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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언론 인터넷 몰라, 우리는 이기는 싸움만 해"
기존언론 '시민기자제' 수용못해, '선택과 집중', '열린진보' 차별화로 승부
 
홍성관   기사입력  2004/04/14 [01:20]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는 13일 서울대에서 열린 강연에서 인터넷 매체를 공격하고 폄하하는 보수 언론들을 질타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     ©브레이크뉴스
88년부터 99년까지 월간 <말>지에서 근무한 바 있는 오 대표는 기자의 길을 택한 배경에 대해 "처음에는 농촌 사람들의 한을 제대로 대변하기 위해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오 대표 본인이 지리산 자락의 시골 출신이었기에)"면서,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 전두환 정권치하에서 있는 사실 자체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시대를 인식하면서 소설은 나중에 써도 되겠다 싶었고 대신 유인물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오 대표가 3학년이었을 즈음 학원 자율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학내가 유인물의 홍수를 이뤘고, 이에 차별성을 두기 위해 고등학생들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유인물을 작성하다가 오 대표는 국가보안법으로 1년간의 징역을 살았다. 출소 후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연스레 오 대표는 기자의 길을 택했으나, 징역살이를 했다는 사실 때문에 어지간한 언론사에는 입사가 불가능했고, 그리하여 오 대표가 택한 곳이 당시 언론자유화 투쟁을 하다 해직된 기자들이 모여서 만든 월간 <말>이었다.

당시 <말>지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취재를 하는 데에도 고충이 컸다고 한다. 오 대표는 "어느 곳에 취재하러 가서 <말>지에서 왔다고 하면, 경마잡지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고, 어느 시골에 가면 <마을>지로 알아듣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말>지에 대한 오 대표의 자부심은 대단해 보인다. 그는 <말>지를 모든 새로운 대안 매체의 모태라고 규정하면서, 한겨레와 같은 종이 대안매체나 오마이뉴스 같은 인터넷 대안매체가 <말>에서 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88년 1월부터 99년 12월 31일까지 근무하는 동안 매월 자신의 기사가 실렸던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 대표는 "어느 순간부터 이게 아니다. 여기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겠구나" 싶었다고 한다. 94, 5년경부터 우리 사회의 리듬이 빨라졌는데, 월간지가 이런 리듬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또 언론의 보혁구조가 8 : 2로 치중되어 있어 이를 5:5로 재설정하기 위한 새로운 매체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94년 그가 <말>지 커버스토리로 쓴 노근리 관련 기사가 당시에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반면, 99년 AP통신이 보도하자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실은 오 대표의 변화를 굳힌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 대표는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컨셉으로 오마이뉴스를 기획하게 되었다. 세계 어느 언론과도 차별화에 성공한 모토라고 오 대표 스스로 자신하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컨셉은 지금까지 소수의 보수 언론사가 보유한 직업기자들에 의해  뉴스 생산자와 독자가 일방향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던 한국 언론 지형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오 대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다수가 참여하는 신문을 만들어 볼 수 없을까"라는 고민이 오마이뉴스의 출발이었다고 말했다.

▲강연모습     ©브레이크뉴스

인터넷에 문외한이었던 오 대표는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를 찾아가 호프집에서 술값을 수강료 삼아 도움을 요청했고, "성공하는 사이트라면 홍보비를 단 한 푼 들이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독자들이 홍보대사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720명 정도로 시작한 시민기자의 숫자는 어느덧 3만 명을 육박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라는 제호에 대해서는 "처음에 김어준 총수에게 조언을 구하자, (오 대표가) 심층적인 기사를 잘 쓰므로 '뽕을 빼주마'라는 제호를 추천하더라"면서, "하지만 새로이 만들려는 사이트의 특성에는 핀트가 안 맞아 한 달에 걸쳐 고심하다가, 2000년 당시 코메디언 김국진의 유행어 '오 마이 갓'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밝혔다. 오 대표는 "Ohmynews에서 Oh는 오연호의 Oh가 아니라, 감탄사 Oh!를 뜻한다"면서, " 뉴스는 기자를 현장으로 뛰게 하고, 더 좋은 뉴스는 기자의 가슴까지 뛰게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의 감탄사 Oh!를 지칭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my news'도 독자가 제보자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자가 되는 의미에서 정한 이름이다.

오 대표는 기자와 기사의 개념이 달라졌다면서, "기자는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넓은 의미의 개념"이며, "기사도 그간의 공식을 파괴하고 보다 생동감 있고, 따뜻하게, 그러나 정확한 방향으로 의미가 바뀌고 있다"고 피력했다. 또 "종이신문은 매체의 특성상(시공간의 제약) 직업기자가 필요했지만, 인터넷에서는 시공간의 제약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없다"고 말했다. 오 대표는 취재방식 역시 변했다면서 "이전에는 출입기자실에서 기사를 판단했지만, 그런 독점성이 많이 깨졌다"고 설명했다. 직업기자들이 가지고 있는 '표준'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 대표는 앞으로 종이신문이 쇠퇴하기만 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떤 날은 오마이뉴스의 영향력이 있구나 싶다가도, 어떤 날에는 방송, 종이신문의 영향력이 여전히 세구나 한다"면서도, "그렇지만 인터넷 미디어의 영향력이 상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오 대표는 이런 인터넷 미디어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언론 지형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것은 ‘수용자(독자)의 이중성’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즉 시민기자로서 참여하는 능동성과 기존 매체의 편리함을 받아들이는 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 대표는 언론이 가지고 있는 '표준'이 직업기자들이 오랜 시간동안 수용자와의 합의에 의해 형성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표준방안에 대한 수용이 더디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터넷 공간에 욕설이 난무하다는 식으로 종이신문들이 공격을 가하고 폄하하는 점에 대해서는 “공간이 무한대인 인터넷 공간의 특성을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진을 찍어보면 차와 지나가는 사람들과 빌딩들만 보인다. 이것이 종이신문의 특성이다. 그러나 분명히 광화문에는 하수가 흐른다. 이것을 다 받아 안는 것이 인터넷 공간이다.”라는 예를 들어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못박았다.

강의에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 오 대표는 “만약 돈 있고 인력있는 언론사가 시민기자제를 운영하면 오마이뉴스가 망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면서, “하지만 그런 언론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시민기자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기존 언론사가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데, 내가 종이신문사 사장이어도 그랬을 것이다. 컨셉이 다르다”고 말했다.

또 오마이뉴스의 차별성에 대해서 “우리는 선택과 집중을 한다. 어느 매체보다 우리의 수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다. 그러면서 논조는 열린 진보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대안매체의 가능성이 어땠을 것 같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인터넷이 없었으면 대안매체를 만들었더라도 실패하거나, 잘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인터넷이기 때문에 (오마이뉴스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답했다.

70%나 되는 광고의존 비율은 기존 매체가 갖고 있는 문제점과 비슷할 수 있는데, 역작용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오 대표는 “바람직한 비율은 아니다. 인터넷을 공짜라고 보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그래서 그나마 자발적 유료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현 단계로는 아직 역작용은 없다”고 답변했다.

한편 이날 강연은 이 학교 언론정보학과의 ‘미디어테크놀로지의 역사(교수 강명구)’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고, 200여명의 학생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울 만큼 이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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