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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의 권력화, 어떻게 볼 것인가?
[쟁점] 비정규직 외면 고착화 초래 Vs 양보하라 대신 '싸워라' 추가돼야
 
예외석/정문순   기사입력  2005/03/10 [17:42]

* 본문은 노동조합의 역할에 관해 본지 독자이신 예외석님의 글에 정문순 편집위원의 반론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평가와 참여를 환영합니다-편집자 주.

노조권력과 양두구육(羊頭狗肉) / 예외석
 
철 지난 피서처럼 좀 시간이 지나 뒷북 치는 이야기 같지만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전에 기아 자동차 노조에서 양아치 같은 취업 브로커 짓을 하다가 들통이 났다. 회사는 물론 노조도 거센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물론 그와 같은 비리가 기아자동차 노조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취업하기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만큼 힘든 요즈음엔 그런 편법을 써서라도 취업을 하려는 당사자들의 마음이야 오죽 했을까 조금은 이해할 만 하다. 그렇지만, 노동 단체들 내부에서 노조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조직은 불과 전체 노동자들의 10% 미만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 잘못된 노조권력이 행사되는 사업장이 겉으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공공연히 일상화 되어 있다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취업을 애타게 학수고대하며 노느니 장독 깨는 심정으로 공무원시험 준비학원에서 소중한 젊음과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포기한 채 아무런 목적 없이 대학원에서 시간을 축 내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돈을 주면서 대기업 생산현장에 취업하려는 사람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나 싶기도 하다.
 
노조는 분명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사용자 및 사용자 단체에게 때로는 거센 저항과 타협을 병행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80년대에 대공장을 중심으로 전국에 민주노조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많은 중.소공장에까지 노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조직력이 약해서 우리 주면에는 노조가 없는 사업장들이 훨씬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정말 분노가 치미는 것은 돈을 주고서라도 취업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절박한 심정을 악용하여 흡혈귀 짓을 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취업을 미끼로 브로커 짓을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들은 아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울산의 한 자동차회사에서도 예전부터 노조에서 간부들이 취업브로커 짓을 한 사실들이 있었다. 그로 인해 노조 내부에서 징계 처리되는 등 말썽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도 있었다.
 
돈을 주고 입사하여 대공장 노동자가 된 사람들이 나중에 노조간부로 활동하게 되면 또다시 그러한 권력의 맛을 음미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되는 과정도 있다. 오늘날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비정규직이 나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기업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것에 일조하는 것은 결국 노조권력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 노동자들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되겠지만, 그래도 첫째 조건이 대기업 입사가 우선 희망이고 중.소기업이라도 가급적 노조가 있는 회사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 일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과 시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조가 있는 기업을 선호하는 것은 그만큼 노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단 노조가 있는 회사에 취업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노조권력의 맛에 너무나 쉽게 적응해버리고 만다. 그 권력이 진정 회사와 노동자들의 발전을 위하여 사용되어진다면 더 이상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패거리 문화로 전락하여 취업브로커나 회사내부에서 보다 안정적인 자리의 확보를 위한 수단이 되거나 비정규직 양산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의 60%를 넘어서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동정적인 심정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들과 연대를 해서 공통투쟁 하는 것은 기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거창한 구호로 “비정규직 철폐하자”를 외치고 있지만 오히려 지금과 같은 활동으로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철저하게 고착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것이다.
 
입으로는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하면서도 정규직을 보호하는 바람막이로 비정규직 채용하는데 앞장서는 노조권력이 있다. 그들이 결국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숫자를 늘였다 줄였다 주도적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상 비정규직은 결코 사라질 수 없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돈 보따리를 싸 들고 노조간부를 찾아가는 해괴한 일들은 계속 될 것이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한 손으로 불량식품을 추방하자는 피켓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 불량식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의 모습이 아닐까.
 
그럼 대안이 무엇인가 하고 추궁할는지 모르겠다. 대안? “밥 좀 나누어 먹자” 혼자 배 부르게 먹고서 소화불량에 걸려 거북스러운 모습으로 굶주려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고 나누면서 살자. 그것이 대안이다.


‘양보하라’, ‘나누어라’ 하는 주문에 ‘싸워라’가 추가되어야 / 정문순

 
예외석씨의 글을 잘 읽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 의식을 주문한 그의 뜻에 동감한다.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대가로 영화를 누리는 자들이 있다면 배척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와 배려가, 기아자동차 노조의 채용 비리 같은 노동조합의 도덕적 해이, 나아가 노동운동의 위기를 치유하는 근본적 처방이라고 보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참여정부 들어 노동계는 줄곧 여론폭력의 희생이 되어왔다. 불황에 임금인상 요구한다고, 도로가 막히는데 파업한다고 이기주의 집단으로 걸핏하면 매도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이윤이 있고, 이윤 발생에 자신이 기여했다면 노동자들이 사용자에게 제 몫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다. 노동자들이 일한 만큼의 대가를 요구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속한 계급의 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태도는 결코 시비 걸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수구세력과 개혁 집단, 그리고 미성숙한 시민사회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기본권까지 사사건건 가로막고 나섰다. 노동자들더러 싸울 생각하지 말고, 주는 월급이나 받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의도는 노동운동의 무력화이며, 비정규직 양산에 있다. 투쟁성을 잃은 노동조합이 존재 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고용불안과 실업이 일상화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본과 맞장 뜨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채찍’을 두려워한 노동자들에게 자본은 약간의 ‘당근’을 쥐어주는 대가로 이들의 전투성을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태어난 것이 ‘노동귀족’이다.
 
물론 자본이 제 호주머니에서 ‘당근’을 꺼낼 리가 없다. 그건 하청계열사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챈 것이니, 이런 식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안존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이지만 ‘노동귀족’은 배불러서 파업하는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파업을 할 줄 모르고 자본과의 담합에 혹하는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자신들이 그나마 누리는 안정이 있기까지 선배노동자들이 얼마나 피눈물을 바쳤는지는 외면하고 투쟁의 날개가 꺾인 채 현실의 안일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다. 그것의 극단이 기아자동자노조 광주지부의 행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노동운동에 관한 한 수구세력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는 참여정부와 개혁세력은, 노동자들더러 싸우지 말라고, 입 다물라고 줄기차게 강요하여 일어난 결과에 전혀 책임이 없는가.
 
오늘날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자들이 양보할 줄 모르고 싸워서가 아니라, 거꾸로 싸울 줄은 모르고 자본의 ‘당근’에 혹하여 자신의 계급의식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노동자들에게 있다.
 
물론 그 뿌리를 캐자면 자본의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 분열 획책과 닿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규직 노동자더러 비정규직 노동자와 밥그릇을 나누라는 주문은 옳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을 건드리지 못하는 처방은 소시민적 윤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눔과 양보를 말한다면, 자본이 허락한 것에 한해서 나눌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파이를 키워 나눌 것인가 하는 질문까지 감당해야 한다. ‘양보하라’, ‘나누어라’ 하는 주문에 ‘싸워라’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고인 물이 썩듯 싸울 줄 모르는 노동자는 어떻게 부패하는가를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 본문은 예외석님이 2월 27일자 대자보 쟁점토론방에 글을 올렸고, 이어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http://www.dominilbo.co.kr/ 2월 28일자에  기고한 글이며, 정문순 편집위원이 3월 2일자 반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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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3/10 [17: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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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에서 2005/03/10 [18:31] 수정 | 삭제
  • 이글은 지난 경남도민일보 2월28일 3-15광장에 예외석 글이 실린데 이어 3월2일자에 정문순씨의 반박글이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