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나가사키의 오카 마사하루 씨를 아시나요?
[답사일지3] 거짓의 현장과 진실의 현장 공존하는 나가사키의 과거와 현재
 
김영조/이윤옥   기사입력  2010/09/05 [20:43]
기타큐슈의 치쿠호(筑豊) 탄광일대를 둘러보고 난 이튿날 아침(8월 8일) 답사단은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미군기지 도시 사세보에 들렸다. 사세보(佐世保)하면 네덜란드 마을로 알려진 ‘하우스텐보스’를 떠올릴 사람이 많은데 하우스텐보스(Huis Ten Bosch)란 네덜란드어로 ‘숲의 집’이란 뜻으로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이 살던 하우스텐보스 궁전을 재현해 놓은 데서 붙은 이름이다. 나가사키 하우스텐보스는 최근 한국 여행사들이 단독 상품으로 만들어 관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다녀왔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 알려진 관광지이다. 그러나 사세보전체에 83%를 차지하는 미군기지 시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해발 364미터에 있는 유미하리다케 전망대에 오르니 사세보 미군기지 시설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더웠지만 쾌청한 날씨 덕에 탁 트인 바다가 일품이다. 바로 코앞에는 긴 타원형 해안에 자리한 군함들이 시야에 들어왔고 반듯하게 꾸며진 미군시설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이날 사세보 미군기지를 안내해준 사람은 미야노유미코 씨와 미군범죄피해자구호협회 도유사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재일동포 3세였는데 사세보에 있어서의 미군기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사세보에는 미군기지와 일본 자위대 기지 등이 있으며 이와 더불어 요코스카 해군기지, 아츠기 해상자위대, 요코다 공군사령부와 오키나와 후텐마, 가데나, 화이트비치까지 일본 내의 주요 미군기지와 태평양에서의 미군의 역할 등에 비교적 소상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푹푹 쪄대는 날씨에다가 군사시설과 작전이란 것이 워낙 복잡하고 어려워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미야노 씨 이야기에 답사단은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미야노 씨는 60살을 훨씬 넘은 나이의 여성인데도 사세보 미군기지 반대 시민운동에 열심이었다. 
 
▲ 해발 364미터의 높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미군기지(왼쪽) 미군기지를 설명하는 미군범죄피해자구호협회 도유사 사무국장     © 김영조
올해로 42년째를 맞는 이 단체는 매월 30여명이 ‘기지반대’ 펼침막을 들고 사세보 시내 행진을 하면서 지역주민들에게 미군기지 철수, 전쟁반대, 핵무기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뜨거운 태양 볕이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군기지와 시민활동에 대한 안내를 위해 단걸음에 나와 준 미야노 씨 일행이 고맙기만 했다. 그들은 답사팀의 어르신인 최낙훈 태평양전쟁보상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이 준비한 아리랑 부채를 들고 우리를 태운 버스가 사세보를 떠나도록 손을 흔들어주어 답사단의 가슴을 뭉클케 했다
 
▲ 미군기지 도시답게 사세보 명물 ‘사세버거’는 인기였는데 젊은 친구들도 그 맛을 보려고 줄 서 있다     © 박병인

나가사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는 사세보의 명물인 사세보햄버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줄여서 ‘사세버거’라 불리는 햄버거는 사세보의 미국문화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답사단의 젊은 친구들은 시간적 여유도 없었는데 어느새 ‘사세버거’를 사먹었다고 해서 나이 든 분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와 더불어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원폭의 도시로 기억되는 도시다. 사세보를 떠나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나가사키 평화 기념관 안팎에서는 다음날인 8월 9일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추도식을 위한 무대장치며 꽃 장식 등이 한창이라 다소 어수선했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가장 큰 피해국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임에도 일본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맞은 원자폭탄 세례의 ‘피해국 일본’으로 가르치려고 ‘국립 나가사키 원폭 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을 세웠다. 한글판 홍보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건립이유를 밝히고 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시민과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피폭자들에게도 평생 치유될 수 없는 마음과 몸의 상처, 방사선으로 말미암은 건강장해를 남겼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바친다. 우리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할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핵무기 없는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1996.4.’ -나가사키 자료관 홍보물-


▲ 희생된 한국인 이야기가 빠진 한글판 ‘국립 나가사키 평화기념관’ 홍보물     © 김영조
   
▲ 나가사키 피폭으로 멈춰버린 시간, 나가사키 평화기념관 전시물     © 김영조
 
언뜻 보면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 구축이라는 말이 상당히 인도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문제의 핵심을 두 가지로 줄여보면, 왜 나가사키는 핵폭탄을 맞았나? 또 하나는 당시 강제연행으로 나가사키에 있던 조선인들의 피해 보상과 치료문제는 어찌 되었나? 로 요약해볼 수 있다. 그 답은 자료관 안에 있었다.
 
‘피해국 일본’에 초점을 맞춘 지하 자료관을 보러 내려가는 나선형의 계단은 어지러웠다. 한 바퀴를 돌아 내려가니 자료관 들머리 공간에서 서너 명의 여성들이 추도식에 쓸 꽃 장식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지 간간이 소곤대던 아줌마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들어선 자료관에는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 멈춘 찌그러진 시계가 걸려있고 폭탄이 떨어지던 그날의 피해를 고스란히 재현해둔 모습이 여러 전시 공간에 마련되어 있었다. 전시실마다 발 디딜 틈 없이 일본 전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단체로 온 어린이들이었다. 

‘자자 잘 보세요, 여기 까맣게 탄 도시락이 있지요? 원폭을 맞은 곳에서 700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던 이와키마치 초등학교에 다니던 14살 츠츠미양의 도시락이랍니다. 새까맣게 탔지요? 원폭은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미군이 폭탄을 떨어뜨린 거랍니다.’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온 인솔교사의 말을 곁에서 가만히 들어보니 이런 식이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들은 잘못도 없는 일본에 미군이 마구잡이로 폭탄을 떨어뜨려 츠츠미같은 어린아이들이 죽어갔다고 믿는 양 열심히 메모를 한다. 

▲ 피폭으로 타버린 여학생의 도시락을 전시하여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나가사키평화기념관     © 김영조
미군은 왜 나가사키에 폭탄을 떨어뜨렸는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일본어판 홍보물에도 언급이 없고 자료관 안에서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는 교사들도 이 부분은 비켜가면서 ‘미국의 악행’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전시된 것들도 미군의 폭탄투하와 핵무기의 공포만을 전시하고 있을 뿐 나가사키가 폭탄을 맞아야 했던 이유는 눈 씻고 봐도 없다. 이런 판국이니 나가사키에 징용으로 와 있던 조선인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의 피해가 언급될 리 만무다.

세계 2차 대전의 핵폭탄을 맞은 일본의 죄악상을 아는 우리에게 있어 국립 나가사키 평화 기념관의 전시물은 하나의 쇼로만 보였다. 그렇다 쇼다. 이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쇼다. 왜 자국민에게 전쟁에 날뛰다가 한 대 얻어맞은 것이라는 설명을 안 하는가? 그 전쟁에 강제 동원된 수십 수백만의 조선인과 아시아인이 죽어 간 것에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아버지가 강제연행된 박남순(67살) 씨는 평화 기념관을 나오며 말했다. “여긴 평화 박물관이 아녀, 은폐기념관이며 자기들의 피해 기념관이지.”라며 혀를 찼다. 어찌 한국인으로서 그런 생각이 안 들겠는가!

국가가 만든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 속에 겉도는 알맹이 없는 자료관을 나와 찾아간 곳은 ‘가해자 일본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오카마사하루 기념관’이었다.  

정식 명칭은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지만 피해시각으로 만든 국립 ‘나가사키 평화 기념관’과 차별화하기 위해 ‘오카마사하루 기념관’이라 부르는 게 훨씬 찾기가 쉽다. 이 두 곳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기념관이지만 모두 ‘평화’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것은 현재 일본 내에서 ‘평화’라는 말의 개념이 정립되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쓰임을 바로 보여주는 예로 나가사키 시내는 8월이 되면 ‘평화’ 곧 ‘PEACE’ 거리로 변한다.

▲ 일본을 피해국으로 꾸며놓은 나가사키 평화기념관 (왼쪽), 가해의 역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오카마사하루자료관     © 김영조

오카마사하루 자료관이 들어 서 있는 곳은 국립 나가사키 평화 기념관보다 접근성이 훨씬 떨어지는 서쪽 언덕이란 뜻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 있다. 수십 대의 대형 버스를 세워 둘수 있는 ‘국립 기념관’에 비해 버스는커녕 승용차 하나 세울 데가 없는 가파른 언덕길을 답사단 일행은 찜통더위 속에 헉헉거리며 올랐다. 답사단 중에는 칠순의 고령자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힘든 내색이 없다. 얼마를 올랐을까? 비탈진 언덕배기 주택가 입구에 낡고 허름한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일시에 45명의 답사단 일행이 들어서니 좁은 현관은 발 디딜 틈이 없어 2층에 오르는 계단 입구까지 올라서서야 겨우 냉방된 현관문이 닫힐 정도로 비좁았다. 접수대에 있던 한국인 자원봉사자가 오카마사하루자료관의 설립 취지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전해준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의 희생자가 된 외국인들은 전후 50년이 되도록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버림받아왔습니다. 가해의 역사를 숨겨왔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하여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만큼 국제적인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이 평화자료관은 일본의 무책임한 현 상태를 고발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친 고 오카마사하루 씨의 유지를 계승하여 시민의 손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권력자들 눈에는 이곳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겠지만 이곳은 위대한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저희 평화자료관을 방문하시는 한 분 한 분이 가해의 진실을 이해하고 피해자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라도 속히 전후 보상 실현과 전쟁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데 헌신해 주실 것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공간은 협소했지만 각 전시실에 전시된 전시물들은 알찼고 하나하나에 시민들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평생을 ‘가해의 역사’를 기록하고 알리기 위한 일에 몰두하다 쓰러진 오카마사하루 씨의 일생이 고스란히 자료관 전시물에 배어있음에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케 한다. 

 
▲ 오카마사하루 자료관에서 만드는 소식지 <니시자카다요리>에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원폭’을 다루는 사실에 놀랐다는 일본인의 감상문이 빼곡하다.     © 김영조

*정규 교육에서 일본은 ‘패전국’이라고 배웠는데 이곳을 와보고 이것이 피해자적 시점이었다는 것을 았았다. 대다수의 일본인은 나처럼 생각하고 있다. 나는 국가교육에 속은 느낌이다. (21살 남자 대학생)

*다른 자료관이나 박물관에서 다루지 않는 <강제연행><조선인피폭자> 문제 등이 사진으로 전시되고 있는 게 특이하다 (25살, 남성)

*사진을 보고 증언을 듣고 놀랐다. 너무 괴롭고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물이 났지만 내가 울기보다는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일본이 사죄하고 보상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18살 여성)

*정말 대단하다. 전국에 보기 드문 반전자료관(反戰資料館)을 보고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60살 여성).


이것은 <오카마사하루 기념관> 누리집과 니시자카소식지<西坂だより, 2010.7.1>에 실린 일본인들의 반응이다. 초등학생으로부터 대학생, 중년,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이 자료관 방문자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1995년 10월 1일 문을 연 이 자료관을 있게 한 사람이 바로 오카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목사이다. 그는 목사이자 나가사키 시의원을 지냈고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대표를 맡으면서 조선인들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 비좁은 전시관인지라 빽빽이 전시해도 모자라 계단까지 활용하고 있다.     © 김영조
 지금이야 ‘일본이 전쟁 책임이 있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지만 패전 후 상당기간 동안 ‘일본의 책임론’은 금기였었다. 그런 가운데 오카마사하루 목사는 주머니를 털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나가사키에 숨겨진 조선인 피폭문제에 매달렸고 실태조사를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그는 항상 차별받고 있는 약자 편에서 서서 일본정부와 강제노역자들의 노동으로 배를 불린 악덕 기업을 향해 반성과 보상을 촉구해왔으며 만년에는 ‘일본의 가해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현재도 남아있는 차별 철폐와 정부의 보상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자료관 건립’을 구상했으나 자료관 건립을 보지 못하고 1994년 7월 21일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기념관을 세우기 위한 토지문제와 건물 신축비 자금부족으로 애를 먹었으나 1995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중심이 되어 그의 뜻을 받드는 수많은 시민의 도움으로 토지 매입과 건축비를 마련 1995년 10월 1일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이 문을 열었다. 설립기금 4,500만 엔은 25년 동안 월 18만 엔씩 갚는 조건의 대출금과 기부금 등으로 마련했으며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정부나 행정기관의 재정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교육시설에 주는 세금 감면 혜택은 물론 도로 안내표지판 설치조차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하니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대우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운영경비는 회원들의 회비와 찬조금, 입장료로 충당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의 도움이 큰 힘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답사단 일행도 작은 마음이지만 십시일반의 정성을 모아 평화자료관 측에 전달했다.

수많은 자료는 장소가 좁고 협소한 탓에 수집한 자료들 대부분을 제대로 전시 못 하고 수북하게 쌓아놓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강제연행 전시실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강제연행 때 자료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광산, 토목현장 등에서 극도로 열악한 작업환경과 학대 속에서 강요된 가혹한 생활상을 재현한 자료실에서 강제 연행되어 전사한 아버지를 떠올렸음인지 답사단의 박남순 씨는 전시실을 돌아보는 동안 여러 번 눈물을 보였다. 중국 침략의 최대 학살사건인 남경대학살 전시실, 재일 조선인의 피폭 차별을 고발하는 전시실, 종군 위안부 실태 고발실에 이은 설립자 오카마사하루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답사단원들은 다시 한 번 가해국 일본의 과거 군국주의 만행에 치를 떨며 숙소로 향했다. 
 
▲ 오카마사하루 자료관에는 평화를 비손하는 염원들이 담겨있다.     © 김영조

이날 숙소는 나가사키 시립 히요시 청년의 집(日吉靑年の家)이었는데 우리로 치면 청소년 수련원 같은 곳이었다. 산속 깊은 곳에 있어 멀리 구마모토가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전망이 좋고 밤새 풀벌레 소리가 이국의 여름밤을 수놓았다. 인상적인 것은 수련원 담당자가 가지고 들어온 작은 침대 모형 상자였는데 마치 갓 입소한 초등학생에게 하듯이 침구의 위치와 개고 접는 모습을 어찌나 익살스럽게 말해주는지 히요시 수련원 이야기는 답사단의 추억담 중 압권이었다. 처음엔 수퍼가 멀고 에어컨이 없는 등 불편함도 없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일류호텔에서 맛볼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으니 곳곳에서 겪게 되는 불편한 잠자리, 먹거리 등은 오히려 양념이라 해도 좋을 일이다.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와 창 너머로 푸르게 펼쳐있는 다치바나 바다를 바라보며 눈이 떠졌을 때는 하루쯤 더 묵고 가고 싶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나왔지만 수련원 앞마당에는 원폭 희생자 추도식에 맞춰 우리를 싣고 갈 버스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8월 9일 월요일 아침 답사단은 전날 들른 국립 나가사키 평화 기념관을 다시 찾았다. 폭심지(원폭 투하된 곳)에서는 일본인들이 주최하는 추도식이 거행되었지만 우리는 중앙의 추도기념관 뒷 모퉁이 작은 언덕에 세워진 원폭 조선인 희생자추도비 앞으로 갔다. 추도비 주변에는 벌써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일본회원들이 일찌감치 나와 이날의 행사전단을 나눠 주는 등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 

묵념에 이어 이날 추도식은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대표인 다카자네 야스노리 (71살) 씨의 추도식사로부터 시작되었다.
 
▲ 나가사키평화공원 안의 나가사키원폭조선인희생자 추도비     © 김영조
    
▲ 나가사키원폭조선인희생자 추도비 앞에서 추도회를 하는 모습     © 김영조
  
그는 추도식사에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조선인이 원폭에 희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강제 병합 100년을 맞이하지만 아직도 일본국민 중에는 한일 간에 이뤄진 불법조약에 의한 강제 국권침탈을 합법적인 국가이양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조약이며 일본의 기만정책이었다. 따라서 한일병합조약은 불법이며 무효이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없었다면 한국의 남북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을 저해하는 정책을 한결같이 펼쳐왔다. 일본의 이러한 대립과 분단고착 정책에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 위안부문제와 강제연행자문제, 조선인 원폭피해자 문제 등등 미해결 문제를 정부는 어서 해결하라.”라고 촉구하면서 정부에 보내는 결의문을 낭독해 나갔다. 

1. 한국병합조약은 당초부터 불법 무효라는 것을 선언할 것
1. 북한에 거주하는 피폭자에게 피폭자 원호법을 적용시킬 것
1. 개인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고 근본적인 전후보상법을 제정할 것
1. 조선 고급학교 무상화와 더불어 초중급 학교의 국비에 의한 무상화를 꾀할 것
1.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실현할 것

추도비 앞에 모인 이백여 명의 한일 시민들은 다카자네 대표의 쩌렁쩌렁한 결의문 낭독에 커다란 손뼉으로 화답했다. 비록 시민 단체의 작은 목소리이긴 하지만 이런 작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인다면 벽이라고 여겨지던 굵은 바위도 뚫을 것만 같았다. 작은 희망의 불씨를 저마다 간직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추도식에는 일제 패망기에 나가사키로 징용 간 뒤 원폭에 희생된 피폭 한국인들의 비극적인 삶을 그려낸 <까마귀>의 작가 한수산 씨도 모습을 보였는데 그는 인사말에서 “지금껏 일본은 변한 게 없다. 다만, 나가사키의 조선인 희생자를 기억해주는 일본인들에게 매년 감명을 받는다. 이름 없는 조선인을 위해 이름 없는 일본인이 세운 추도비가 있기에 나는 나가사키를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 추도모임에서 인사말을 하는 <까마귀>의 한수산 작가(왼쪽), 대금 연주로 원혼들을 위안하는 “한국원폭피해자2세회” 이태재 회장     © 김영조
 
 
행사에는 “한국원폭피해자2세회” 이태재 회장이 대금으로 아리랑, 고향의 봄을 연주하여 추도식에 참석한 한국인들을 울렸고 참가자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는 글쓴이와의 대담에서 “대금은 5년 전부터 공부해왔다. 이 억울한 원혼에게 어떻게 하면 위안이 될까를 생각하다가 서투른 솜씨지만 대금 연주가 도움될 것이란 생각으로 연주했다.”라고 얘기했다.

이 자리에는 한국에서 온 40여 명의 청소년이 참여하고 있었다. 답사단을 이끄는 “아힘나평화학교” 김종수 교장은 청소년들이 시모노세키 강제연행부터 피폭까지 과정을 돌아보는 여행을 통해 이름 없이 고통 받고 묻혀갔던 분들을 생각하도록 기획했다고 말했다. 참여 청소년 중의 하나인 “아힘나평화학교” 1학년 김규원 군은 “만일 여기 와보지 않았다면 피폭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는 것이 죄송스럽다. 한국에 돌아가면 전 세계가 역사의 내면을 올바로 보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공부하겠다.”라고 다짐했다.
 
▲ 한일청소년들과 함께 자리한 재일동포 배동록 할아버지와 답사단(왼쪽), 추도모임에 참여한 아힘나청소년학교 김종수 교장과 1학년 김규원 군(오     ©김영조

전날 답사단에게 사세보 미군기지를 설명해주었던 미군범죄피해자구호협회 도유사 사무국장도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 피폭 중심지로부터 2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평화공원 안에 이 위령탑이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조선인 희생자에 관심이 없는 일본정부와 달리 양심 있는 시민단체의 공로를 칭찬했다.

이 추도집회를 매년 여는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은 일본정부도 외면하는 재일 조선인 인권을 위해 애쓸뿐더러 매년 추도행사까지 해주고 있음에 우리 답사단은 그들의 선행에 깊이 고개 숙였다. 1979년부터 추도회를 하고 있다니 올해로 31년째이다. 조촐한 조선인 원폭희생자 추도식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다음 답사지인 시모노세키행 버스에 올랐다. 조선인 차별이 심했던 이른바 똥굴동네를 향해 우리는 장거리 버스에 올랐다.

<제4편> 시모노세키 똥굴동네와 동포 2세 배동록 할아버지의 처절한 증언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0/09/05 [20:4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