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세력이 진보세력을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둘러싼 논의는 비상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대통령이 상당한 자발적 지지자를 가지고 있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 위기에 놓였던 장본인이란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둘러싼 논쟁은 여러 가지 관심을 가진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중도세력이라는 점에서 노무현 논쟁은 더 넓게는 중도세력과 진보세력과의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서로를 흠집 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부분과 비본질적인 부분을 가려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질식당하고 있던 군사 정권 아래에서 중도세력이 가하는 진보세력에 대한 비판은 수구세력이 중도세력에 낙인찍는 색깔론을 차단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이 강했다. 예컨대 학생들의 폭력 시위가 벌어지면 중도세력은 수구세력과 함께 과격시위를 규탄하곤 했으나, 이는 중도세력이 진보세력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수구세력이 규정하고 선점해버린 "안정"이라는 장에서 스스로 극단적으로 보이지 않으려는 방어적 성격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진보세력이 중도세력의 경쟁자라기보다는 군사독재 세력에 저항하는 우군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며, 진보세력 또한 중도세력을 적대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평화적 공존’ 내에도 균열의 위험은 항상 존재했고 80년대 후반 이후 적대성은 결국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진보세력 내에서 중도세력을 수구세력과 거의 동일하게 취급하는 경향성이 대두되었고, 학생운동권 내에서도 이는 꾸준히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중도세력이 어떠한 정치 행동을 하건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3당 합당에 항의하여 거리에 나선 당시 평민당을 향해서도 학생운동 진영 일각은 야유를 보냈다. 일반시민에게 그 야유가 제도 야당이 ‘과격하게’ 거리에 나온 질타로 잘못 인식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군사 독재 치하에서 중도세력과 진보세력의 평화적 공존이 있었던 것이 예외적이라 볼 수도 있다. 일제 강점기 하의 독립 운동을 살펴보더라도 우파와 좌파의 적대성은 매우 위험한 수위에까지 이르렀었다. 우파 독립군이 좌파 독립군을 경쟁상대로 여겨 집단 학살하기도 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북한의 좌파가 우파를 포용했던 것은 사실 북한 좌파의 압도적 영향력 덕분에 가능했다고 해석해야 공정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이르기 중도세력이 진보세력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는 중도세력이 진보세력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87년 이후 재야 진영이 중도세력에 흡수되어 버린 사실도 그 한 예이다.
이런 점에서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증대되고 있는 일부 중도세력의 진보세력에 대한 적대감은 진보세력이 중도세력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위협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올해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이미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예약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단순한 글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볼 수 있는 서프라이즈 서영석씨가 진보세력에 대해 정제되지 않은 적대감을 글을 통해 자주 드러낸 것은 진보세력의 약진이 일과성이 아니라 상당한 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슷한 의미에서 80년대 후반 이후 확산된 진보세력 내의 중도세력에 대한 적대감은 진보세력이 중도세력의 입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편 진보세력 내에 중도세력을 ‘현실적 경쟁자’로 여기는 이상주의가 존재했다는 점도 보여준다.
요컨대, 중도세력이 가진 진보세력에 대한 적대감이나 그 반대 방향에서의 적대감은 중요한 역사적 경향성에 대한 지표이다. 즉, 상호의 표면적 적대감의 증대는 한국전쟁이후 씨가 말랐던 진보세력의 독자적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이 다른 방식으로 표면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상호의 적대감이 서로를 해치는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권순욱 씨 등 중도세력 내부에서 자성의 주장이 나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할 일이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세력에 대해 적대성을 보이지 말자는 그의 주장은,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노무현 지지자에게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선택사항에 불과하다. 하나의 정치적 주장이 해당 집단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렇게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했을 때는 그 주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당위적 도덕률에 머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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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민주화 동지의 동질감일까? 김근태 장관이 단식농성 중인 권영길 의원을 위로 방문하고 있다. ©대자보 |
그렇다면 과연 중도세력이 진보세력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 중도세력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근거라도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결론은 그렇다 이다. 이 결론은 단순히 적대감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슨 근거에서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가 처한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 기인한다.
눈을 돌려 일제 강점기로 가보자.
(ㄱ) 우파 독립군은 좌파 독립군을 집단 학살하고 좌파 독립군은 우파 독립군을 집단 학살한다.
여기서 가장 득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두 말할 것 없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다.
(ㄴ) 우파 독립군은 좌파 독립군을 집단 학살하고 좌파 독립군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어떻게 될까? 우파 독립군이 가장 득을 볼까? 여전히 가장 득을 보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경우에나 노무현 지지자들이 민주노동당을 감정적으로 비난하면 할수록 유리해지는 쪽은 다름 아닌 제1야당, 수구세력이다.
무슨 메커니즘으로 그렇게 되는가?
(1) 우선, 정책비판이 아닌 감정적 찌꺼기의 배설은 사회 전체의 논의 기준을 정책비교가 아니라 감정적 호불호로 고착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제 1인자는 수구세력이다. 조선일보의 사설과 칼럼을 읽어보면 이성적인 접근보다는 감성적인 적대감 형성에 이들이 얼마나 도가 텄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중도세력과 진보세력은 발벗고 따라와도 이 점에 있어서는 도저히 이들을 따라 갈 수가 없다. 무심코 내뱉는 감정적 비난이 수구세력이 조성한 장(場)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파병반대 운동 시기에 서영석 씨 등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원색적 비난은 그가 어떠한 의도를 가졌든지 결국 수구세력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내부 비판도 있었다.
사실, 이 지적은 진보세력에도 정확하게 같은 무게로 적용된다. 정책비판의 도를 넘어 과도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위의 논지와 동일한 의미에서 파괴적이고 수구세력에 이용되는 것이다.
(2) 수구세력의 전략은 이러한 일차적 감정 전선의 형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들은 더욱 정교한 전략은 한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을 스테레오타입화 시킨다. DJ와 노무현에게 정치인으로서는 비본질적인 ‘불안’, ‘과격’, ‘고집’, ‘아집’, ‘독선’ 등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과연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이것은 수구세력, 수구신문의 집요한 폭탄 세례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수구세력의 중도세력 공격의 최전선은 정책비판이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구축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사회에 만연했다고 해서 진보세력이 쾌재를 부를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이 파병 강행 등에 의해 기인했다면 모를까 비본질적인 것들과 범벅이 되어 이루어진 것에 편승할 이유는 전혀 없다. 조선일보는 머지않아 노회찬에 대한 이미지 조작을 시도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도세력이 진보세력을 비판할 때도 이러한 방식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중도세력 중 많은 논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보세력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로 논의를 전개한다. “진보세력은 선명성 경쟁에 지나치게 매몰되었다, 대책 없는 비판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또한 진보세력에 대한 비본질적인 이미지를 형성/편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도세력의 열린 사고를 호소하는 논자가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 군사독재 세력이 볼 때에도 중도세력은 항상 이상적이고, 대책없는 비판만 있었고, 선명성 경쟁에 국익을 뒷전으로 한 것으로 보였다. 행정 권력과 의회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정치세력의 정책을 비현실적이라 치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요컨대, 명확하지 않은 두루뭉실한 이미지 형성/편승은 (1) 의 주장과 유사한 의미에서 발전적이지 않고 수구세력에 복무하는 길이 된다.
(3) 다음으로 행정수도 관련 정책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선점하고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진보세력의 주장은 미래 우리 사회의 실현태인 것이다. 이런 진보세력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감정적이든 이성적이든- 우리 사회의 미래를 공격하는 꼴이 된다. 개혁이 정체된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비난은 결국 과거로 가자는 수구세력의 힘만 강화하게 된다. 예컨대, 파병, 국가보안법, 노동문제 등에 관해 중도세력이 진보세력을 비판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것은 그냥 수구세력에 맡겨둬도 넘칠 판이다.
이 말이 진보세력을 비판에 관한 성역으로 남겨 놓자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우선 나 자신도 행정수도에 관해 민주노동당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듯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거시적 방향과 어긋난 것은 그것이 진보세력이든 중도세력이든 비판받아야 한다.
지금 민주노동당이 내놓은 정책의 대부분은 좌파적이라기보다는 서구적 의미에서는 여전히 우파적인 것들이다. 이런 것이 아닌 정확한 의미에서 좌파적 경제 정책에 관한 부문은 비판의 공간이 활짝 열려야 한다. 중도세력 중에서 진보세력의 경제정책에 대해 위에서 말한 (2) 이미지 공격이 아닌 실증적 비판을 하는 이는 최용식씨가 거의 유일하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라는 유시민 의원도 경제정책 비판이라기보다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조작된 이미지 형성/편승식의 비판이 많았다. 진보세력이 최용식씨와 건설적 경제 정책을 벌인다면 그것은 단지 중도세력, 진보세력 간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좀 더 생산적인 논의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 보여진다.
요컨대 이러한 지점을 제외한 곳에서의 진보세력 비판은 결국은 수구세력의 주장을 반복할 뿐이고 그들의 대리인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진보세력이 중도세력의 정책비판을 하는 것은- 물론 수구세력과 다른 방향일 경우에만- 오히려 중도세력에게 도움이 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올해 초의 글 ‘한국의 정치지형과 올바른 논객의 자세’로 대신한다.)
[관련기사] 뒤집기, 노무현만 까면 인터넷논객? 방향성 있는 비판해야(대자보, 2004. 2. 27)
(4) 이러한 세 가지 점을 넘어 좀 더 거시적인 의미에서 진보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사회전체의 진보성이 강화되고 수구세력이 위축되며 논쟁의 축이 소모적인 정쟁에서 본격적인 정책 대결로 넘어간다는 점을 의미한다. 중도세력은 차기 대선에서 진보세력으로의 표분산을 막기 위해 (ㄱ) 진보세력의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ㄴ) 2002년 대선 때와 같은 진보세력 표의 비판적 지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어느 것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결론부터 미리 이야기하면 중도세력은 진보세력이 아니라 수구세력에 대한 전면전을 지금부터 벌여야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도 그 일환이 되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중도세력이 수구세력에게 밀리는 것은 예정되어 있다. 진보세력에 대한 (1)무의미한 증오, (2)이미지 조작/비판, (3)소모적 정책 비판이 중도세력 스스로의 무덤이 파는 길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중도세력이 그러한 바보짓을 중단하는 것은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외길수순인 것이다. / 독자 논설위원
* 필자의 홈페이지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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