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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의 '소아병 발언' 왜 나왔나?
일본 보수우익의 '꼬붕'으로 정치생명 연장
 
이유현   기사입력  2003/06/15 [21:45]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직전에 통과된 '유사법제'로 인해 일본내의 반발과 주변국의 우려, 나아가 국내에서도 여야가 일치해 비난하는 가운데 유독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이를 옹호해 논란을 빚고 있다. 그러나 김종필의 전력을 살펴보면 이번 발언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는 자민련 및 김종필 총재의 위상과 어떡하든지 간에 정치적 영향력을 복원하려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자충수라고 볼 수 있다.

먼저 김종필의 친일행적부터 살펴보자.

지난 1999년 11월 30일, DJP연합으로 정권창출에 성공한 김종필은 공동정부의 총리 자격으로 한일각료회담에 참석하고 이어 일본 규슈(九州)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 이어 초청강연에서 그는 유창한 '일본어'로 "이제 일본은 아시아의 리더가 돼야 한다"며 일본의 대학생들을 감동과 열광의 분위기로 이끌며 우렁찬 기립박수를 받았다. 한글원고 22쪽에 이르는 연설문 중 과거사를 언급한 것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가슴아픈 상흔"이라는 단 한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연설의 대부분은 지난 65년 한-일협정체결에 대한 자신의 공로를 자화자찬하는 데에 할애했다.

한 나라의 총리가, 그것도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총리가 식민지 본국에 가서 지배자의 언어로,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의 '맹주'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풍경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당시 수구언론은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외면했다.

김종필의 방일직전 중국의 장쩌민 주석 또한 동경대에서 강연기회를 가졌다. 장주석의 강연 중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를 지적하자 일부 동경대 학생들은 야유와 함께 집단퇴장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과연 어느 지도자가 그 나라 국민의 호응과 지지를 받았는가?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일국의 지도자들의 역사인식과 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왜 김종필은 일본에 그토록 저자세인가?

1961년 5.16쿠데타로 36세의 나이에 박정희의 오른팔이 된 김종필은 군인에서 정치가로 변신하다. 이때 그의 정치입문의 알파에서 오메가는 바로 일본의 정치구조, 이른바 오야붕과 꼬붕으로 연결되는 가부장적 봉건적(주군과 가신), 이른바 보수우익의 자민당이었다. 특히 군부정권으로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한 박정희는 한일협정을 서둘러 체결시키면서 그 중책을 새파란 김종필에게 맡긴다.

하루아침에 2인자가 된 젊은 김종필의 상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정객 오오히라 슈죠(大平修三) 외상(나중에 총리가 된다)이었지만, 그 뒤에는 박정희가 자신의 양아들이라고 망언을 한 구보다, 일제강점기 한국을 요리했던 기시 노부스케 같은 보수우익의 거물들이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일협정 체결 과정은 한마디로 바둑으로 치면 오오히라가 김종필에게 18점 접바둑을 두어 준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굴욕적이며 변변히 받아낸 것 조차 없었던, 한국외교사 제1의 실책이라 기록될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쿠데타로 정통성이 없던 박정희 정권은 그런 계제를 따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김종필은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일본통'으로 행세하면서 박정희 정권 내내 일본과의 뒷거래를 주도하면서 떡고물을 챙기며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역대 정권과 일본 보수우익과의 추악한 거래의 한 단면을 벗겨보자.

80년대 초 국내에 대하소설이 드물었을 때, 대부분의 대하소설은 일본에서 수입한 것들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읽힌 것 중의 하나가 '불모지대'이다. 전후 일본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종합상사'의 활약을 일본군 참모본부 중령출신 세지마 류조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세지마 류조는 일본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영향을 받은 식민지 엘리트들을 조직해 일본 종합상사의 진출과 사업성공의 동력으로 삼는다. 따라서 세지마 류조는 일본 종합상사의 '참모총장'이라 불리며, 이후 일본의 사업가 관료들은 세지마 류조의 전략을 '일본주식회사'의 모델로 삼는다.

전후 일본의 성장과 이토추상사의 세지마 류조의 활약, 그리고 세지마의 파트너 혹은 정보원이 된 식민지 국가의 지도자들과의 커넥션을 생각하면 한국에서는 누가 떠오르는가? 바로 박정희와 김종필이다. 그리고 이들은 세지마(와 같은 일본의 우익)을 '존경의염'으로 대접한다. 세지마와 일본의 우익들은 "반공주의와 내셔날리즘이 결합된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지"하지만, "한일합방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지한파'라 불리면서 한국의 역대정권에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친일파'보다 더한 반공 군사독재정권과 '검은 유착'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황색신문에나 나올 내용을 장황하게 떠드는 것은 이유가 있다. 지금 충청도에서도 '지는 해'가 되어있고 정치적으로 거의 붕괴나 다름없는 자민련을 이끌고 있는 김종필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 처해 있다. 더구나 양김은 대통령이라도 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면서 양김이 없는 정치판에서 뭔가 큰 역할을 해야 원로로 대접을 받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김종필이 동원한 첫 번째 전략이 바로 방북외교이다. 북한과 공산당을 생래적으로 거부하는 김종필이 노무현 정부에게 '추파'를 던진 이유는 간단하다. 조-일수교의 지지부진과 북한핵에 대한 일본 우익의 메시지를 북한정부에게 전달하면서 거중조정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 거기에 따른 떡고물도 떡고물이지만, 국내정치까지 관철하려는 일본우익으로서는 김종필이라는 대리인의 체면을 어느정도 세울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김종필의 방북외교 구상과 진전은 국내정치 상황이 아닌 대한해협 건너편에서 진행된 것이고. 따라서  유사법제에 대한 '소아병' 운운은 그것에 대한 화답이다.

김종필의 두 번째 전략은 당연히 내각제이다. 지금은 잠복되어 있지만 민주당에서의 '신당논란'과 한나라당의 분란이 맞아 떨어지는 지점(구체성은 없어도 포카에서의 '뻥카' 구실은 한다)이 바로 내각제이다. 호남소외론을 외치며 강하게 반발하는 한화갑의 저항에 김종필의 '카게무샤' 냄새가 난다는 정치판의 분석은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굴욕적 한일협정 체결의 주역, IMF 사태 이후 일본에 가서 유창한 일본어로 '아시아의 맹주가 되라'고 외친 공동정부의 총리, 1961년 이후 김종필의 정치생명은 군부쿠데타의 물리적 폭력과 그 사생아로 태어난 '지역차별 조장'이라는 망국적 지역감정을 악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전력의 이면에 한반도에서의 일본우익의 충실한 대리인이라는 사실은 숨겨온 것이다.

김종필 또는 이땅의 친일파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아무리 망국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어도 왕궁의 한복판에 야쿠자 20여 명이 들어와서 난동을 피우고 한나라의 황후를 무참히 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단 하나의 요인은 내부에서 호응하는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손들이 이제 자신들의 안위와 부귀를 위해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거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국내에 어떤 일을 저지를지는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한국인보다 더 일본의 이익에 충실한 김종필이 아직도 정치생명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희극을 넘어 비극이다. 더 이상의 몽니와 틀래짓은 그만두고 정계에서(은퇴하는 것이 아닌) 사라지는 것만이 그나마 노추라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못하겠다면 딱 한마디만 남긴다.

충청도민이, 국민이 외친다.
사요나라 JP!!    

* 본문은 독자기고입니다. 본문에 대한 네티즌 여러분들의 다양한 쪽글을 기다립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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