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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첫날밤 호사, 모기장에 맛난 음식까지...
[버마 난민촌을 가다 7] 버마 민주화의 유일한 희망은 "아웅산 수지"
 
최방식   기사입력  2006/10/09 [00:25]
조금 있자니 13섹션의 주요 인물과 주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원로격인 노인, 그리고 섹션장 아래서 의료, 보급 등을 책임지는 이들이었다. 가장 큰 '희망'을 물으니 하나같이 '아웅산 수지'였다. 현 탄쉐 군부정권이 1990년 총선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장투쟁이나 집회시위를 통한 정권교체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 투쟁과 폭정에 지친 모습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벽 한쪽에 무장투쟁시절 전투 중 찍었다는 낡은 사진하나가 걸려있다.
 
민주화의 유일한 희망은 "아웅산 수지"
 
마을과 난민들의 삶이 궁금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금새 열댓명의 꼬마들이 몰려든다. 주위를 뱅뱅 맴돌며 웃고 종알거리지만 알아들을 길이 없다. 그 중 낯익은 여자애가 있어 말을 붙였다. 우리가 짐을 푼 집의 딸이었다. 영어로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뭐라고 대답한다. 영어 아냐니까 학교에서 배운단다. 몇 번을 더 듣고서야 "리 나 웨이"(7)임을 확인했다. 발음이 쉽지 않아 적당히 따라하니 꼬마들이 배꼽을 잡는다. 자기들이 선생님이 되어 발음을 교정하길 수차례. 간신히 "됐다"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다른 꼬마들에게도 이름을 물으니 대답을 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멜라웅 캠프 13구역 길거리에서 친구가 된 꼬마들. 조국과 부모, 그리고 자신들의 처지를 모른채 밝게 뛰노는 이들을 보며 민주주의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다시 한번 절감했다.     © 최방식
 
그렇게 꼬마들과 친해졌다. 하나둘 손도 잡고 사진도 찍었다. 어찌 그리 예쁜지 모르겠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얀 연지곤지 같은 걸 얼굴에 바른 다섯 살배기 아이의 조막손을 꽉 잡고 동네 구경에 나섰다. 열댓명이 따라다니며 재잘대니 난민촌 13구역이 제법 시끌벅적하다. 아이들과의 골목길 구경도 잠시, 장대비에 그만둬야 했다. 하늘도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쉬워하는 아이들과 손을 흔들며 헤어진 뒤 리 나 웨이를 데리고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새 얼굴들이 거실 가득 앉아있다. 하나둘 인사를 하고 앉으니 씻으란다. 난민촌에 샤워시설이 있으랴 생각했다. 집 뒤쪽에서 한 아이가 바가지로 물을 퍼 씻는 모습을 봤던 지라 날도 어두워지기 전에 씻기가 좀 뭐해 머뭇거리는데 샤워실이 있단다.
 
▲친구가 된 아이들과 돌아본 멜라웅 캠프 13구역의 골목길. 석양녘인데 잠시 비가 그쳐 집에 있던 이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와 이방인을 반긴다.     © 최방식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꼬마들과 친해지고
 
빗속에 집 뒤로 10여미터를 가니 자그마한 헛간 하나가 나온다. 화장실 겸 샤워실이다. 대나무로 벽을 막았는데 틈새하나 없이 완벽하다. 한 가운데 30센티미터 쯤 높여 변기대가 있고 한 쪽 벽에 수도꼭지가 달려있다. 이들은 휴지를 쓰지 않는다. 처음엔 좀 의아했는데, 생각해보니 물자를 아끼고 환경을 지키는 데는 훨씬 좋아 보인다. 물로 닦아내니 위생도 문제없어 보인다. 요즘 비데문화를 생각하니 어찌 보면 이들의 습성이 더 선진적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열대 계곡인데다 우기여서 그런지 물은 별 걱정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13구역의 원로와 주민들과 담소하다 니 나 웨이의 집 벽에서 발견한 한 장의 낡은 사진. '8888민중항쟁' 이후 독재정권과 무장투쟁을 벌이던 학생군들의 모습.     © 최방식

날이 어두워졌다. 몸을 씻고 나니 허기를 느낀다. 밥을 사 먹을 데도 없을 테고 난민 가족에게 밥 좀 달라고 하기도 뭐하다는 생각에 고민하고 있는데 주인이 다른 방(다 터져 있어 구분도 되지 않을 정도지만 벽의 반절 정도는 칸마다 대나무로 막아 놨다)으로 와 식사하란다. 얼마나 반갑던지...

각자에게 밥 한 그릇씩이 주어지고, 가운데 고기 스프 한 대접, 버마 전통간장 한 종지, 풋오이 썬 것, 그리고 계란 프라이 세 개가 나왔다. 천직씨가 손님대접을 하려고 계란 프라이를 한 게 틀림없다고 귀띔한다. 리 나 웨이가 계란 사오는 걸 봤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프라이를 남겨두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할 줄 알고서 말이다. 그런데 웬걸, 예상이 빗나갔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아이 셋이 몇 개 안남은 오이를 다투어 집어 든다. 계란 프라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난민캠프의 첫 밤을 그렇게 보냈다. 라 한은 그 집 주인인 친구와 새벽 서너시까지 말벗을 했다. 우리는 피곤했던지 자정이 조금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서도 귀빈 대접을 받았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모기장을 쳐준다. 자기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자면서 말이다. 열대 정글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덮기는 했지만 바닥 대나무 발 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편히 잤다.
 
종순 형 해장술 취해 "니네들끼리 가라"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나니 모여든 주민들이 '메이드 인 캠프' 위스키를 구해왔다. 쌀로 만든 위스키로 제법 좋은 술이었다. 헤어지는 게 아쉬웠는지 위스키를 들고와 아침부터 한잔씩 권해 일행은 해장술을 해야했다.     © 최방식
 
늦잠을 잔 모양이다. 벌써 마을사람들 하나 둘 모여든다. 얼른 일어나 세수하고 오니 아침을 먹으란다. 스프에 끼니를 때우고 나니 한 남자가 멀건 액체가 담긴 비닐봉투 하나를 들고 올라온다. 그리곤 한 잔 가득 따르더니 권한다. '정글 위스키'란다. 쌀이나 바나나를 발효해 만든 술이었다. '메이드 인 캠프' 쌀 위스키인 것이다.

한 입 음미해보니 치앙마이의 한 음식점에서 마셨던 그 맛이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기가 뭐해 사양했는데, 종순 형이 몇 잔 받았다. 맛이 괜찮다며 그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더니 좀 취기가 오른 모양이다. 봉지가 바닥나자 한 남자가 다시 뛰어가 한 봉지 더 가져온다. 손님이 좋아하는 걸 보고 그리 한 것이었다. 밀주 한 봉지에 20바트란다. 우리 돈으로 5백 원쯤 하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주는 대로 받아먹던 종순 형 기분 좋게 취했는지 한마디 한다. "니네들끼리 가라." <다음 호 계속>
 
최방식(국제전문기자, 본지 편집위원) sbchoice@yahoo.com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는 지난 7월 16일부터 일주일간 태국과 버마 국경지대를 다녀왔다. 군부정권의 폭정을 피해 40여만명의 버마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양국 사람들이 그냥 뒤섞여 사는 여느 국경 도시와는 처지가 사뭇 다르다.
특히 9개 정글 속 캠프에 모여 사는 30여만명의 버마인들은 수용소 포로와 같은 삶을 강요받고 있다. 버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했거나 소수인종이라는 이유로 폭정을 피해 국경을 넘었건만 태국정부마저 이들을 범죄인 취급하며 정글 속에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어서 그렇다.
48년 독립과 소수인종 탄압, 45년여의 군부독재, '버마의 5&18'이랄 수 있는 '8888민중항쟁'과 정글 속 학생들의 무장투쟁, 90년 총선과 10년 넘게 거듭되는 아웅산 수지여사의 가택연금 및 세계 속의 NLD, 그리고 버마인들의 오랜 침묵과 저항을 이 번 기행을 통해 다뤄보려 한다. /편집자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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