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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처럼, 때릴수록 단단해진 진보의 아들
[클릭!총선현장] 민주노동당 서울 강북을위원장 박용진후보
 
최양현진   기사입력  2004/02/23 [10:16]

"어쩌면,
실현되지 못할 결의를 밝히는 것은 사막처럼 슬픈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동지들의 기대 앞에 이렇게 나서는 것보다 조용히 물러서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는 지금 동지들에게 제 자신의 결의를 밝히기 보다 여러분의 높은 결심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박용진 후보의 출사표 중)

민주노동당

▲박용진 후보     ©박용진후보홈페이지
오는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들은 우리에게 진보정치가 현실 정치권에 들어가 기존 정치와 진보정치가 어떻게 다른가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다음 선거에서 그들이 단지 이상이 아닌 현실임을 명확히 관철시킬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들에게 한가지 약점이 있다. 경남의 공단지역을 둘러싼 진보 벨트는 막강한 위력을 떨치고 있지만 한국정치의 1번지라고 불리는 수도권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깃발을 들고 당 지도부가 모두 피하는 현실에서 단 한사람 정치의 중심 서울에 진보정치의 깃발을 들고 외롭게 싸우고 있다. 강북을의 박용진 후보가 바로 그이다.

해방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는 수많은 정당이 나타나고 사라져 갔다. 그러나 이 많은 당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새로운 당이 아닌 단지 이름만 바뀌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기존 세력의 말장난에 불과했다.

현재의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정당은 해방 이후 줄곧 여당의 이름을 가지고 명패만 바꾼 정당이였다. 그리고 만년 야당이었던 새천년 민주당과 여당 아닌 여당으로 불리우는 열린우리당 조차 50여년간 야당 생활에서 자기 분열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 정당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의 강고한 틀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정당과 세력에도 기득권을 주지 않고 자기들만의 게임을 해왔고 거기에 국민들을 들러리로 등장시켜왔다.

그러나 이제 이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당. 진보정치의 기치를 든 정당. 민주노동당이 이 강고한 벽에 금을 내고 들어가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입학

1989년.자신이 운동을 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해보다 가장 많은 기억에 남을 해이다. 차가운 겨울의 동토를 깨고 들려오는 봄의 목소리.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 서경원 의원의 방북.그리고 임수경씨의 방북과 분단 이후 최초의 군사분계선 돌파.

세상은 온통 동굴의 우상을 벗고 새롭게 펼쳐진 통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제 북한이란 새로운 세계를 다시 직,간접적으로 경헙하였다. 그리고 그해 마지막 교육에 있어서 참교육이라는 희망을 부르며 학교에서 거리로 뛰어다니며 전교조를 만들었다.

당시 박용진은 고3이었다. 그 때 중 고등학생 누구나 겪었던 일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선생님의 강제 퇴직과 거리에서의 경찰에 의한 선생님의 폭행을 봐야만 했다. 그리고 고등학생에게 주어진 대학이라는 사회적 억압을 몸으로 맞서며 그 선생님을 지켜야만 했다. 이 때 박용진 또한 그런 고등학생 중에 한명이었고 지키려고 몸부린 치던 그 시절 세상을 알려준 선생님이 이수호(현 민주노총 위원장) 선생님이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1971년, 유신과 산업화, 7.4 남북공동선언과 베이비붐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성장했고 대학에 들어가야 했다.

학생운동과 사회생활의 시작

90년 들어간 대학은 낭만과 축제의 장이 더 이상 아니었다. 국민들의 뜻을 배신하고 만들어진 거대여당 민자당(현 한나라당).

또 다시 국민을 속이는 파렴치한 정치적 행태는 전 국민을 절망속에 던져버렸고 5월 축제는 최류탄과 전경의 군화발 속에 사라져 갔다. 그속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야 했고 그 새로운 희망은 더 이상의 기존 정치가 아닌 새로운 정치적 틀을 만들어 가야 했다. 그리고 일부는 상대적 우위에 있는 기존 정당과의 정책 연합을 통한 희망을 찾아갔고, 또 다른 일부는 더 이상 기존 정당의 속임수가 아닌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박용진의 선택은 후자로 자신의 행로를 굳혀가게 되었다.

과 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을 통해 학우들 사이에서 신뢰를 만들어 간 박용진은 1993년 겨울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후보로 입후보한다. 그리고 그 해 당당히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고, 당시까지 학생운동 내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자신의 그룹을 이끌고 한총련의 대의원으로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 산하에 북부지역 10여개 학교를 대표하는 북부총련 의장에 당선되어 1994년 한해를 우루과이 라운드 투쟁 등 사회적 현안을 학생운동 지도부로 현장에서 싸워왔다. 그리고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로서는 드물게 현역으로 군에 입대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로 돌아온 그는 대학시절 집회에서 경찰의 군화발에 산화해간 '김귀정열사' 추모사업회 일을 맡아 진행하면서 학생들과 졸업생 사이에 점차 잊혀져 가는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였다. 학교 졸업과 함께 그는 전국연합의 정치부장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딪게 된다.

정치부장에게 건넨 장미꽃 한송이와 진보정당의 깃발.

전국연합에서 정치부장으로 일을 시작한 후 97년 국민승리21의 대변인실에서 권영길 후보와 함께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과 이회창, 이인제의 소위 말하는 빅3의 대결속에서 군소 후보였던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에 대한 신문의 소개는 한줄도 소개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러한 언론의 행포에 대해 싸우기 보다는 소리없는 자기 만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매일 아침 각 신문, 방송사의 정치부장 데스크에 권영길 후보의 보도자료와 함께 장미꽃 한송이씩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 이 싸움은 어느정도 효과를 얻었고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정치부가 조금씩 권영길 후보에 대한 동향을 취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1998년 진보정당 창당 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으며, 그도 당연히 준비위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2000년 총선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이름으로 강북을에서 출마를 하였다.

희망을 보여준 선거와 구속

2000년 총선도 진보정당을 국민들에게 알리기에는 너무나 생소하였다. 새정치 국민회의가 새롭게 이름을 바꾼 새천년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틈바구니에서 민주노동당의 목소리를 내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더구나 그의 상대는 당시 정치계의 거물로 불리는 조순형(현 새천년 민주당 대표) 의원이었다. 선대부터 내려온 정치계의 주요가문으로 30살의 젊은 청년이, 그것도 기존 정당이 아닌 전혀 생소한 진보정당의 이름으로 싸우기에는 처음부터 역부족이였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민주노동당의 이름을 얘기하였고 처음에는 등을 돌리던 사람들도 한 두명씩 그의 얘기에 귀기우려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의 노력이 통하여 당시 서울지역에서 가장 높은 13.3%라는 득표율을 획득하였다.

이후 박용진은 지역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꾸준한 주민과의 만남으로 민주노동당의 가능성을 높여갔다.

그러나 2001년 3월 민중대회에서 김대중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연설도중 트럭에서 끌려내려져 구속되었다. 그리고 3년형기 중 25개월 수감 후 2003년 4월 사면 출소되었으나 복권은 되지 않아 현재 피선거권이 박탈당해 있는 상태이다.

박용진의 복권과 민주노동당의 미래

아직도 그의 복권은 요원하기만 하다. 어쩌면 이번 선거까지 안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이다.

어짜피 기존정치는 자기들의 기득권을 다른 누구에게 주려고 하지도 않았고 주지도 않았다. 단지 장식품을 달아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박용진 위원장은 다만 함께하는 국민들과 그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새로운 도전으로 현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길에는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다.

"강철은 때릴수록 더욱 단단해 진다"고 했다. 그는 강철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 강철이 세상에 나올 때 그때가 민주노동당의 진보세력 수도권벨트를 만드는 중심이 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한다.

"민주노동당의 선전으로 이회창 정권이 들어서면 어쩌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일부의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회창이 아니라 어떤 보수 정권이 들어서도 민중의 혹독한 겨울을 이끌고 왔던 현 정권이 노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에겐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아니라 '누가 진정 민중의 편에 서서 싸우는 야당 노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이 더 우선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지지율과 이익에 따라 굶주린 이리떼마냥 몰려다니는 저 보수정당과 정치인들과 민주노동당 중 과연 누가 민중의 편에 서서 야당의 깃발을 들겠습니까. 꿈과 미래, 강력한 유일야당. 답은 이미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 당신의 지지와 100만표의 힘은 2년 뒤 이 유일야당이 국회에까지 진출해 민중의 이익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박용진 후보의 2000년 대선 기간 옥 중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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