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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횡포'에서 '자본의 폭력' 시대의 삶
[논단] ‘이랜드 투쟁’의 의미, 비정규 악법폐지가 사회대타협의 지름길
 
각골명심   기사입력  2007/08/16 [15:06]
이랜드, 무엇을 노리나

장기화 되고 있는 이랜드 비정규직 사태가 이랜드 사측의 뉴코아 6개 점포에 대한 직장폐쇄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직장폐쇄 조치는 현 노동법상 사업주가 쟁의상태에 있는 사업장으로부터 근로자들을 축출하고, 업무의 정상적 수행을 방해함으로써 적법하게 임금 지급을 면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적법한 방어수단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이에 대한 정부와 이랜드 노조측의 대응이 주목된다.

비록 이랜드 측이 "노조 측이 매장을 상대로 한 시위와 점거를 계속 시도하고 있어 직원과 입점업주 및 협력업체 보호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측이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노림수는 분명한 것 같다.

즉 그 이면에는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이랜드 문제를 시금석으로 삼아 문제의 근인이 되고 있는 '비정규직법'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문제를 사회이슈화 하고 있는데 대하여 이번 문제를 단지 개별노조의 문제로 국한시킨 후, 홈에버와 뉴코아 문제를 서로 분리하여 당근과 채찍을 병행함으로써 사회적 지탄으로 부터 한발짝 비껴나는 동시에 개별노조원들에 대한 경제적 압박과 단결을 와해시키려는 고도의 전략으로 보인다.

부연하자면 지난 3월 이후 외주화 반대 등의 사유로 계약이 만료·해지된 비정규직 계산원 80명을 재고용한다는 당근과 함께 직장폐쇄로 매장에 대한 파업참가 노조원들의 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후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직원들로서 정상 영업은 해나가면서 기업 손실은 최대한 줄이는 한편 파업참가 노조원들에 대한 임금지급은 합법적으로 피함으로서 곧 이들에 대한 경제적 압박수위를 최대한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비정한 채찍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법의 조건위에서 정부가 법의 심판자 노릇이나 하려는 것은 이러한 비정규직 악법을 만들어 시행한 주재자로서 지극히 무책임한 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재와 자본폭력의 본질은 결코 다르지 않아

나는 이 대목에서 한국사회가 지난 독재시절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합법을 가장한 국가의 공권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영어(囹圄)에 갖힌 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러한 역사의 패악에 맞서 자신 한몸을 바쳐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숭고한 희생자들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단지 우리가 뒤늦게 '민주화 인사'라는 그럴듯한 말로서 그들의 송두리째 망가진 삶 전체를 결코 보상할 수 없듯이 비정규직 사태로 인해 인신구속된 사람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날의 '독재횡포'가 오늘날에는 '자본횡포'로 바뀌었을 뿐이다.

▲참가자들은 이랜드 파업은 정당하다며 정부의 공권력 투입을 강하게 비판했다.     ©대자보

그리고 이러한 '자본의 횡포'를 가장 자본의 편에서 잘 구현해 낸 정부가 바로 '참여정부'다. 나는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정을 꼽으라면 바로 이 '비정규직 문제'와 '한미 FTA 문제'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두 문제가 가진 공통점은 공히 '자본의 가치를 모든 가치의 상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동시에 한국사회가 처한 모든 현실적 문제와 미래 문제들을 고스란히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장려법이 된 비정규직법

법이란 '하나의 규범을 강제로 사회법칙화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법'을 성급히 제도화 하는 순간, 이 법은 기업들에 있어 일석다조의 '비정규직 장려법'으로 둔갑할 수밖에 없었다. 즉 그때까지 그나마 기업이 도덕적 측면에서 조금이나마 사회여론의 눈치를 봐야했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식을 완전히 무시해도 하등의 지장이 없는, 게다가 법의 자발적 보호까지 담보된 사회법칙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세계에서 한국만큼 전체노동인구에서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나라가 없다. 그것도 불과 4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보였다는 것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이 법이 원래 취지와 목적이 어떠하였든간에 단지 이 법의 효과가 '비정규직 장려법'으로서만 활발하게 기능해왔다는 것을 잘 반증해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과연 노무현 정부의 애초 주장처럼 '비정규직법'이 노동을 유연화함으로써 기업과 외국인 투자를 증가시켜 고용창출과 국가경제를 활성화 시켰을까?

전혀 아니다. 여기서 일일이 구체적 수치를 들이댈 것도 없이 지난 4년간 경제전문가들뿐 아니라 국민의 체감경기에서 수없이 지적하고 뼈져리게 느껴왔다시피 '고용없는 성장'의 악순환은 한국사회의 결혼과 출산문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급격한 사회해체와 황폐화를 불러왔을 뿐이다. 또한 이 제도하에서도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업이윤창출'과 '노동비용절감' 사이의 상관관계가 그만큼 밀접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즉 경영의 측면에서 소위 '인건비 따먹기'가 결코 기업의 성공에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표면상 이 법은 단지 소수의 대기업에만 유리한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이로 인해 고용의 9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들까지 매우 직접적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계륵과 같다는 점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즉 아무리 들여다 봐도 장기적으로 이 법으로 인해 노사 어느쪽도 실질적 승자가 되기는 불가능하며 단지 빈껍데기 뿐인 자본의 승리로 귀결될 뿐이라는 점에서 노동시장 전체를 급속히 파괴한 주범인 이 법의 심각성에 우리 사회 모두의 관심과 결단을 내려야할 시점인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정부와 기업들, 메이저 언론들은 틈만나면 노사분규를 예로 들면서 마치 한국경제나 한국기업들이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인건비 부담때문에 번번이 성장에 심각한 발목이라도 잡혀있다는 듯이 온갖 호들갑을 떨어왔던 것이다.

악법폐지가 사회대타협의 지름길

자본주의체제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자본주의를 택할 것이냐의 문제는 한 사회를 지탱해가고 나아가 다수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지속성장해 가는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속성장의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사회의 산업체계와 노동의 상관관계에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비단 한국사회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본주의를 택하고 있는 선진국들에 있어 오늘날 비정규직의 비율은 대략 전체노동인구의 15%~20% 사이에 머물러 있고 이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본질적 문제로 인해 충분히 갈등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얼마든지 조정과 타협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들이기도 하다.

▲이랜드 그룹의 부도덕 경영을 강하게 비판한 그림판     ©대자보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사회는 노무현정부의 '자본에 대한 성급한 백기투항'으로 인해 '사회대타협'의 기회마저 놓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해도 늦었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빠른 기회라고 했다. 이 잘못된 법에 대하여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결단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끌어안고 통일을 말하는 것이 심각한 넌센스 이듯이 비정규직법을 끌어안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얘기하는것 또한 한편의 블랙코메디다.

악법은 보완을 하고 덧칠을 할 문제가 결코 아니다. 존재만으로 이미 충분한 악으로 기능함을 여실히 증명한 이러한 악법들에 대해 이제 우리는 좀 더 단호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며 사회대타협은 그 백지위에 우리가 채워가야할 공동체적 이해와 꿈의 알곡이 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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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8/16 [15:0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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