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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색 매화라니! 여왕이 나셨다
[정문순 칼럼] 전제군주 박근혜 시대, 시민은 없고 신민만 있나
 
정문순   기사입력  2013/03/06 [00:55]
전통적으로 한국 대통령의 상징 문장은 봉황 한 쌍이 마주보는 대칭 무늬이다. 고 육영수 씨의 서거가 있던 1974년 광복절, 박정희가 경축사를 읽다가 총탄을 피한 곳도 방탄 장치가 된 봉황 무늬 연단이었다. 이런 청와대의 전통이 잠시나마 깨어진 것은 17대 대통령 취임식 때였다.

취임식 즈음 봉황 문장이 권위적이라는 말이 청와대에서 슬슬 나오더니, 당일 봉황은 오간데 없고 나팔, 항아리, 횃불의 낯선 문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경에서, 기드온이 이끈 무리들이 항아리에 횃불을 숨기고 나팔 불며 이교도와 싸운 이야기로 보는 해석이 유력하다. 새 대통령의 취임식 날 머리에 떠오른 것은 5년 전 수모를 당한 영물의 안부였다. 특정 종교에 치우친 분이 아니라면 봉황이 돌아왔을 테니 다행이구나 싶다가도, 봉황의 상징이 왕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봉황과 신임 대통령의 조합이 심상찮다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취임식 때 복장을 보면 박 대통령은 무임승차 공주 인생의 종결판인 여왕의 등극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조촐한 한복이 아닌 두루마기 차림은 겨울이니 그렇다 치고, 붉은 바탕색과 매화 무늬만큼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전제 군주의 상징물인 매화를 쓴 것이 노골적이라면 붉은 색을 쓴 것은 교묘하다고 할 수 있다. 붉은 색도 왕가의 표상이다. 조선은 황제국이 아니니 천자의 표상인 노란 색을 쓸 수 없어서 왕은 그 아래 격인 붉은 색 옷을 입었다. 자연에서 붉은 염료를 구하기가 무척 어려워 희소가치가 높은 탓도 있었다. 조선 왕도 못써 본 찬란한 금빛은 새 여왕이 걸친 두루마기의 매화에서 빛을 발했다.

복장과 속마음이 따로 놀지 않듯 여왕은 언행도 군주에 걸맞은 수준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본디 왕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 하늘을 걸고 맹세해도 마음이 바뀌면 그만이다. 임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물러나라고 다그치는 백성도 없다. 박 대통령이 상대 후보보다 앞서거나 눈에 들어오는 복지 공약으로 대선에서 재미를 보더니 이제는 손도 써보지 않고 입을 닦아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노인들을 불러놓고 충효를 가르치던 시절 익힌 대로 국민을 발 아래 백성쯤으로 보는 사고의 일환이다.

박 정권 인사들이, 국민이 오해했다고 설레발치는 4대 중증 질환의 의료비 전액 지원은 박 대통령이 TV토론회 당시 자기 입으로 철석같이 손가락 걸었던 약속이다. 기초연금으로 이름을 바꾼 기초노령연금의 경우도 대선 때는 모든 노인들에게 조건 없이 월 20만원을 주겠다고 하더니 난데없이 국민연금과 연동시켰다. 국민연금 가입 여부와 소득을 기준으로 기초연금을 차등 지급하겠다는 말은 대선 당시 어디에서도 나온 적이 없다.

여왕이 그나마 공약을 그대로 지킨 건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소득 하위 70%의 노인에게만 한정되고 있다. 노인들은 절반 가량이 빈곤층이니 그녀의 공약에 뒤통수를 맞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지금 열심히 국민연금을 납부하고 있는, 장차 노인이 될 장년층과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만 죽을 맛이다.

공약 파기의 와중에도 ‘집토끼’인 노인들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여왕의 눈물겨운 모습을 보면, 무슨 욕을 들어먹든 포항·기독교·고려대 출신만 챙겼던 어떤 분과 판박이로 닮았다. 반값 등록금 공약을 떡하니 내놓고도 선거 때 무슨 말인들 못하겠냐고 한 MB정권의 표리부동 행태와도 쌍둥이처럼 흡사하다.

국민들은 포스트 이명박 정권에게 어디까지나 공약을 보고 표를 주었다. 공약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며, 지킬 생각이 없다면 정권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신뢰와 원칙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대통령이라면, 정권 획득의 근간을 제 손으로 허물 경우 대통령 자리에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불행히도, 박 정권의 공약 파기에 대해 무리를 해서라도 공약을 지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도 있는 듯하다. 국민들이 착해빠졌으니 사탕발림 공약으로 민심을 현혹하고 권력을 장악한 후 표변하는 권력자가 나올 수 있고, 대통령이 전제 군주 짓을 하더라도 제어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언제부터 대한민국 시민은 일개 신민으로 추락했나. 여왕 전하 만세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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