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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개혁당원이 본 열린당 전당대회
개혁도 실용도 아닌 말잔치, 유시민 송영길보다 김두관 김원웅이 낫다
 
숨인씨   기사입력  2005/03/28 [02:40]
나는 김대중 정부 초기부터 노무현을 진지하게 대통령감으로 생각했다. 노사모에서 바지런하게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대통령 선거를 두달 앞두고 창당한 개혁당에 원서를 냈다.
 
정몽준이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던 투표전야엔 밤새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불법살포된 유인물이 있는지 살폈다. 대선 정국이 우여곡절끝의 승리로 귀결되자 환호했고, 설렘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나는 2년여간 정치참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옛 친구들의 지난 2년

'옛 친구'들의 행적부터 되짚어야겠다. 옛 친구들은 개혁당과 신당을 준비하는 본부, '국민의힘' 등에서 움직였다. 나는 그들에게 눈부신 활약을 바랐지만, 돌아온 것은 눈꼴시림이었다.

개혁당이나 개혁신당을 추진하던 세력은 지혜도 뚝심도 없이 갈팡질팡했다. 유시민은 "백년갈 정당"임을 표방하면서도 민주당에 기웃거렸고, 그가 보궐선거에 출마할 때도 개혁당은 독자적으로 싸울 것인가, 민주당과의 연합을 현실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라는 갈림길에서 뒤늦게야, 그것도 애초의 호언이 뒤집힌 채로 후자를 택했다. 민주당 신주류가 한도 없이 신당출범을 미룬 탓도 있겠지만, 개혁당은 정계개편 과정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개혁당이 전술적으로라도 당대당 통합을 요구하는 길을 버리고 해체를 결정한 뒤 열린우리당에 합류하던 날, 나는 며칠동안 입맛이 썼다.

개혁당이 열망으로 출발해 실망으로 끝났다면, 내게 '국민의힘'은 우려감만을 안기는, 차라리 없었으면 했던 단체였다. 노무현의 팬클럽에서 생활정치의 네트워크로 변신을 꾀하고자 했다는 '국민의힘'은 노사모 출신들이 많다는 점에서나 대통령 노무현을 거스르지 못하는 성향에서나 새롭지도 진정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정치인들이 그들의 구린 구석을 해명하게끔 다그쳤을 땐 나았다. 나는 국민의힘이 총선후보 지지운동에 들어갔을 때 종일 넌더리를 냈다. 그들이 소위 '보석 후보'의 명단에 열린우리당 후보의 이름 사이사이에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후보의 이름을 넣은 것은 구역질나는 짓이었다. 그 단체의 대표가 열린우리당의 총선 후보로 나서 당선된 것은 차라리 희극이었고 말이다. 지지운동을 벌일 거라면 열린우리당내에 쳐들어가서 공천 및 낙천운동을 하는 편이 옳았다.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 참여정부의 희한한 '개혁 드라이브'가 익숙해지던 즈음에 나는 옛 친구들과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기로 했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도 접었다. 바야흐로 그 정당에서 옛 친구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참정연’이라는 이름으로, ‘국참연’이라는 이름으로. 싸움은 이리저리 뒤엉켰고, 옛 친구들은 종전의 적뿐만 아니라 자기네들끼리도 험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실용vs.개혁’, ‘친유vs.반유’... 쇼는 계속된다

유시민이 민주당 일반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면서까지 개혁신당론을 설파했을 때나, 끝내 개혁당을 해체하고 열린우리당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가 이렇게까지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그는 선거기간 이전부터 같은 참여정치연구회 소속이라는 김원웅과 마찰을 빚었고, 김현미 등의 공격을 받으며 송영길과 정면충돌했으며, 당비체납으로 시선을 집중시켰고, 김영춘의 타박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상위권에 랭크되어 상임위원이 아닌 당의장까지 노리고 있다. 그는 정동영계를 적대시하는 동시에 김근태계와 연대하겠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2007년 대통령선거까지 파장이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유시민은 흐지부지 끝날 듯하던 전당대회에 상당한 관객을 모은 장본인이다.

열린우리당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실용 대개혁, 정동영 대김근태(혹은 당권파 대재야파) 등의 갈등을 겪었다. 이에 친유시민이냐, 반유시민이냐, 를 두고 벌어지는 다툼은 판을 점입가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당내의 정파대립은 불가피하고, 때로는 장려할 만한 대립이지만, 대립의 여지나 필연성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는 이념과 정책에 따른 경쟁을 뒷전으로 돌리는 악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서프라이즈나 데일리서프를 비롯한 친노 매체는 물론 포털사이트에서도 개혁적 네티즌은 개혁파/재야파/친유시민을 고르는 것이 옳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도토리 키재기가 유의미하다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으나, 정말로 개혁파/재야파/친유시민이 실용파/당권파/반유시민 진영의 도덕성을 압도하고 있는가. 문희상, 한명숙, 송영길도 어찌 되었건 국가보안법 폐지론자다. 240시간 의총에 대해 송영길은 단지 그 당시에 알리바이를 만들려는 수작일 뿐이라고 폄훼했다.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크로스보팅이니 전원위원회니 하는 전술을 이리저리 부려온 유시민이 송영길보다 더 개혁적인 인사라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이라크파병에 앞장 선 장영달이 다른 386 의원들과 함께 대미비판성명을 발표한 송영길보다 더 지지할 만한가. 개혁적인 인사를 뽑으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하지만, 문희상도 김대중정부가 나아갈 노선을 제시했고 왕당파격인 박지원에게 밀려나버린 왕년의 개혁파 아니었던가.
 
예선탈락한 임종인 의원이 출마선언에 담은 한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개혁은 말로하는 주장이 아니라 어떤 사안에 어떤 행보를 보여왔는가로 봐야 한다. 경제분배정책에서 노동자 농민을 위해 투표하지 않고, 용산기지 이전같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 해결에 동참하지 않고, 이라크 파병에 찬성한 분들은 개혁이라는 부분에서 저와 차이가 있다”(노사모나 국참연이 임종인을 발벗고 돕지 않는 것은 그들의 진정성이 고갈했다는 방증이다.)

그래도 나는 이번 그들의 전당대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투닥거림을 구경하려는 유혹이 참견을 충동질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미련을 못 버리는 바람에 내 일처럼 여겨져서도 아니다. 나는 한국인이고, 그 당은 한국의 집권당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반대하는 이유

내가 만일 열린우리당원이고 전당대회에 참여할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래서 두표를 행사하게 된다면? 왕년의 같은 당이었던 유시민? 유시민이 정치권에서 달변을 과시한 것 이외에 특별히 긍정적인 기억이 없다. TV토론하라고 국회의원 뽑아주지는 않았다. 추잡스러운 선동으로 진보정당 표를 억지로 앗아오라고(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유시민의 발언을 거꾸로 따르면 열린우리당 지지자 역시 민주노동당으로 금세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내세운 것이 아니다. 콜레라와 페스트 운운하며 참여정부의 이라크파병을 합리화하라고 밀어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날 유시민의 컨텐츠는 오로지 당내 민주주의다. 그런 유시민에게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을 권한다. ‘아래로부터의 힘’이 세상을 개선할지 망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러시아 볼셰비키도 참여민주주의로 충만한 분방한 조직이었다. 기껏 유시민식 당내민주주의는 정부여당의 우경화를 감싸는 방패막이, ‘민주적 보수화’의 도구에 불과한가(참고로 노무현은 룰라가 아니고, 열린우리당은 원래 진보적이었다가 현실에 맞춰 보수화한 게 아니다).

80년대의 아들 송영길? 한때 나를 비롯해 정치개혁을 열망한 유권자와 네티즌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다시 떠올려야 할 것은 그가 학교선후배 사이란답시고 김우중에게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기억이다. 해당 학교에 적(籍)과 동시에 적(敵)을 둔 나로서는 특별히 더 욕지기 나는 짓이다.
 
나는 그것이 소위 386운동권 문화의 한 폐해라고 본다. 386세대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너무나 정치적이었다. 김민석이나 원희룡, 그도 모자라 신지호나 김영환과 견줄 때라야 분노가 가라앉을 만큼 열린우리당의 386은 학생운동 시절에나 보수정당에 안착한 작금이나 적잖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닭짓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녀사냥에 걸린 이철우 의원이 미리 자신의 예전 편향성을 공개적으로 반성했다면 그 지경까지 갔을까.
 
386세대는 80년대에 광주항쟁에서 유월항쟁까지 달려간 것만 자랑하지, 주사가 어쩌고 혁명이 저쩌고 했던 사연은 숨긴다. 대통령 측근 안희정이 반미청년회 출신인 걸 인지하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송영길이 단기필마로 나온 것도 아니고 그가 동료 386들과 어깨를 겯고 나온 만큼, 그와 386세대를 연계해 심판하는 것이 무정한 처사는 아니다. 진보적 개혁을 바라는 한 시민으로서, 기성정치인과 386의 차이는 고려 말기 권문세가와 신진사대부의 차이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문희상, 염동연, 한명숙은 실용주의의 뜻빛깔을 심각히 오염시킨, 실사구시를 표방하면서 대중추수적 기회주의를 발휘하는 (광의의) 포퓰리스트들이므로 더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다 .

장영달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완강히 공언함으로써 중진의 약점(?)을 씻고 개혁인사로 보무당당히 떠오르는 모양이다. 전북 국회의원으로서 새만금사업을 뒷받침하느라, 국회 국방위원장으로서 이라크파병을 추진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지만, 새만금 반대운동 땐 단식투쟁하고 파병 때는 장 의원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진 문정현 신부를 생각해서라도 난 장영달 의장 또는 상임위원에 찬성할 수 없다.

그나마 둘을 고르라면...

김두관이라고 해서 저 위의 여섯명보다 크게 나을 바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불확실성이나 예측불가성 낮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노무현학습효과’ 때문에 지금 와선 발설하기도 뭣하지만) 인간적으로도 믿음이 간다. 일단 그는 선거에서 정책으로 승부하고 있으며, 난 그가 내놓은 지방분권과 자치의 비전에 대체로 찬동한다.

시중의 악의적 여론은 그를 ‘군수’, ‘도지사 후보’ 경력은 쏙 빼고 ‘이장하다가 님(노무현) 잘 만나서 낙하산 타고 행자부 장관된 놈’이라 부른다. 나 역시 말단공무원들이 근거도 없이 그를 욕하는 소릴 종종 들었다. 이건 장점이다. 그의 성장이 진보적 개혁을 도울 것인가는 미지수지만, 문화충격으로 한국사회를 전진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김두관은 2002년도 경남 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무모하게 민주당에 들어갔고. 거기서도 노무현과 YS의 회동을 힐난하는 뚝심을 보여주었다. 나는 2002년 옥천에서 열린 언론개혁 관련 토론회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상황은 노무현에게 너무나 불리했는데 김두관은 “야당할 각오를 하고 개혁신당으로 가야 한다”고 밝혔다. 실명까지 거론된 껄끄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같은 당내의 퇴행적 인사를 단호히 비판했다(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자세히 옮기지는 않겠다. 녹취록도 없고). “민주노동당과 함께 할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소리도 덧붙였다.

석연찮은 것은 그가 이라크파병이나 새만금사업, 국가보안법 처리 정국에서 방조하거나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던 점이다. 행정자치부 장관 시절이라서, 나중에는 원외 인사에 유학생 신분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비겁한 변명이다. 그래봐야 공범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이 공범을 그나마 낫다고 추켜세운 까닭은 선거가 일정 부분은 지난 날의 공적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고, 김두관은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으며, 이번 기회에 그를 당의장이나 상임위원에 올려줌으로써 좀 더 지켜보고 앞으로 꾸준히 판단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김원웅도 수상쩍은 구석이 많다. 아직도 그의 발목을 잡는 공화당과 민정당, (그 다음엔 이 계보가 아닌 통합민주당에 있었다) 한나라당을 거친 그의 전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는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 슬로건에 반했었다고 털어놓았었다. 어찌 6.3세대인 그가 그리 여겼을까. 민정당에는 왜? 한나라당에서 나와 개혁당에 입당한 시기가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직전이었던 연유는 무얼까.

근래의 김원웅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다리로 걷는 정치인이다. 그의 자유주의는 괜찮은 수준이다. 사형제를 폐지하자며 TV토론에도 나왔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견지하고 있다. 반면 그의 민족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장준하, 문익환의 수준으로 규정하면 곤란하다. 그는 간도와 대마도가 ‘우리땅’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때로는 핵보유의 필요성까지 역설한다. 그는 이라크파병과 대미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빛과 쇼비니즘이라는 그늘을 함께 갖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제껴둔 나머지 여섯보다 그나마 낫다. 첫째, 적어도 최근에는 지조있는 행보를 거듭했으므로 뒤통수 칠 확률이 적다(유시민과의 차이). 둘째, 패거리보댜는 직접적으로 당원과의 만남에 의존한다(송영길과의 차이). 셋째, 앞서 나왔듯 이라크파병 반대, 사형제 폐지,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했다(임종인과의 유사함). 넷째, 그의 자주성은 여당의 상임위 테이블에 앉을 때 미중일 패권주의에 대한 안티테제 로 써먹을 법하다. 다섯째, 대전 지역 국회의원으로서 최근 부상하는 충청권 수구신당의 기세를 억누를 도구로 사용가능하다. 여섯째, 참여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는 -그가 틈새시장을 공력할 의도를 가진 결과라도 해도- 당정 관계를 새로 정립할 것이다.

김두관, 김원웅이 당의장이나 상임위원이 돼도 내가 고개를 끄덕일 만큼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터이다. 다만 선거란 기성복을 고르는 행위와 같고, 그런 이상 조금 더 나은 두 인물로 김두관, 김원웅을 지목했을 뿐이다. 이 둘이 이겨도 환호를 터트리지 않을 것이고 져도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씁쓸하고, 또 덤덤하다.
* 글쓴이는 경북 구미시 시의회 의원(무소속)입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영남지역 최연소(27세) 기초의원에 당선돼 현재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002년 <대자보> 필진으로 참여한 이래 다년간 정치칼럼 등을 연재해 왔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대자보> 독자들과 만납니다.
기초의원으로서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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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3/28 [02: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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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무핸 2006/08/10 [14:57] 수정 | 삭제
  • 이런 대통령도 물러나면 연금주나? 밴호사때 온갖노사분규 현장에서 회사의 사정도 모르고 근로자의 편만들어 회사를 더어렵게 만들고 결국 회사 문닫게 만들고 감히 근로자의 어줍잖은 지지로-여론오도-대통령이 되어 제형님의 무식한 행위로 아까운 건설업체 회장을 죽게만들고--기네스북에 오를말: 무식한 우리형님을 좋은대학 나오고...-국회에서 자격,자질의 부족으로 탄핵당하고(이때 만큼 통쾌한적이 없었는데 헌재의 잘못된 판단으로),대통령이 없다고 나라가 지금보다 나빠질까?없어도 전혀 관계없을것 같다.뇌사모로 국민을 속이고 감히 여론을 오도했던 뇌가죽은 사람들의 모임인 뇌사모 일당들은 잘사는지 궁금하네?미친게이들.국민이 얼마나 고생하나?이지구상 누가 이처럼 얄구진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남의 의견을 들으려한지 않는 지도자가 있나?김정일이도 이러진 않을거다.사람은 배워야돼. 된사람이 되고 든사람이되고 난사람이 되야지.되지도 않은 사람이 아는것도 없는게 까불고 앉아있는 뇌무핸.
  • tibul 2006/08/10 [14:48] 수정 | 삭제
  • 뇌가없는 인간,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추며 자신이 제일 똑똑하다고믿는 철없는 사람,나라곳곳에 자기의 얄구진학교 동문을 심는사람,자신때문에 회사가 무너지고 국민이 목숨을 끊고 가족이해체되도 나몰라라하고 근로자보고는 무노동 무임금이라면서 자기는 뭘했다고 그비싼 월급받나?탄핵당해 아무일도 못했으면서 월급받고?왜 대마도와 간도의 영유권에 대해 말못하나?왜 중,일총리에게 "막가잔 말이죠""함해보겠단 말이죠"라고 말못하나?포클랜드를 두고 3의군사대국 영국에 대항하는 알젠틴 못봤나?한심한...
  • 전쟁반대 2005/04/05 [10:55] 수정 | 삭제
  • 물런 그지역에 사는 중국인 즉 재중 동포가 아닌 다른 민족들을 말씀 하신것 같습니다. 먼저 20세기 초기엔 간도지역 인구비율이 95%가 우리 한민족였다고 합니다. 청나라에에서 강력한 이주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화와 경제화로 인하여 중국에 간도 지역에 사는 중국동포들이 그 지역을 떠나고 있습니다. 1996년엔 40% 미만이라고 합니다.
    차후에 2050년 경엔 15%가 될것 라고 합니다.

    논점에서 벗어난것이 임진왜란, 정묘호란 얘기를 하셨는데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그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은 결코 민족주의라고 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 해서 그런글을 썼습니다.

    간도본부의 회원이 적어 놓은 글을 올려 드릴께요.
    위글에 한국적인 민족주의의 글을 올렸는데 전 그분의 의견을 동의 합니다.
    국제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되 민족적인 것을 우선적인 매개체로 해야 한다라는 말에 다시 한번 되셔겨 봅니다.

    좀 길지만 한번 읽어 보셔요.


    우리의 땅을 되찾는 것 못지않게 항구적으로 지키고 보전하는게 매우 중요합니다. 가령 우리 시대에 되찾았다고해도 또 다시 중국과의 끊임없는 영토 분쟁의 피로 얼룩진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래와 같은 문제점과 활용 방안을 제시하면서 함께 고민하고 추가적인 문제점 도출 및 더나은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를 통해 이성적이고 냉철한 간도되찾기운동의 방향에 대해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듯 싶습니다.


    1.파생 문제

    1) 간도 거주 중국인 처리 문제

    - 중국인 중국 본토 이주시 편의 제공

    - 귀화시 신분 및 재산, 권리 최대한 보장


    2) 중국 거주 한국인 안전 문제

    - 중국내 타지역 거주 교포 이주

    - 상사 주재원 안전 확보


    3) 북한 지역 거주 주민 이주 문제

    - 선별적 이주(지식인,역사 학자, 종교인 우선)

    - 범죄인, 군인, 정치인 제외(사상 대립 및 범죄 원천 봉쇄)


    4) 새로운 국경선 획정시 명확한 기준 설정 문제

    (강 - 중간선, 하중도 - 중간, 산 - 산맥, 산능선)


    5) 회복 미포함 고구려 문화유산 보호 및 관리 문제

    - 한중 공동 고구려 문화유산 관리 및 관광벨트 조성

    - 압록강,송화강,흑룡강, 서해 등 수질 공동 관리


    6) 국경 초소 건설 문제(해병대 또는 경찰 위주 주둔)

    - 철책선, 장벽(양국간 긴장 고조시)

    - 현 북한,중국 국경선 참고


    7) 무역보복 문제

    - 중국내 한국제품 불매운동

    - 정경분리 원칙 고수(ex 일본과 중국, 미국과 중국 관계)


    8) 마약, 대마초 단속 문제

    - 백두산 부근


    9) 통치 형태 문제

    - 자유 민주주의 과도기 형태

    - 사상의 대립 문제(친북한계, 친한국계, 친중국계, 친러시아계)


    10) 중국내 소수민족 관계 설정 문제

    - 신장,티벳,대만 등

    - 회복 방법과 절차에 따라 판단하는게 합리적임.



    2.활용 방안


    1) 대한민국 평화의 자치도(구)로 지정한다.

    - 국제기구 유치(국제평화공존 지역)

    - 통치자 : 국무총리(차상위)급 책임 행정관 파견


    2) 역사 문화 관광지 개발 및 보존 사업을 진행한다.

    - 고구려,발해,부여사 심층 연구 강화

    - 대한민국령 정당성,역사성 홍보 강화


    3) 자유무역지대로 건설 한다.(한중러 무역 거점 지역)

    -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연구

    - 제주도 연구(한일중 무역 거점 지역)


    4) 통일 이전시 통일 전초기지 및 통일국가 모델 개발

    - 새터민 정착지 건설

    - 러시아 국경(영공,영해,육로) 통과(블라디브스톡항,동해)

    - 한러 전략적인 관계수립


    덧붙여 이 자리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다름 아니라 우리 민족이 번영하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적의 침략에 안타깝게 무너지는 악순환을 겪는 이유에 대해서 이다.

    각각의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가(학자)는 어느 시기이든 꾸준히 있어야 항구적으로 우리 민족의 고귀한 생명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문화 유산과 강토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데 그러하지 못했던 것 같다.

    또한 저마다의 훌륭한 지식을 함께 공유해야 연구하고 발전시킬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창조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 대책으로 우리는 선조들의 장인정신을 계승 발전 시키고 지식공유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 zzz 2005/04/05 [08:39] 수정 | 삭제
  •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건 억지고..
    간도는 일제가 강탈해서 멋대로 청나라에 내줬으니 사실 명분은 있는데..
    솔직히 간도 되찾으려면 전쟁 해야할 것 같네요.
    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 땅에 사는 중국인들 어떻게 할 건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마 조선족보다 훠~얼 많은 걸로 아는데..
    그 사람들이 다 최근에 중국 정부가 급조해서 이주시킨 사람들은 저얼~대 아닌 걸로 아는데..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영토적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인종청소로 귀결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쓰신 내용도 논점에서 벗어나 있네요.갑자기 왜 임진왜란,병자호란이 나옵니까? 사해동포주의를 매국으로 취급하시는군요.
    보통 일본 시민사회하고의 교류를 말할 때 정당 쪽은 사회당이나 공산당을 많이 언급합니다.그런데 우리 자신은 그들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점은 있습니다.빌리브란트였나? 누군가 '좋은 독일인은 민족주의자여선 안 된다'라고 했지요.반면에 프랑스는 좌파들조차도 애국주의적 전통이 강하구요.
  • 광적인 민족주의 2005/04/03 [22:21] 수정 | 삭제
  • 어떤 점에서 님은 간도를 되찾는것이 광적인 민족주의라고 하셨나요?
    빼앗긴 땅을 되찾는것이, 아무런 힘을 발휘 할 수 없는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때문에 빼앗긴 간도를 되찾는것이 광적인 민족주의(?)라고 하시면 너무 한것 아닌가요? 님은 지금 독도를 일본정부에서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데 님은 가만히 계실것 여요? 힘이 없으니까 보고만 있자고 한것 가요?
    전 답답합니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했던분들은 전부 광적인 민족주의입니까? 임진왜란, 뱡자호란, 정묘호란에 상대국과 싸원던 선조들은 전부 광적인 민족주의자들인가요?

    다시 한번 말합니다. 간도를 되찾는것은 우리 한민족의 뿌리가 있었던 곳이고 불과 제국주의 시대에 힘없이 빼앗긴 땅을 되찾는 그런 일입니다.
    바로 위글에 한국적인 민족주의의 글을 올렸는데 전 그분의 의견을 동의 합니다.
    국제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되 민족적인 것을 우선적인 매개체로 해야 한다라는 말에 다시 한번 되셔겨 봅니다.

    저의 두서없는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도되찾기운동본부 회원-
  • 민족주의 2005/04/03 [17:06] 수정 | 삭제
  • 여기에 많은 글들을 천천히 그리고 곰곰히 읽어 보았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의 민족주의을 생각해 봅니다.

    21세기는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 바탕으로 세계를 살아 가야 한다고 생각 해 봅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를 왜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외친다고 생각 합니다. 극히 일부인 사람들은 일본의 극우주의를 생각 하겠지만요. 한국의 민족주의를 왜치는 대부분의 사람들!!!
    전 존경 합니다.

    어떤 대학 교수님의 얘기를 밑에 글에 적어 봅니다.

    국제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되 민족적인 것을 우선적인 매개체로 해야 한다. 민족주의는 자기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민족의 존재도 귀하게 인정해야 한다. 거기서 민족주의는 공생(共生) 이념의 바탕이 될 수 있다. 그런 민족주의가 '열린 민족주의'다
  • 나보기 2005/04/03 [11:16] 수정 | 삭제
  • 참으로 못난 놈이 자기 푸념하는 것이 왜 이렇게 기사화되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노.
    지가 뭐 잘난 놈이라고 사람을 이리저리 평가하고 비판하누.

    죽 읽어보니
    다른 사람 잘되는 것 눈뜨고 못보는 그런 얼간이로 밖에 안보이네.
    스스로 수양하기를..........

    스스로 참여해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하고

    남을 씹는 맛에 사는 것하고는 천지차이지...
  • 글들이 2005/04/02 [20:46] 수정 | 삭제
  • 여기에 들오온 다른 네티즌 사람들을 생각해서 모두들 논쟁에 대해서 차분하게 글을 써주셔요... 여긴 여러분만 있는것 아니잖아요.
    같은 역사를 배웠던 사람들끼리 왜 이렇는지...
    모두들 자중을 합니다.
  • 개인주의자 2005/04/02 [15:53] 수정 | 삭제
  • 그냥 강제이주 시키겠지. 너희들 사고방식 보아하니...
    철거 당하면서 그 중국 사람이
    "야 한국인은 자주적인 민족이다, 대단하다!" 이럴 거 같냐?
    미제국주의나 중패권주의 일군국주의에 반대할 때는
    세계의 억압받는 민중을
    대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간도 어쩌구 까불기 전에
    티베트나 위구르 사람들이 좀 더 잘 살 수 있게 머릴 짜내라.
    하다못해 노르웨이는 정부에서 제3세계원조 지원예산이라도 만든다더라.

  • 세계시민 2005/04/02 [15:51] 수정 | 삭제
  • 일본 극우파들이 지롤한다고 일본인들 통째로 식당에 출입금지시키질 않나.
    씨벌 베트남에서 한국인과 개는 드나들지 말라고 그러면 기분 좋겠냐?
  • 세계시민 2005/04/02 [15:49] 수정 | 삭제
  • 정치개혁하려고 안티조선 노사모-개혁당 활동할 때
    왠 웃기는 짬뽕들이 기웃거리더라고. 단군이 어쩌구 이 지롤하면서 말야.
    어 이거 뭐 잘못 돌아가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주접 좀 딴데 가서 떨면 안 되나?
  • 2005/04/02 [11:42] 수정 | 삭제
  • 이 얼량이 녀석아.
    그럼 그땅 중국얘들에게 네주자는것이지...
    뭐 어러죽을...?
    논객이면 논객답게 잘 생각하고 써라.
    동포라는 단어를 좀 알고 써라.
    니가 말한것은 동포가 아니다. 이 개인주위 사상에 뭍혀 있는 놈아.
    그리고 내가 언제 전쟁이르키자고 했냐.
    그리고 그 중국에 있는 동포 그사람들도 너처럼 되면 어쩌나 하고 생각 하고 있지. 일제 시대에 밀정노릇 했던 놈이라고 난 너를 주장 하는 바이다.
    왜냐고. 너혼자 잘먹고 잘살자는 그런 사상을 갖었을거라고 난 생각 한다.
  • 별 병신들이... 2005/04/02 [11:27] 수정 | 삭제
  • 똑같은 놈들... 내가 언제 조선일보 옹호를 했냐. 동아 일보를 옹호를 했냐.. 같다 붙을때 붙혀라.
    그리고 김구선생님이나 신채호 선생님은 무가 보아도 민족주의분들이다. 이 병신들아
  • 김수민 2005/04/02 [03:29] 수정 | 삭제
  • 온갖 위협에도 개인의 실존을 지키는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나와 동족이라는 사용자의 횡포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들,
    한번 만나본 적도 없는 지구 반대편에 살지만 패권주의 세계화에 시달리는
    사람들...

    난 이런 사람들이 동포라고 생각해.

    간도찾기, 독도뺏기, 고구려우기기를 벌이는 멘탈리티 비슷한 사람들끼리도 동포를 맺었으면 좋겠는데 이를 어쩌나. 같고 있는 사상은 같은데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라서.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군. 앞으로 제발, 맹수우리에는 혼자 들어가세요.
  • 김수민 2005/04/02 [03:25] 수정 | 삭제
  • 뭔 지랄을 해서든 간도를 되찾았다고 쳐보자.
    그 지역에 사는 중국인들은 어떻게 할 건데? 대책 어쩌구 하면서 그 얘긴
    쏙 빼놨네? 강제이주시킬 건가? 이거 완죤 스탈린의 부활이네.

    중국의 동북공정이 그렇게 싫으면 너부터 서북공정의 유혹을 땔치우시지.
    이게 팽창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의 투쟁으로 보이나? 이건 두 짐승떼거리의 물어뜯기일 뿐야.

    내가 당신 같은 애들을 왜 혐오하는 줄 알아? 중국인으로 태어나면 고구려는 중국땅이다, 라고 우기고 일본인으로 태어나면 독도는 일본땅, 으로 태어난다고 우길 거거든. 쇼비니스트에게 진실은 중요치 않지. 어느 편인가, 우리편에 좋은가, 가 중요한 거거든.

    간도 들입다 팔 시간에 일본의 어떤 양심적 지식인이 조선의 독립을 도왔고, 오늘날에도 일 군국주의의 부활에 도전하는지 지켜봐. 너야 한국땅에서 간도 운운하는 게 쉽겠지만 그 사람은 생명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거든. 너야 제 기분에 취해 들이대면 그만이지만, 그런 사람은 그 모든 긴장과 불안을 견뎌야 하거든.
  • 김수민 2005/04/02 [03:19] 수정 | 삭제
  • 내가 전쟁나면 튈 놈이라구?
    너희 같은 놈들은 전쟁을 아예 일으켜버릴 놈들 아닌가?
    신채호? 아나키스트가 된 말년에 신채호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
    이제 인물해석도 입맛에 맞춰서 하나?
    김구? 김구는 문화강국을 원했지
    무신 시덥잖은 땅따먹기를 하자고 한 적은 없어.

    그거 보라고 올려놓은 거냐? 내가 여태껏 한 이야기 뭐 들었니? 니가 근거로 갖고온 그 따위 글은 내가 그대로 놓고 한심한 사관의 표본으로 쓸 수 있는 거거든. 팩트의 앎과 모름이 이 문제의 원인이라 생각했나?

    그리고 한가지 물어보는데 김원웅 같은 사람들이 진짜로 간도땅 찾자고 그러는 거 같냐? 왜 그러는 것 같애? 일본 우익이 독도를 가져가리라는 확신이 들어서 그러는 것 같아? 정치시장공략이예요 이 얼빠진 소비자 씨야.

    나는 또라이를 다른 말로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널 또라이라고 부르는 거니까 인터넷이라고 함부로 부른다는 그런 잡설은 집어 치우도록하고... 옛날에는 애교로 봐주자, 이런 생각이었지만 너 같은 쇼비니스트 얌생이들은 이젠 손 좀 봐줘야겠어. 소위 '개혁' 진영에도 이제 무차별적인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야.
  • 간도본부 2005/04/02 [01:26] 수정 | 삭제
  • 조금 긴 문장이다. 간도본부가 왜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잘 설명 되어 있다. 끝까지 읽어 주셔요.


    우리땅 간도를 되찾아야 한다.

    -간도되찾기운동본부-
    www.gando.or.kr

    머리말

    간도란 무엇인가. 자칫 듣기에도 생소한 이 명칭은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되어버린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우리의 옛 땅이다. 우리가 만주로 인식하는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땅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며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다. 그러나 이 땅은 막연히 먼 옛적의 땅만은 아니었으며 바로 근대 조선말까지도 청나라와의 영유권 분쟁상태에서 간도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며 우리가 개척하고 실질적 영유권을 행사한 우리의 영토였다. 그러나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청으로부터 만주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등의 각종 잇권을 얻는 댓가로 간도땅을 청나라에 넘었고 오늘날 까지 중국이 영유권을 행사해 오고 있는 것이다.
    국제법적으로 무효인 을사조약에 의해 맺어진 간도협약은 당연히 무효일 수 밖에 없으며 이에 우리는 간도협약 무효를 중국측에 통고하고 간도땅을 되찾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국측은 우리의 통일이 가시화되자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며 간도의 영유권을 고착화하려 하고 있다. 이제 2009년이면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데 보통 국가간 영유권 분쟁의 암묵적 시효가 100년으로 통용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의 대응은 더욱 시급하다 할 것이다.


    1. 간도란 무엇인가?

    가. 간도 명칭의 유래

    간도의 유래는 본래 두만강 중간의 종성과 온성 사이에 있는 삼각주가 매우 비옥하였는데, 1870년경부터 부근의 주민이 이곳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이곳을 간도(間島)라 불렀다. 그 후 무산, 온성 사이의 주민이 도강하여 백두산 동쪽 기슭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여 이곳을 모두 일컬어 간도(間島)라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민족이 개간하였다 하여 개간할 간(墾)의 간도(墾島)라 부르기도 하였다.

    나. 간도는 어느 지역인가?

    간도는 좁은 의미로 백두산정계비와 관련된 두만강 이북, 토문강 이동 지역인 동간도 혹은 북간도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압록강 이북 지역인 서간도도 포함한 남만주를 가리킨다. 즉 서북으로는 요동의 봉황, 정북으로는 길림이남, 동북으로는 연길, 용정 및 화룡까지인데 고구려 초기수도인 환인과 집안도 역시 서간도안에 위치한다.
    간도분쟁 당시에 우리 선조들이 생각하는 간도 명칭의 개념은 동으로는 토문강에서 송화강을 거쳐 흑룡강 이동의 연해주를 포함한 지역을 의미하였고, 서로는 압록강 대안을 포함하여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양․심양 일대(소위 심요선)까지의 봉금지역이 포함되었다.


    2. 중국 동북공정의 목적은 간도지역을 영구히 차지하려는 속셈이다.

    - 55개 소수민족을 포괄하고 있는 중국에게 가장 큰 위협요소는 신장위그루, 티벳, 내몽골, 연변등 소수민족 자치구의 분리독립 위협이 국가의 가장 큰 위협요소 이다.

    - 이에 중국은 과거 무력점령한 티벳과 신장, 내몽골지역을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서북공정을 완성시키고 한중수교 이후 동북3성의 조선족문제와 만주, 간도의 역사적 연원을 둘러싼 불안요인이 대두되자 이 지역의 혼란을 막기위하여 동북공정을 시작하였다.

    - 특히 국제법적으로 무효일 수 밖에 없는 간도협약에 의거하여 간도지역을 불법 점유하고 있는 중국이 한반도 통일 분위기가 현실화되자 조만간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다시 제기될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를 확보하고자 본격적으로 왜곡에 나선 것이다.

    -동북공정의 주요 연구대상으로 1차 통과된 27개 과제 중 13개가 동북변경인 간도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6개 과제가 고구려, 발해와 관련이 있으며 4개의 과제가 간도지역의 족원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동북공정의 목적은 1909년 무효인 간도협약에 의거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간도지역의 영유권 고착화에 있음이 명백해 진다.

    - 최근 방한한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아시아담당 부부장은 고구려사 왜곡을 항의하는 외교통상부에 오히려 ‘중국 동북지역의 국경과 영토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해소해 줄 것과 정계의 간도회복 주장을 저지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 것도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다.


    3. 간도 영유권 분쟁사의 개괄

    - 1600년대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면서 지배민족이 된 만주족들이 모두 북경쪽으로 들어가게 되고 만주지역은 텅 빈 지대가 되어 버린다.

    - 이에 청왕조는 1627년 조․청간의 강도회맹에서 양국이 이 지역을 봉금지대화하였고 책문(울타리)을 설치하여 무주무인의 중립지대로 만들었다.

    - 이때까지도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은 불분명한 상태였으나 여러 고증지도에 의하면 한결같이 조선의 실질적인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위치해 있었다.

    - 1689년 러시아가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흑룡강유역에 진출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청나라의 강희제는 만주지역을 차지하고자 선교사로 하여금 백두산과 만주일대의 지도를 제작하게 하고 목극등(穆克登)을 보내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하였다.

    - 목극등(穆克登)은 조선의 대표인 박권(朴權)등이 동행하는 것을 거부한 채 1712년 5월 15일 백두산에 올라 수계를 조사하고 정계비를 세웠는데, 이 비문의 내용은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 즉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국경으로 정하였다.

    - 목극등의 백두산 정계비는 청나라의 일방적인 설정이었고 이를 인정하면 압록강 이북의 서간도 지역을 잃는 것이었다. 다만 동쪽의 토문강을 경계로 하기 때문에 송화강 동쪽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 우리 땅이 되는 것이다.

    - 이로인해 동쪽의 토문강은 국경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1860년대 북관지방의 흉년 때문에 조선에서 간도로 많이 이주하여 개간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860년 베이징조약으로 청나라는 우리의 땅인 연해주를 불법적으로 러시아에게 넘겨주게 되는데 러시아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청나라는 마침내 간도지역의 봉금을 해제하여 한족들이 유입되었는데 이미 두만강 이북의 동간도, 북간도에는 조선인 10만여명이 거주하는 형국이었다.

    - 청나라가 조선인들을 두만강 이남으로 물러가라 요구하자 1885년과 1887년 두차례 국경회담이 열리게 되었고 청나라는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위압적으로 주장하였으나 조선측에서는 감계사 이중하가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 지류임을 공동답사를 통해 증명하자 국경회담이 결렬되었다.

    - 이 상태에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가 조선을 대신하여 국경회담에 임하게 되었는데 일제도 초기에는 간도는 조선땅이라 주장하며 1907년에는 용정지역에 간도임시파출소까지 세우며 관리하였다.

    - 그러나 청나라와 영유권 분쟁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한일합방을 해야하는 일제는 분쟁지역을 떠안고 합방하는데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1909년 향후 만주와 대륙진출을 위한 각종잇권(만주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등)을 얻는 댓가로 간도지역을 청나라에 넘겨주는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하여 간도지역은 현재까지 중국이 점유하는 상황이 되었다.


    4. 간도는 왜 우리 땅인가?

    가. 조.청 국경선은 압록강 두만강이 아니며 모두 그 이북에 위치해 있었다.

    - 프랑스인 De Halde의 지도 중 레지의 비망록에는 “봉황성의 동방에는 조선국의 국경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조선정계비구역약도(규장각15504)’와 ‘백두산정계비도(규장각26676)’, 및 ‘로마 교황청의 조선말의 조선지도’(1924년제작)에 의하면 동간도는 토문강 이동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718년 청의 황여전람도를 원본으로 한 수많은 서양지도중 당빌의 ‘조선왕국지도’, 1740년의 듀알드, 1750년의 보곤디, 1794년의 윌킨스가 제작한 지도에는 압록강 북의 봉황성 일대에서 두만강 위쪽의 연길 일대로 이어지는 동간도지역으로 국경 표시가 되어있다. 이와 같은 국경선이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되기까지 유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 우리가 간도를 선점적으로 개간했다.

    - 청나라와 조선이 맺은 강도회맹에 의해 봉금지역이 된 간도지역은 무주지로써 양국이 공동관리하는 지역이었다. 무주지는 국제법적으로 먼저 선점하여 개간하는 쪽이 영유권을 가지게 되는데 간도에 대한 우리의 개간은 무주지 선점이론에 의한 영토획득의 의미가 있다.

    다, 조선 조정에서 실질적인 행정권력을 행사하였다.

    - 정계비 건립 이후에도 간도는 조선에서 실질적으로 행정권력을 행사하였다. 조선 조정에서 1900년과 1903년에 서간도 및 동간도(북간도)를 행정적으로 평안북도 및 함경도에 편입시켰으며 주민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행정과 군인훈련비로 충당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 대한 치안 및 경비를 수행했고 조선 관병들이 중국의 유민 침투를 저지하기도 했다. 이는 명백히 국가의 행정단위로써 기능을 했다는 증거이다.

    - 조정에서는 1897년 서상무(徐相懋)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하였으며, 1900년 경 평북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압록강 대안지역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하였다. 1902년 5월 21일 간도시찰사로 임명받고 이범윤(李範允)이 사포대를 조직하고 간도 한인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그 비용에 충당하고 모자산, 마안산, 두도구 등에 영소를 설치하였다.

    라. 간도에 대한 역사적 연고

    -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반만년의 역사중 우리민족이 3천3백년이 넘게 지배하였으며, 동이계 민족(요,금,원)이 724년, 한족(漢族)은 430년 정도이다. 특히 청나라 시대이후에는 한족은 출입자체가 금지되었으며 현재의 만주지역에 한족이 거주한 것은 120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 고려시대 윤관장군은 9성을 개척하고 두만강 북쪽 700리의 공험진의 선춘령에 국경비를 세웠으며 공민왕은 1370년 이성계로 하여금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요․심지역)를 정벌토록 하여 우라산성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 해 지용수․이성계는 요양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고려는 동녕부에 심․요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통고하였다. 또한 세종때 김종서는 6진을 개척하였다.

    5. 간도협약이 무효인 이유

    가.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에 근거하여 조선을 대신하여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게 되는데 을사조약 자체가 강압적으로 맺어진 대표적인 국제조약으로 이미 국제적으로 무효라는 것이 확인 되었다.

    나. 을사조약이 설령 유효하다 해도 간도협약은 피보호국(조선)의 이익을 증가시키거나 유지시키는 조약이 아니라 이익을 해치는 조약이므로 보호조약의 성격상 무효가 된다.

    다. 간도협약이 유효하더라도 당사국인 청-일간에만 유효하지 당사국으로써 배제된 대한제국에는 효력이 없다.(1909년에 대한제국은 아직 독립국가로 존재하고 있었음.)

    라. 중일간에 이미 1941년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선언되었고, 한일간에도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확인되었다. 이에따라 과거 제국주의 시기의 모든 조약과 협약이 무효가 되었는데 오직 간도협약만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6. 간도문제에 대한 현재의 상황

    가. 간도 영유권과 관련한 우리 정부의 대응

    - 해방이후 무관심,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1975년도에 국회에서 간도자료집을 발간한 것이 전부이다.

    - 1992년 한중수교에서 간도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 수교조항에 현재의 영토를 존중한다는 내용이 있어 입지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 현재 국회 상임위(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국회의원 59인이 서명하여 ‘간도협약 원천무효 결의안’이 상정된 상태이다(2004. 9. 3일).

    나. 북한의 상황

    - 북한은 1960년대에 중국과 북중변계조약을 맺어 현재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다. 우리나라 민간의 상황

    - 북방영토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져왔던 백산학회를 중심으로 간도학회가 설립되었고 민간차원에서 간도되찾기운동본부가 만들어져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였다.


    7.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 간도협약 무효를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통고하도록 해야 한다.

    - 먼저 청일간에 불법적으로 맺어진 간도협약을 무효화시키고 간도협약 이전의 영유권 분쟁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 현재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제출된 간도협약무효결의안이 상임위를 거쳐 국회본회의를 반드시 통과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 간도협약무효결의안의 국회통과는 정치적 의미가 크지만 실제 국제적으로 간도를 분쟁지역화 하여야 하기 위해서는 외교통상부에서 정식으로 간도협약 무효를 중국측에 통고하도록 해야 한다.

    - 특히 국가간 영유권에 관한 분쟁에서 100년의 시효가 묵시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므로 간도협약 100년이 되는 2009년 이전에 시급히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한다.


    나. 연변지역 재중동포의 문제

    - 간도는 좁게 보았을때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말하는데 국가간의 영유권 분쟁시 현지 주민의 의사가 중요한 결정변수가 될 수 있다.

    - 그런데 현재 조선족 자치구는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인한 대도시 이주와 한국으로의 혼인, 취업등으로 인하여 급속한 와해상태가 진행되어 현재 조선족 인구가 40%선으로 떨어져 이대로 가면 10년후면 자치구 자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였다.

    - 특히 중국은 동북공정과 함께 조선족에게만 3관교육(민족관, 국가관, 역사관)을 특별히 시켰는데 이 내용은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중국만이 조국이고 과거의 고조선,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 중국은 향후 간도가 분쟁지역화 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조선족의 동요를 막고 조선족을 급격히 한족화 하는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 따라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확보에 있어서 현재의 재중동포의 와해를 막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사업은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다. 간도에 대한 대국민 홍보 및 힘의 결집

    - 중국의 동북공정의 궁극적 목표가 간도영유권의 고착화에 있음을 간파하고 역으로 우리는 간도의 영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 우리의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정한 헌법 제 3조의 내용을 북방영토를 포함한 내용으로 수정해야 하여 교과서 및 역사서, 각종 지도에 간도지역이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

    - 현재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간도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다. 간도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적 홍보를 통해서 간도에 대한 관심과 영토의식을 가지고 힘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 진보적민족주의 2005/04/01 [20:52] 수정 | 삭제
  • ◆ 빼앗긴 우리땅 "잊고 말텐가" ◆

    새 천년 맞이로 전국이 들떠 있을 무렵인 지난해 연말, 국민들은 해묵은 문제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의 소동을 치러야 했다. 일본이 또 기습적으로 독도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종래처럼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 발생한 사태는 일본이 보여주었던 과거의 어느 형태보다 훨씬 더 고약했다.

    일본은 '말로만' 영유권을 주장하는 대신, 이번에는 아예 '독도를 소속 행정 구역으로 갖고 있다'는 시마네현의 한 주민으로 하여금 독도를 주소지로 하여 호적을 만들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종래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도가 자기네 행정 구역임을 지정 사실화하려는 노력을 '몸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이같은 행태에 대해 '장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국제법 분쟁에서 유리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명분 쌓기용'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국민은 일본의 '말도 안되는 소행'을 성토하느라 새해 벽두부터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비록 많은 국민이 '이대로 가다가는 독도가 아예 일본에 먹히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고, 이같은 우려에 설득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영유권 주장에 관한 한 독도 문제는 당장 큰일 날 성질은 아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명백한 '한반도의 부속도서'로서 대한민국 영토에 귀속되어 있고, 정부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도를 지키고 일본의 '허튼 수작'을 감시하려는 국민의 눈길은 매섭기만 하다.


    [1712년 백두산 정계비가 문제의 발단]

    하지만 눈길을 한반도 북쪽으로 돌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현재 중국의 관할 아래 있는 백두산 인근 지역과, 이른바 '간도땅'으로 불리는 두만강 이북지역, 러시아에 귀속되어 있는 녹둔도(鹿屯島) 등은 과거 학계 일각의 잇단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점차 국민의 뇌리에서 잊히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뜻 있는 일부 학자들은 1909년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강제로 중국측에 빼앗긴 간도 문제에 대해서 하루빨리 논의를 제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독도보다 훨씬 더 복잡하면서도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오늘날 한·일 양국 현안으로 대두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분쟁은, 1905년(메이지38년) 일본의 일개 현(우리나라의 군에 해당) 정부가 발효한, 국제법적 효력이 전혀 없는 한 고시에서 비롯했다. 이른바 '시마네 현 고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고시의 주요 내용은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7도 55분, 오키도로부터 86해리(157㎞)에 있는 무인도(즉 독도)는 타국이 이를 점령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자취가 없기 때문에 영토에 편입해 다케시마(竹島)라고 명명하고 시마네현 오키 도사(島司)의 소관으로 한다'는 매우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한국을 식민화한 일본은 이듬해인 1906년 당시 울릉군수인 심홍택을 찾아 독도를 일본에 편입한 사실을 일방으로 통고했다. 말하자면 독도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측 억지로 제기되었음을 알수 있다.

    반면 간도 지역은 비록 한국(조선)의 외교권(조약 체결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중국(청)과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간도 협약'이라는 좀더 그럴듯한 국제 조약의 틀 안에서 '합법적으로' 중국측에 넘어갔다. 따라서 간도 영유권 문제를 재론하기 위해서는 1909년 청·일 양국간에 이루어진 간도 협약의 적법성 여부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게다가 독도와 달리 간도 지역은 백여 년 이상 한·중(또는 조·청)간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아직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영토 구획 협상의 구체적인 대상인지조차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양국은 서로 유리하게 '간도 지역'을 설정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심지어 간도의 범위를 블라디보스토크 이북 지역으로까지 확장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거론되고 있는 간도 지역은 간단히 말해 '두만강 이북'지역을 뜻한다. 문제는 1712년(숙종 38년)있었던 '백두산 정계비'건립 사건을 시초로 한다. 당시 중국을 재패했던 청나라 강희제는 자국 관리 목극등(穆極登)을 변계(邊界) 사정관으로 임명해 장백산(백두산)을 수 차례 답사한 끝에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는 내용을 비문으로 새겼다. 이전부터 청나라는 자기네 왕조의 발상지인 만주 일원을 수중에 넣기 위해 간도 지방을 '봉금 지대(封禁地帶)'로 설정하여 한족(漢族)의 이주를 엄금하고 있었다. 당시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 비문의 주요 내용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동쪽으로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삼아 양국의 국경을 확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이 다시 문제가 된 때는 정계 비문에 적힌 '토문강'이 중국측이 믿었던 것과 달리 '두만강(도문강)'이 아닌, 송화강 상류의 또 다른 강 이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청나라가 봉금 지역으로 설정했던 만주 일대에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한(韓)민족도 상당수 진출해 살고 있었다. 청나라는 원래 자기네가 선언했던 봉금 지역을 지키기 위해 1883년 토문강 이서와 이북 지방에 사는 한민족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 지역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이 지역 주민(한민족)이 두만강 발원지를 탐사해 보니, 목극등이 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이 애초 청나라가 믿었던 것과 달리 두만강과는 전혀 별개의 강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게 된 것이다.

    조·청 양국은 이 문제로 인해 1885년(을유 담판)과 1887년(정해 담판)두 차례에 걸쳐 '국경 협상'을 벌였다. 이른바 '감계 담판(勘界談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두 차례 회담에도 불구하고 간도 지역을 둘러싼 양측의 협상은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1895년 청·일 전쟁, 1902년 러·일 전쟁을 국제 정세가 격변하자 중단되었다.


    ['간도는 우리 땅' 분명히 밝힌(대한제국 전도)]

    이윽고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제는 고종을 협박해 이른바 '을사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일제가 이어서 취한 조처는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를 위해 전문가를 동원하여 광범위한 조사를 하고, 10만여 한인(韓人)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독립운동의 무대로도 유명했던 용정에 '통감부 파출소'까지 설치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강행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일제는 만주 지역 철도 부설권·탄광 채굴권 등을 청나로부터 얻는 대가로 간도 지역을 청나라에 양도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 1조는 두만강으로 조·청 국경을 정하며 강원(무산 이서)지방은 백두산 정계비를 근거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 양국의 경계를 삼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간도 땅이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타당성과,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그동안 학계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제기 되어 왔다. 이 중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것이 간도 지역을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묘사하여 한반도에 편입해 놓은 조선시대 고(古)지도들이다.(82-83쪽 고지도 참조) 최근에는 대한제국 때인 융희 2년(순종의 연호·1908년)에 근대식 제작법으로 작성된 〈신정분도 대한제국전도〉가 공개되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일제가 간도 협약을 체결하기 직전, 현공렴이라는 사람에 의해 간행된 이 지도에 대한 해설은, 김영관씨(서울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에 의해 지난해 북방 문제 전문 학술지인〈백산학보〉(제53호)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김씨의 해설에 따르면, 이 지도는 대한제국의 실권이 비록 일제 통감부에 넘어간 상황이었음에도 일본과 청국간 남만주 일대에 대한 이권 다툼이 확정적이지 못한 이유로 간행될 수 있었다. 이 지도에는 조선과 청국의 국경이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도문강, 즉 두만강이 아님)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북간도 대부분이 한반도에 딸린 지역이라고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다.(81쪽 지도 참조)

    현재 간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하고 이를 여론하 하려는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곳은 역사학계이다. 특히 김득황(재야 사학자)·양태진(동아시아 영토문제 연구소)·육낙현(백산학회 총무이사·84쪽 상자 기사 참조)씨 등 재야 사학자와, 배우성(서울대)·조광(고려대)교수등은 수십 년간 간도 연구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며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고 있는 대표적은 연구자들이다. 또 강석화(서울대 규장각)·강창석(동의대)·신각수·이일걸(정치학·성균관대 강사) 씨 등은 1990년대 들어와 간도 관련 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 연구를 시작한 소장 연구자들이다.

    최근에는 간도 문제를 국제법 테두리에서 연구 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학자들도 등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간도 협약 체결 과정을 연구하고 돌아온 최장근씨(대구대 강사)와 국제법을 강의하고 있는 노영돈 교수(인천대)가 대표적이다. 특히 노영돈 교수 같은 이는 최근 들어 '간도 협약의 국제법적 무효성' '간도 문제의 국제 소송처리'등을 주장해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원인 무효인 간도 협약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중국의 간도 통치권은 '사실상의 지배에 불과할 뿐 국제법상 영유권은 한국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간도 영유' 중국은 물밑 작업, 한국은 침묵 일관]

    세부 논의점에 대해서 견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간도 연구가 사이에서 한결같이 일치하는 점은 이제야말로 간도를 둘러싼 북방영유권 문제를 관련 당사국과 본격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 중 일부는 간도 문제를 더 늦기 전에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기구에 보내 법적 해결을 꾀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경 조약 등 국가간 체결된 조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은 '조약 체결 수 100년 이내'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르면, 한국이 간도 문제를 국제법에 호소할 수 있는 시기는 간도 협약 체결 100년째를 맞는 오는 2009년까지이다. 이 때까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간도는 영원히 중국 영토로 확정될 공산이 높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한국 정부는 주권을 회복한 1945년 이래 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문제는 1990년 한국과 중국간 수교가 이루어진 뒤에도 역대 정권이 보인 미온적인 행태이다. 주권 국가인 한국에서 간도 영유권 문제가 책임 있는 당국자 사이에서 제기된 것은 1983년 국회의원 54명이 '백두산 영유권 확인에 관한 결의 안'을 제출한 사실과, 1995년 국회에서 한 의원이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고작이다.

    반면 문제의 한 당사자인 중국측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중국인들을 접촉하여 이 문제를 사적으로 논의했거나, 중국을 다녀온 인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인 이미 남북한이 통일되었을 때 영유권 문제가 본격 제기될 것에 대비해 문제 지역에 대한 '영토 굳히기' 작업을 음으로 양으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가지 주목할 것은, 중국측이 역사(국경)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확고한 원칙을 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최대 강역주의'가 바로 그것으로, 이는 중국 영토가 역사상 최대로 확대되었던 1840년의 강역(彊域)을 중국 역사의 기술 대상으로 함을 말한다. 당시 영토는 중국 본토 외에 만주·몽골·신장·티베트·타이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측이 발해의 역사와, 고구려 사의 일부를 '중국역사'로 해석하는 경향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이에 따르면, 드넓은 맞주 지역에 포함된 간도 일원은 '당연하게도' 중국의 역사요 영토인 셈이다.

    중국은 일찍이 1990년대 초반부터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국경 정비 작업을 서둘렀다. 고구려사 연구가로 만주 지역을 몇 차례 방문했던 서길수 교수는 1990년대 초반 백두산 지역을 답사했다가 중국이 국경 정계표를 교체하고 있는 광경을 간접 확인하기도 했다. 1993년 11월 중국 지린성 정부는 중국측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국 학자들의 논리를 중국측 입장에서 일일이 반박하는 내용이 담긴 〈중조변계사(中朝邊界史)〉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1995년 중국 총리 리 펑은 당시 중국을 방문한 한국 총리에게 '한국인이 중국 영토인 백두산과 옌볜지역(간도지방)에서 고토(故土) 회복을 말하고 다닌다'며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영토 문제 연구가인 양태진씨는 "중국 정부 외교부 안에는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간도 문제를 전담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는 모두 장래에 있을지 모를 영유권 분쟁에 대비해 미리 쐐기를 박아두려는 일련의 움직임이다"라고 말했다.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이미 간도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에 대비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국내의 역사학자와 영토문제 전문가는 북방 영토 영유권, 특히 간도 문제에 관한 한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려는 의견 그 자체를 비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일반의 인식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이 같은 태도가 타당하다면 한국측이 볼 때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억지를 일본이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하는 행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고 이들은 반문하고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결국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1차적으로 이제까지 수집된 소명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에 대해 반환 청구를 해야 할 것이고, 중국측이 이에 불응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는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중요한 것은 정부의 문제 의식과 의지이다. 영토 문제는 '계속 주장하지 않으면, 결국 현실적으로 문제의 땅을 점유한 나라에 우선권이 돌아간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통념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일찍이 1960년대에 체결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북한간 비밀 조약 등 간도 문제와 관련된 '중대사'들에 무관심·무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적어도 영토 문제에 관한 한 국가가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은 이 같은 사정으로 더 설득력을 얻는다.



    ◆ 30년을 이어온 '북방 연구' ◆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어도 나라의 영토는 줄일 수 없다(吾頭可斷國疆不可縮)' 이 구절은 1885년 안변부사로 있다가 조선 정부에 의해 감계사(勘界使로) 임명되어 두만강 이북 지역의 국경 확정 문제를 둘러 싸고 청조의 관리와 담판을 벌였던 이중하(李重夏)가 교섭 과정에서 남겼다는 말이다. 서울 을지로 3가에는 이중하의 이 명구를 단정한 붓글씨로 써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벽에 편액으로 걸어둔 사무실이 있다. 바로 북방 연구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백사학회이다.

    백산학회는 1966년, 〈조선일보〉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고 고전 국역 기관인 민족문화추진위원회의 이사장을 맡기도 했던 유봉영씨(작고)가 중심이 되어 설립했다. 현재 백산학회는 근근히 명맥만 유지하는 학회 중 하나이지만, 초창기에는 유봉영씨 말고도 이병도·고병익·김원룡·전해종·천관우씨 등 쟁쟁한 역사학자들이 포진하여 고대사와 북방 연구에 관한 한 '백산에서 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결코 최고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학회였다.

    실제로 현재 학계에서 중진으로 자리잡은 조광(고려대)·김남규(경남대)·김원모(단국대)교수는 모두 이 학회에서 간사 일을 보며 연구에 정진하다가 강단으로 진출한 사람들이다.
    현재 백산학회 사무실의 주인은 출판사를 하며 20년째 학회를 지키고 있는 육낙현씨(총무이사·백산자료원 대표). 그 자신이 북방 문제, 특히 간도 영유권 문제라면 책을 써낼 정도로 일가견이 있고, 웬만한 역사학자의 신상이나 연구 업적을 훤히 꿰고 있는 육씨는,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 다니던 시절 전(前) 이사장인 유봉영씨를 만나 학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만사를 제쳐두고 아예 학회로 옮긴 때는 1981년, 한때 재벌 기업의 지원을 받고, 각 언론사·대학 총장의 후원을 얻어 탄탄한 재정을 자랑했던 이 학회는 1980년대 중반 이사장인 유씨가 작고하고 외부 지원이 끊기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후 육씨는 학회 살림을 거의 도맡아 꾸려 왔다.

    형편이 어려운데도 백산학회는 매년 두 차례 전문 학회지〈백산학보〉를 발간하고, 해마다 거르지 않고 학술 대회를 열어 왔다. 학술 대회 주제는 대부분 북방 관련, 국내 학계의 간도 연구성과를 총 정리 한 1997년의 학술대회 '한민족의 북방 영토 의식과 간도 영유권 문제'도 백산학회가 주최했다. 당시 학술 대회는 이전까지 일부 재야 사학자 사이에서만 주로 논의 되었던 간도 영유권 문제를 기성 학계에 본격 접목해 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현재 육씨가 추진하고 있는 일은 국제법 전문가를 동원해 간도 영유권에 대한 침체된 여론을 환기하고, 이를 국회 차원으로 끌어올려 늦어도 내년까지 국제 소송 문제를 이슈화하는 일이다. 육씨는 이를 위해 뜻 있는 사람들의 지원과 동참을 바라고 있다.
  • 우익 2005/04/01 [18:35] 수정 | 삭제
  • 마지막 문장을 잘 보기 바란다. 한국에서~~~

    요약
    정치 및 사회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개인이나 집단.


    본문

    우파(右派)라고도 한다. 좌익(左翼)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우익은 보수적·민족적·국수적·반동적인 것을 가리키고, 좌익은 급진적·계급적·혁명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익과 좌익은 그 구별이 명확한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예컨대 노동운동은 좌익에 속하지만, 그 내부에서도 상대적으로 온건한 세력을 우익 또는 우파라고 부른다. 우익·중도·좌익이라는 말은 프랑스혁명(1789∼1799) 당시 국민공회(國民公會)에서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의장석을 기준으로 오른쪽 자리에, 중간파인 마레당이 가운데에,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왼쪽에 앉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흔히 우익은 파시즘을 가리킨다. 파시즘의 맹아는 프랑스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티슴에서 찾을 수 있으나, 뚜렷한 형태를 취한 것은 러시아혁명(1917)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이탈리아의 파시즘이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우익운동은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였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모두 붕괴되었다.

    그러나 전후에도 이탈리아의 네오파시즘운동인 '이탈리아 사회운동', 독일의 네오나치당인 '국가민주당' 등이 남아 있다. 프랑스의 '드골주의'도 일종의 우익으로서 보나파르티슴적 성향이 강하다. 한국의 경우 우익은 보수주의·반공주의를 표방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 그리고 2005/04/01 [18:19] 수정 | 삭제
  • 너 이것 아냐. 정치는 민족이랑 역사를 가지고 연명 한다는것을.
    정치에 대한 글을 쓸려면 똑바로 알고 써라.
    다른 정치인들 봐라 정치, 민족이란 단어를 많이 쓰잖아.
    참고로 나는 정치인은 아니다. 일반 회사원이다.
    여기 인터넷에 글을 읽는 일반적인 회사원이다.
  • 참 덜떨어진 놈이군 2005/04/01 [18:15] 수정 | 삭제
  • 이런놈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글을 쓸려면 잘써라. 그런 편협한 사관을 갖지 말고.
    너 처럼 생긴놈이 대한민국 전쟁나면 제일 먼저 튈놈 아닌가?
    당신 말대로 우익이란 사전의 나온말이 뭔지 아냐?
    한번 찾아 봐라.
    간도를 되찾자는것이 왜 우익이냐. 이 민족을위해 아니 1세기가 안지난 우리땅을 되찾자는것이 뭐가 잘못이냐. 참 한심한 인간. 그렇다고 내가 언제 전쟁으로 되찾자고 했냐. 그리고 지금 당장 되찾자고 했냐. 뭘 모르면 알고나 글을 써라 이 짐승아... 뭐 이런 놈이 논객이라고...
    참 너 같은 놈은 이땅에서 살지 말아라. 응 재발 부탁한다.
    너도 김구선생님, 신채호선생님 이 역적이겠네. 통일 하자고 해서. 너의 말을 들어 보면 독도 땅도 내줄 놈이다. 이 김완섭보다더 못한놈. 이 이문열 보다도 못한놈.
    내 다시는 이곳에 들어 온가 봐라.
  • 김수민 2005/04/01 [14:36] 수정 | 삭제
  • 넷티켓 어쩌구 하는 게 참 찌질한 냄새를 풍기는 발상이군요. 말을 함부로 한다? 저는 아주 적확한 말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개는 개고 고양이는 고양이인 것이고, 성찰은 성찰이고 찌질은 찌질입니다.
    '함부로'한 말이라고 그러셨는데 말이 험하면 함부로 뱉은 거라는 고정관념부터 고치세요. 그래요, 백보양보해서 함부로 뱉은 거라고 칩시다. 되도 않는 비위 맞춰가면서 속에도 없는 말 하느로 머리 굴리는 것보다 백번 낫죠.
    아마 조선일보 진영 쪽에 제가 같은 태도를 견지했으면 그런 이야기가 좀 덜 나오지도 않았나 싶은데... 그건 저런 쇼비니스트들은 그래도 아직 한편이다, 라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요즘 친일청산 정국인데, 저는 한가지 조건을 분명히 달고 있습니다. 우익 쇼비니스트나 주체사상파와는 손잡지 않는다. 안티조선이나 정치활동에서도 마찬가집니다. ]
    이 기회에 저런 덜 떨어진 민족주의자도 정리하고 넘어가야죠. 만난 적도 없는 일본 진보진영이 진짜 동포로 여기세요.
  • 2005/04/01 [00:36] 수정 | 삭제
  • 아직 통일도 못했는데 간도까지 찾아요,,

    통일부터 합세....

    우린 아직 민족국가 건설도 못했음다..
  • 넷티켓 2005/03/31 [17:11] 수정 | 삭제
  • 위의 글들 잘 보았습니다.
    김수민님 너무 막나가시는것 같네요.
    아무리 인터넷이 불특정 다수에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글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심 안되죠. 글을 쓰는 사람이면 쓰는 사람 답게 논리 정돈하게 써야 하지 않을까요? 초딩도 아니고...
  • . 2005/03/31 [16:22] 수정 | 삭제
  • 조선 놈은 맞아야 말을 들어 ~
    엽전들이 다 그렇지~
    조선 사람은 모래알 같다~

    이거 다 그 싸가지 없는 일본 쉐이들이 한 말들이다
    가끔은 분별 없는 한국 사람들도 사용하는 못된 말들인데
    왜 우리가 내 가족에 대해서 뜨거운 사랑을 느끼는가?
    왜 중국 일본과 전쟁일때 의병들이 궐기했나?
    당신의 말처럼 민족이라는 의미자체가 강해질때
    두려움을 가져야하는 그런 의미인가?
    그건 저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나 합당한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 민족이 하나되어 했던 행위들이 주변국 침략이고 수탈인가?

    국가간의 평화 공존도 우리가 힘이 있을때 가능한게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동과 서가 또 북한과도 하나될수 있는건
    같은 민족이란 의미가 전부일진데
    모든 사람이
    민족이란 의미앞에 딩신같은 해석을 내어 놓으면
    누가 이나라 를 지켜주고
    누가 당신을 지켜줄수 있단 말인가?
  • 김수민 2005/03/31 [15:22] 수정 | 삭제
  • 일본 내 평화헌법 지지자들에게 너처럼 칠칠맞은 놈들 때문에 일본이 이 지경이 되었다던 극우파들과 그 메가폰 차량이 생각난다.
  • 용기가 가상함 2005/03/31 [13:32] 수정 | 삭제
  • 님이냐 말로 발닦고 디비자요.
    당신이 그것 밖에 안되는 그릇이구나 하는 생각만 듭니다.
    그런 그릇으로 이런 게시판에 낙서 하지 말길...
    제발 부탁합니다.
    더 이상 당신과 얘기 하는것 자체가 제가 부끄럽네요.
  • 김수민 2005/03/31 [12:39] 수정 | 삭제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을 잇는다면서요? 세종이 임시정부라도 세웠나 보죠? 사회적 불의와 악습을 빨랑 타파하시려거든 간도닭짓부터 중단시키세요. 국제적으로 구획된 국경을 서로서로 잘 지키고 잘 지켜줄 생각이나 하세요. 동북공정 지랄한다고 간도닭짓하고 독도 앗으려 한다고 대마도의날, 지정하고 그게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거예요? 빈 라덴은 그럼 평화운동가예요?
    역사의식과 헌법정신을 가득 실어 대답해줄게요. 에라이, 또라이야. 발 닦고 디비자는 게 인류를 돕는 일이야.
  • 헌법 2005/03/31 [09:53] 수정 | 삭제
  •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과 더이상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헌법 전문을 적어 놓을께요.

    悠久한 歷史와 傳統에 빛나는 우리 大韓國民은 3·1運動으로 建立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法統과 不義에 抗拒한 4·19民主理念을 계승하고, 祖國의 民主改革과 平和的 統一의 使命에 입각하여 正義·人道와 同胞愛로써 民族의 團結을 공고히 하고, 모든 社會的 弊習과 不義를 타파하며, 自律과 調和를 바탕으로 自由民主的 基本秩序를 더욱 확고히 하여 政治·經濟·社會·文化의 모든 領域에 있어서 各人의 機會를 균등히 하고, 能力을 最高度로 발휘하게 하며, 自由와 權利에 따르는 責任과 義務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國民生活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世界平和와 人類共榮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子孫의 安全과 自由와 幸福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年7月12日에 制定되고 8次에 걸쳐 改正된 憲法을 이제 國會의 議決을 거쳐 國民投票에 의하여 改正한다.
  • 여기에 2005/03/31 [09:45] 수정 | 삭제
  • 여기에 또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군요.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이 또 있구요. 님이 그런 사람있었다니 싫망입니다.
  • 김수민 2005/03/31 [09:18] 수정 | 삭제
  • 민족이라는 건 어차피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무신 자연스럽고 유구한 개념이라 헛소리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한국이 단일민족국가입니까? 웃기는 소리하지 마세요. 한 집안에도 북방형, 남방형에 서양인처럼 생긴 가족 등 별야별 사람 다 있어요. 민족이 실체가 없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 실체는 근대에 확립된 거지 그게 무슨 유전자나 혈액에 증거가 있다고 보세요?
    그 민족이 조선이나 한국이나 같다고 해서 그게 같은 나라입니까. 중국이 청나라입니까? 말이 되는 소릴하세요. 한국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60여년이예요. 정신 차리세요.
    님이 공부하라는 역사는 역사적 사실인가 본데 간도협약이 잘못된 걸 공부하라는 뜻이겠죠. 그러나 역사라는 건 시각이고 사관이 뼈대가 되는 겁니다. 님이야 그 공부나 더 하세요. 그따위 사실 모르는 사람도 인터넷 10분만 검색하면 다 압니다. 하지만 님 같은 분은 생각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 생각, 구글로 검색해도 못 찾습니다.
  • 김수민 2005/03/31 [09:14] 수정 | 삭제
  • 남의 땅 자기 땅이라 우겨서 되찾아서 하고자 하는 게 뭡니까.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니까 지금 주장해도 된다구요?
    먼 옛날과 최근을 가르는 기준이 뭡니까.
    1909년도 되는데 그 까이꺼 19세기 것도 같이 해버리세요.
    19세기 것도 되는데 18세기 것도 해버리구요.
    국민국가 대한민국이랑 옛날 조선이랑도 연결이 되는데
    고려야 왜 연결이 안 되겠어요.
    당장에 고토 다 수복하세요.
    독립운동을 했고 뿌리가 있다구요? 이 참에 임시정부 있는 상하이도 수복하시고, 중앙아시아에까지 손을 뻗치세요.
    민족주의랑 내셔널리즘이랑 안 달라요. 결국 그 모양 그 꼴이거든요.
    독립국가 수립하고 칠칠맞게 당하고 살지 말자, 는 수준으로
    끝나는 민족주의 못 봤습니다. 반증하려면 님이 몸소 보여주세요.
    내셔널리즘이랑 뭐가 다릅니까. 엄밀히 얘기해 내셔널리즘 번역어로도
    국가주의보다 민족주의가 더 적당합니다.
  • 한마디만 더하죠 2005/03/31 [01:50] 수정 | 삭제
  • 민족주의랑 레셔널리즘이랑 다르다는 말씀 옳습니다.
    일본의 극우 주의랑 간도 되찾는것랑 뭐가 같나요?
    전 저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생각 해서 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때문에 빼앗긴 간도를 되찾는것이 무슨 일본의 극우주의랑 같습니까?
    말씀 한번 해보셔요.
  • 참 어리가 없음 2005/03/31 [01:46] 수정 | 삭제
  • 김기자님 말씀 들어 보면 간도를 되찾자는것이 일본의 극우주위랑 같다고 얘기 하시네요. 불함리 하는것을 주장 하는것이 뭐가 잘 못 됬나요? 제가 예기 하는것이 고조선의 일인가요? 전 1909년의 일을 얘기 했던 것입니다.
    물런 1909년의 일이 먼 옛날(?) 이라고 얘기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100년도 안지난 얘기 입니다. 그리고 그땅에서 우리 동지들이
    독립 운동을 했던곳이고 우리 한민족의 뿌리가 있었던 곳 입니다.
    김 기자님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역사 공부를 하시는것이 어떻지...
    공부좀 더 하셔야겠네요...
    여기서 얘기 하지 말고 멜 주셔요. 거기에 대한 얘기는 충분히 반론 하겠습니다.
    김기자님 전 김원웅이 어떤 사람인줄 모름니다. 얼굴 한번 봤습니다.
    그것도 멀리서.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이는것처럼 님의 앞날이 보입니다.
  • 김수민 2005/03/30 [23:57] 수정 | 삭제
  • 흔히 이야기하죠. 민족주의는 내셔널리즘이랑 다르다고. 간혹 다르긴 하지만 결국 다 똑같습디다.
    님의 언행을 보아하니 더욱 그러하군요. 일본 극우놈들도 "우리땅인" 독도를 "되찾자"고 그러는 거거든요. 꼬라질 보아서 서로 대립할지언정 한국 민족주의나 일본 내셔널리즘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게 입증이 되는군요.
    제 문제의식이 겨냥하는 바는 '간도되찾기'님이 저지르는 오류와 몰상식에 그대로 다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김원웅이 그나마 낫다는 것은 그 양반이 무리해서 일삼는 주장 및 준동은 어차피 현실화되기 불가능하거든요. 다만 이라크파병 반대하고 자주적 목소리 내는 양반이 여당의 의장 또는 상임위원에 앉아 있다는 것이 대내외적인 상징성은 있다는 거겠지요. ㅎㅎ
  • 김수민 2005/03/30 [23:54] 수정 | 삭제
  •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참 알 수가 없는 운동이 간도 되찾기입니다. 옛날에 불합리하게 체결된 것의 불합리를 주장하는데, 그게 불합리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돠 되찾아오자는 것은 명백히 다른 차원이지요. 아마 그런 식으로 전세계의 각 국가가 문제제기를 하는 한 세계적으로 영토분쟁은 끊임이 없을 겁니다. 아예 조선이 아니라 고려, 고구려 때 있었던 영토변화까지 문제 삼아버리면 어떨까요? 어차피 대한민국과 조선은 다른 몸, 그 둘을 억지로 이으면 고려라고 못 이을 바는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할 일은 현재 구획된 국경을 잘 지키고 안보와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지 남의 땅으로 소속된 걸 이거 옛날에 자기 거라고 우기는 짓거리가 아니예요. 그럴 거면 아예 첨부터 독도를 내줘버리고 거래에 들어가던가.
  • . 2005/03/30 [15:01] 수정 | 삭제
  •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간도 이야기가 나와서 자세하게 읽었습니다.
    간도 이야기를 하면서 민족주의라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 하기엔 김원웅 민족주의 입니다. 그 민족주의가 어떻습니까 ? 민족주의가 일본의 극우 세력과 같다는 겁니까? 우리땅인 간도 대마도를 찾는데 왜 민족주의라고 들먹 거립니까? 일본이 1909년 간도협약으로 팔아 먹은 우리의 영토를 되찾자는것이 민족주의 입니까? 김기자님 영토에 있어서 국가에게는 소중한것입니다. 그 영토를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것이 민족주의라면 저도 민족주의론자에 포함 되겠네요. 걍 지나 가다가 제 생각을 적어 봤습니다.
  • 그람 2005/03/29 [07:55] 수정 | 삭제
  • 온에서 너의 글이라도 보니 반갑구나.
    연락해라. 언제 한 번...
  • zzz 2005/03/28 [16:28] 수정 | 삭제
  • /다른개혁당원
    유시민의 전원위원회 주장에 호응했던 게 안개모입니다.
    동상이몽이었더라도 한배를 탔었읍니다.
    그래서 말이 많은 겁니다.당시 유시민은 대놓고 탄핵풍 비슷한
    역풍을 걱정했었으니까요.
  • Dark... 2005/03/28 [13:52] 수정 | 삭제
  • 김종필도 못따라 갈만한 왕 사쿠라...
    ...
    개혁당을 지나왔다면 그 말뜻을 알리...
  • 다른개혁당원 2005/03/28 [10:56] 수정 | 삭제
  • 김수민님이 글은 단순해서 좋긴 하지만, 비객관적인 편견에 의한 감상이 아닌가 싶군요.

    전원위원회 건을 들어 유시민은 국보법폐지에 찬성안하는 사람인냥 생각하셨다면 오산이고, 기본적으로 유시민도 국보법폐지에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님이 비교하신 다른 의원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 현실론적인 방법으로서 한가지 방안을 제시한 것이죠. 결과적으로 국보법문제 시간만 끌다가 약속한 시간 넘긴것 아닙니까. 유기명 투표에 의한 전원위원회 방식으로 혹시나 갔다면 과연 열린당에서 국보법폐지에 대놓고 반대할수있을까요? 한나라당이 전원이 폐지를 반대했어도 충분히 표결로서 압도할수 있었습니다.

    님은 지금 안개모는 간과하고 계시군요. 그 안개모들이야말로 열린우리당을 도로민주당으로 만들거나 혹은 더 못하게 만들어가는 형태를 지난 시간동안 보여주었습니다. 그 안개모와 구당권파 이런사람들의 비호를 받고있는 이들이 바로 문희상이고 송영길이고 그러합니다.

    김두관,김원웅과 유시민이 기본적으로 다른게 뭐가 있습니까.
    오히려 선명성은 유시민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똑같은 정치인인데 김두관,김원웅이 그나마 낫다고 하면서, 같은 동류인 유시민은 전혀 상반된 평가를 하는 자체가, 감정적 편견이 작동했다는 증명입니다.

    님의 글은 기본적으로 입맛에 맞는 몇가지 사례만을 찝어서 글을 쓰셨는데, 제가 볼때는 개혁당원으로서 유시민을 따라가지 않았던 부류로서의 감정적 편견이 상당히 작용하는것 같군요.

    같은 개혁당 출신으로서 오히려 전 님과 다르게 생각하거든요.
  • 올드보이 2005/03/28 [04:36] 수정 | 삭제
  • 락큰록 다이어리 다시 시작하실런지요? 예전 대자보에서 기타기순님과 김수민의 락큰롤 시리즈를 즐겁게 봤는데..

    김수민님은 예전 대자보를 빛내 주신 분인데... 대자보 검색에서 '김수민' 기자이름 넣고 한번 쳐보시길... 대중음악 못지않게 시사문제도 진보적 스탠스로 명문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나저나 2년간 어디가셨나요? 연륜이 있으신 분 같으니 군대는 아닐거고, 유학 등 외국생활 하셧는지? 어쨋거나 대자보 명논객을 다시 보게 되어 기쁩니다. 대자보의 저력, 요즘 매일 충실하던데 김수민님 화이팅입니다^^
  • 흠.. 2005/03/28 [03:57] 수정 | 삭제
  • 누군데 논객 돌아왔는가란 말을 하죠...필자 설명을 좀 부탁(아는데로.^^.)
  • 눈팅이 2005/03/28 [03:46] 수정 | 삭제
  • 햇수로 한 3년쯤 된 것 같다.
    달라진 성향...
    그러나 변함없는 태도.
    반가운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