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과 27일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가련하다. 헌재여! 당신들은 성문헌법 수호자였거늘…'과 '무릇 사람위에 법없다 했거늘…그들은 왜 이런 바보짓을 했을까'라는 글이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이후의 반향은 실로 엄청나다.
적게는 천원에서 많게는 만원에 이르는 독자들의 자발적 원고료가 모여 2000만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안에 대한 지식인의 발언에 수많은 네티즌들이 열광적인 호응을 보내는 현상은 한국, 아니 더 나아가 세계 저널리즘사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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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결정이 반역사적임을 낱낱이 설파하는 도올 김용옥의 일갈은 양시 양비론에 숨어 보신에만 급급한 사이비 지식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오마이뉴스 10월 26일 기사 |
헌재의 결정 이후 도올이 탈고한 이 옥고(玉稿)는 말그대로 도올이 온몸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도올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운필의 노동으로 어깨근이 파열되어 피멍이 맺히도록 나의 육신이 고통스러워하는 이 깊은 새벽밤에" 온힘을 다해 출산한 글이다.
도올은 당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답게 헌재가 내린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결정의 역사적, 철학적, 논리적, 법리적 오류와 난점들을 낱낱이 지적함으로써 헌재의 결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치밀하게 논증해냈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면서, 대통령에게 한비(韓非)의 지혜를 따를 것을 권하고 있다. 이 대목은 도올의 육필로 직접 들어보자!
"그러나 내가 국민들에게 확언하는 것은 노무현은 우리 역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매우 단순한 도덕적 신념의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그 도덕적 신념이란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 민족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정치체제에서보다도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향유가 아이러니칼하게도 언론권력의 대중조작을 조장시키고, 불필요한 집회·시위를 가중시키며, 법권력의 남용과 타락, 행정관료들의 무능과 무사안일주의, 국가정보체계의 피상화, 대외정책의 불민함, 경제의 비활성화 등등의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면 우리 국민은 민주라는 레바이아탄의 근원적 파라독스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진시황이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만나고 싶어했던 희대의 사상가 한비(韓非)는 치자의 무위에는 반드시 두 개의 칼자루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이병(二柄)이라 불렀다. 이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상(賞)과 벌(罰)이다. 상과 벌이라는 칼자루만 확실하게 쥐고 있다 할지라도 나머지는 무위적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비의 지혜를 권고하고 싶다. 이제 통치 2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낭비나 시행착오, 초보적 학습과정을 거쳐서는 아니된다. 자신의 도덕성에 엄격한 만큼 국민에게도 치열한 규율을 요구해야 한다. 노무현은 상을 줄 줄도 모르고 벌을 줄 줄도 모른다. 이것이 국민 대다수의 불만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국민 대다수가 바라는 것은 도덕적 결백성의 지속적인 입증이 아니라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확실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사용해달라는 것이다. 도덕적 무위 속에 표류하고 있는 국정에 보다 프로펫셔날한 기준을 설정해달라는 것이다. 개혁의 궁극목표는 제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이제 우리 국민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가치를 자율과 규율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어려운 작업들을 감행해야 한다. 헌재의 재판관처럼 힘이 있다고, 힘을 마구 쓸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해서, 총체적 국가비전에 대한 저울질이 없이 그 힘을 사용하는 방자한 행동을 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이제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숙이란 자기 자유를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능력이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사건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깊이있는 사유와 이를 실어나르는 문체의 단단함 등은 도올의 특별기고를 근래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명문으로 자리매김케 했다.
도올의 특별 기고가 더욱 값지게 여겨지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명확히 표현하는 태도 때문이다. 이러한 도올의 자세는 이번 헌재의 결정을 두고 양비(兩非)와 양시(兩是)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지식인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도올의 글을 읽는 중에 불현 듯 독일의 대철학자 하이데거가 생각났다. 주지하다시피 하이데거는 20세기 최대의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그런 대철학자가 나치즘이라는 문명의 야만에 참여한 역사적 사실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하이데거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인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에 취임하여 잠시 총장직을 수행한다. 그가 다른 우파 지식인들처럼 특별히 나치에 협력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대학총장 취임 및 총장직 수행은 역사적 과오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나치가 패망한 후에도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참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이데거는 어째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은 것일까?
하이데거가 자신의 명리(名利)를 쫓아 나치스에 부역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행적은 하이데거 사상과 나치운동과의 근친성(近親性)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하이데거는 근대사회를 기술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로 보고 전체주의를 그 대표적인 표현양식으로 보았다.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볼세비즘이나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모두를 전체주의로 간주하였다. 그는 나치즘에서 유럽을 구할 빛을, 기술문명을 극복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물론 후기에는 자신의 생각을 일정부분 수정하여 현실의 나치즘과 진리로서의 나치즘을 구별하지만 이는 왠지 궁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도올의 글과 하이데거의 행적을 보면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지식인은 혼자서 고독한 사유를 즐기는 자이기에 이상주의에 경도되기 쉽고 전체주의를 지향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범주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물론 건국 이후 한국사회의 대다수 지식인들은 하이데거처럼 자신만의 진리의 별을 따라서 행동했다기 보다는 명리를 탐해서 움직인 것이 사실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과 이를 옹호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과거 행적이 이를 방증한다.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기실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방기한데서 비롯된 것이 상당수이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말하지 않고 일쑤 그른 것을 옳다고 말한 지식인들의 잘못말이다.
폭압과 강권이 지배하던 야만의 시대는 가고 시민들의 동의(同意)를 얻는 것이 중요하게 된 지금 지식인들의 책무는 참으로 막중하다. 지식권력이 다른 유형의 권력들에게 정당성과 합리성을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식권력을 행사하는 지식인들이 사회의 발전을 좌우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됨의 가장 큰 책무는 무엇보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석연히 가리고 이를 시민들에게 가감없이 알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도올의 특별기고에 대한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환대는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참된 지식인의 출현에 목말라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언행을 일삼는 지식기술자들 말고, 도올과 같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을 간절이 기다리고 있다. /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