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최철원 맷값, 세습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
[정문순 칼럼] 타락한 재벌 2세, 부활한 양반인가, 악덕 자본가인가.
 
정문순   기사입력  2010/12/15 [03:10]
고용승계에서 배제되어 항의시위를 벌였다는 이유로 탱크로리 운전기사를 맷값 주고 폭행한 재벌 2세 최철원의 행태는, 그 자신이 태어나면서 획득한 사회적 지위라는 배경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최씨의 행각은 사회적 지위를 본인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고 탯줄이 떨어지면서 획득한 이들에게 내재된 심성의 표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지위를 그저 먹는 것이 얼마나 당사자의 내면과 인격을 황폐하고 척박하게 만들어 파탄으로 몰고 가는지 최씨는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근대 시민사회의 가치관에 정면도전한 최씨의 안하무인적 행태를 보자니, 그 옛날 양반들의 심리를 실감나게 구현해주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씨로 말하자면 현대에 부활한 양반인 셈이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해학적인 문체로 묘사되었지만 양반들의 행패는 사회문제가 아니라 신분제 사회에서는 만연하고 당연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더라도 오늘의 최씨를 방불하게 하는 ‘활약’을 벌인 선배 양반들이 드물지 않다. 

세조 시절을 다룬 사극에서 권신 한명회의 ‘절친’으로 등장하는 무인 홍윤성은, 세조의 총애를 받은 덕에 공신 지위를 거듭 차지하고 영의정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죽을 때까지 영화를 누린 인물이다. 세도를 믿고 어찌나 오만했던지 첩실과 노비들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활과 칼로 징치했다. 성질이 이 모양이니 홍윤성 주변에는 종복처럼 아첨하는 사람이 많았다. 홍윤성 자신만 세도를 부리는 데 그치지 않고 노복들이 호가호위하여 눈에 거슬리는 양반을 때려죽인 일도 있었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던 홍윤성도 사후 30년 뒤엔 연산군의 후궁에게 집을 뺏기는 수모를 겪는다. 

최씨는 평소 직원들을 ‘머슴’으로 불렀다고 하니, 스스로를 양반으로 착각한 것이 틀림없는 듯하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심리에 대해서는 남편 잃은 여성의 순사(殉死)를 망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미화하거나, 자기 가문의 선조 여성을 무덤에서 불러내어 주체적인 현대 여성을 꾸짖는 데 쓰는 등 신분제 사회에 대한 향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문열의 소설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영남 남인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문열에 비하면 최씨는 글보다 자신의 몸으로 좀더 확실하게 양반 의식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신분제 의식에 붙들린 최씨는 근대 형법에서 금지된 돈과 폭력의 거래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근대인들이 피땀 흘려 세운 법 체계를 농락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최씨의 행각을 전근대적인 의미에 국한 지울 일은 아니라고 본다. 최씨는 왜 늙은 노동자의 몸을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았을까. 때리는 것으로 끝났다면 자신의 사회적 배경을 믿고 설친 망나니 행패 정도의 의미로 그쳤겠지만, 폭력 행위에 돈을 지불한 자가 정신이상이 아니라면 그의 행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씨가 맷값을 지불한 것은 폭력 범죄를 마치 정당한 거래인 것처럼 만듦으로써 피해자의 반발을 막고 모멸감을 주기 위함일 것이다. 또 대가 없이 때리는 것보다 한층 더한 몸에 대한 능멸일 수 있다. 이는 분풀이 차원을 넘어 수십 년 간 혹독한 노동에 단련된 노동자의 몸을 능멸하는 것이다.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네 하찮은 몸은 얼마든지 내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야.’라고 최씨는 생각했을 것이다. 돈이면 뭐든지 교환할 수 있다고 믿는데다 노동을 파는 것 말고는 매매할 수단이 없는 노동자의 처지를 멸시하는 악덕 자본가의 심성이 아닌 한 맷값 폭력을 설명할 길이 없다.

자본가로서 최씨는, 팔아야 할 노동이 없어진 실직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고 ‘주제 넘게’ 반발함으로써 노동자의 계급적 지위를 망각한 것에 대해 응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자의 몸을 폭력적으로 소유했다는 점에서 최씨의 맷값은 매우 근대적이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초기 자본주의의 속악한 자본가와 전근대적인 망나니 양반의 두 가지 양면성을 고루 보여주고 있는 최씨의 정체는 매우 복합적이다.

최씨의 행태는 재벌가 후손으로서 결코 예외적인 모습이 아니다. 언론이 아무리 봐주려고 해도 재벌가 2세, 3세들의 반사회적 행적은 세상에 심심찮게 드러난다. 주가 조작, 해외원정 도박 등은 이들의 단골메뉴이다. 최씨와 거의 동급으로 집안의 배경을 믿고 망나니에 가까운 짓을 하는 재벌가 후손들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술집 깡패에게 맞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 제 손으로 직접 복수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도 20대에 그룹 회장 자리를 거저 물려받았다.

공짜로 얻는 자들이 있기 위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빛을 볼 수 없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가능한 사회에서는 부모 잘 만난 이들이 무임승차하는 동안 조상에게서 받은 것도 없이 태어난 서민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에게 인간의 존엄성마저 짓밟히고 능멸당하는 참담한 처지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하늘에서 부여 받은 지위는 인권 말고는 없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사회. 천부인권이 아닌 천부권력의 사회에서 파락호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이상할지 모른다. 대대손손 재벌 세습의 사회에서 최씨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변호는 이것이다. 망나니짓도 어찌 보면 나쁜 체제의 산물이라고.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0/12/15 [03:1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그냥두냐 2010/12/16 [19:17] 수정 | 삭제
  • 아무래도 타락한 양반사회가 다시 오려나 보다. 그걸 그냥두는 노예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