설만 보더라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물건도 살만한 게 없으며 정가 판매도 없다. 부르는 게 값이며 한없이 깎아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먹는 재미도 기대할 게 없다.

그래도 민주주의의 싹은 돋아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 1990년 입헌군주제 신헌법이 공포된 이후 민주주의로 가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워낙 열악하고 여건도 준비도 안 된 실험이기에 시행착오의 비용이 엄청나다. 그 와중에 무장투쟁을 하는 마오이스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내가 도착한 날에도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마헨드라 전 국왕의 동상에서 마오이스트가 장치한 시한폭탄이 터졌으며, 우리 일행의 발을 묶었던 총파업 날인 12일에는 이들의 공격으로 6명의 시민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우리의 50년대 수준이었다. 아편과도 같이 건강한 의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종교의 모습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국민들 사이에서 진보정당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정도가 희망이라면 희망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왕권 강화를 획책하는 갸넨드라 국왕의 지위도 그리 탄탄해보이지는 않았다. 왕권을 지탱해주는 군대라는 게 우리의 예비군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중국을 포위하며 유일 제국주의 국가로서 세계 지배를 노리는 미국의 마수가 뻗치는 것이 변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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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2/15 [13:2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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