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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창작판소리로 부활하다
창작판소리 “백범김구” 시연회 열려
 
김영조   기사입력  2009/11/24 [15:35]
▲ 창작판소리 "백범김구"에서 소리를 하는 왕기섭 명창     © 김영조
 

“너 이놈 왜놈은 말 듣거라!

만국 공법이니 국제 공법 그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 화친 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국모를 시해하라는 조항이 있더냐

야 이 짐승만도 못한 왜놈아!!” 

걸쭉한 소리를 통한 백범 김구 선생이 왜놈에게 호통치는 말이 들린다. 위 소리는 지난 11월 23일 늦은 4시에 백범기념관 컨벤션센터에서 (재)김구재단(이사장 김호연) 주최, 창작판소리 12바탕 준비위원회(위원장 김도현) 주관으로 열린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시연회에서 들은 사설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고 했던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의 이 ”법고창신“은 우리 전통문화에 진리 같은 좌우명일 것이다. 특히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오른 판소리로서는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말 아니던가? 

전해온 12바탕 판소리가 정말 소중한 것이기는 하되 이를 바탕하여 새로운 창작판소리가 생겨나지 않으면 그저 옛것인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 창작판소리의 전통은 1904년 김창환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최병두 타령”을 꼽는다. 그리고 해방 뒤에 월북 소리꾼 박동실이 만든 “열사가”가 그 계보를 잇는다. 또 1970년대에 고 박동진 명창은 “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 “유관순전” 등의 판소리를 창작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창작판소리는 어쩌면 임진택의 “소리 내력”, “오적(五賊)”, “똥바다”, “오월 광주”가 아닌지 모른다. “소리꾼 광대”로 불리는 임진택은 창작판소리를 통해 80년대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판소리를 통한 사회 비판과 풍자에 주력하였다. 이후 창작 판소리가 간간이 발표되곤 했지만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 창작판소리 “백범김구” 시연회에서 소리를 듣는 청중들     © 김영조
 
 
▲ 창작판소리 “백범김구” 만든 경과를 얘기하는 임진택 씨     © 김영조

그러데 이번 창작판소리 “백범김구”는 (재)김구재단이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와 함께 손을 잡고 백범 죽음 60돌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려낸 것이다. 이날 시연은 제1부는 동생 왕기섭 명창이, 제2부는 형 왕기철 명창이 소리했고, 제3부는 왕기섭 형제 명창과 함께 임진택 씨 아니리를 맡아 모두 3시간이 넘는 열창을 했다.  

임진택 씨가 만든 시연의 사설은 아직 완성본이 아니어서 소리꾼이 완전하게 소화할 수 없는 상황으로 소리꾼들은 보면대(음악을 연주할 때 악보를 펼쳐서 놓고 보는 대) 위의 사설을 보면서 하느라 땀을 흘려야 했다. 

시연에서는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가 존재할 수 있으리오. 현 단계 우리 민족의 유일 최대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이며, 고로 우리의 공동 투쟁 목표는 단선 단정의 분쇄인즉”하는 백범의 우렁찬 포효가 들린다.  

또 “지난 날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후회 막심이로구나. 나를 단지 광동인으로 알고 나만을 위하였고 5년 동안을 배 위에서 부부처럼 지낸 사이거날 뒷날에 다시 만난 줄로 알고 노자도 넉넉히 주지 못한 채 만날 기약도 헤어졌으니 안타깝구나 주아이빠오여”라는 5년 동안 백범을 보살피고 사랑해준 이에 대한 애절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미 군정사령관 하지를 놓고 “하지 하지 해놓고도 암 것도 하지 않은 것이 하지여.”, “아니여, 하지 하지 해놓고도 암것도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하지여.”, “아니여, 하지 하지 해 놓고도 하지만 하지만 하면서 딴 짓만 해놓고 간 것이 하지여,”로 풍자한 얘기로 청중들이 배꼽 잡게 하기도 했다.  

▲ 창작판소리 “백범김구” 시연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왕기철 명창     © 김영조
 
그러나 역시 이 판소리의 절정은 역시 백범의 죽음 장면과 장례식이었다. “선생 양 어깨를 붙잡고 ‘선생님! 선생님!’ 아무리 불러 깨어보나 선생은 눈을 감으시고 아무 대답이 없구나” 하는 대목과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을 하오리까. 울고 다시 울고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중략) 동포 형제여 가슴을 치고 통곡하십시오. 선생님 천지가 캄캄하고 강산이 적막합니다.”라는 엄항섭의 조사 대목에선 눈물을 글썽이지 않은 청중이 없었다. 

무려 3시간이 넘는 시연을 끝내고 옆방에서 식사를 하면서 시연에 대한 평가모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임재경 한겨레 전 부사장은 제목을 '판소리 김구'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또 출판인 김학민 씨는 “사설 중 이동휘가 도주했다는 표현은 잘못이고, 차라리 이 동휘 부분은 전부 삭제하는 게 낫겠다. 그리고 1시간 30분으로 줄였으면 하는 생각이며, 어려운 말들을 쉽게 고쳐야 하며 고증위원회를 거치는 게 좋겠다.”라고 했다. 

한 판소리 전공 국문학자는 “아니리 부분이 너무 길고 많아서 대폭 줄였으면 좋겠다. 판소리 모든 가락을 고루 사용해야 하고 완창본 따로, 축약본 따로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 그리고 백범 주변의 여러 풍속도 삽입했으면 좋겠다.”라는 의견을 냈다. 

이어서 심순기 한겨레역사문화연구소장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감옥에서 죄인들의 대화 등 재미있고 희극적인 많은 장면이 사라져 아쉬웠다. 오히려 시간을 더욱 늘려 10대목, 15대목으로 구성해서 한두 대목은 아마추어 소리꾼도 따라부를 수 있게 하자.”라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역시 백범 분야의 전문가인 이봉원 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장의 지적은 좀 더 날카로웠다. 이 회장은 “백범의 중국 내 독립운동 27년 중, 그의 최대 업적이자 영광이요 절정이었던 사건은 1944년 4월 망명세력 전체가 참여해서 명실상부한 통일정부, 좌우합작 정부를 수립한 일인데 이 부분이 두세 줄로 너무 간단히 소개됐다.”라며 이 부분을 집중하여 보강할 것을 주장했다.

▲ 창작판소리 “백범김구” 시연회 제3부에서 소리를 나누어 하는 임진택(왼쪽), 왕기철(가운데), 왕기섭 명창     © 김영조

해방 뒤 백범 통일운동의 절정은 1948년 4월 평양회담을 위해 방북한 것인데, 그때 수많은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다시피 방북한 동기와 까닭은 그가 1944년 중경에서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했던 경험과 자신감 때문이었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평화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당위와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통합정부에 참여한, 김구 포함 21명 국무위원 전원의 이름을 사설에서 일일이 열거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주도적으로 만든 임진택 씨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아니리' 부분을 대폭 줄이다 보니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내용을 많이 삭제할 수밖에 없어 나도 참 아쉬웠다.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과 오히려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다 있는데, 좀 더 고민한 뒤 결정하겠다. 다음 두 번째 공연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번 첫 시연을 보신 분들은 비교해 보시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 열창한 두 형제 명창은 “우리도 판소리의 해학적이고 감각적이기도 한 진짜 재미있는 사설 부분이 많이 줄어 참 아쉬웠는데 앞으로 그런 부분이 보충되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가흥에서 뱃사공 주애보 여사와 보낸 얘기 등이 그것이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이날 시연을 주관한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는 2차 시연을 내년 1월 22일 5백 명쯤 관객을 모아 역시 같은 백범회관에서 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늘 나온 의견을 가지고 다시 검토하고 보완해서 좀 더 나은 공연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제시된 의견 외에 아쉬운 부분은 또 있었다. 그것은 먼저 김구 선생의 이름이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뀐 내력과 백범이라는 호에 대한 설명 부분이 미진했다. 또 중국 지명과 인명을 중국 발음으로 하기도 하고 한자 음으로 읽기도 하는 등 일관성이 없었는데, 이는 한자음으로 읽는 것이 사설을 듣기에 편함을 깨달아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백범일지를 바탕으로 사설을 쓴 까닭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었겠지만 호걸제, 혁명난류, 불란서 등의 어려운 한자말은 쉬운 토박이말로 바뀌어야 하며, 클랙션 등 외래어를 쓰는 것도 자제하고, “산 물고기”에서 산은 길게 소리해야 하는데 짧게 하여 “산에 사는 물고기”가 되어 버린 점도 있었다. 게다가 “단일적으로”라는 일본 투의 표현도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날 시연은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그 가운데 세계무형문화유산 판소리를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이어간다는 것과 백범을 이 시대에 판소리로 부활시켰다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또 제3부를 세 사람이 나누어 불렀는데 우조 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를 가진 동생 왕기섭은 적벽가 중 적벽에 불 지르는 대목처럼 우렁차고 호연지기에 어울리는 소리를 했고, 형 왕기철은 계면조 소리에 걸맞아 소리 도중 애절한 부분에 적절하며, 조금 마른 느낌이 나는 소리의 임진택은 아니리에 아주 잘 맞아 분창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느낌이 들 만했다.  

창작판소리 12바탕 추진위원회는 백범 김구를 시작으로 세종대왕, 이순신, 정약용, 전봉준 등 근현대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과 허준, 홍길동, 김삿갓, 대장금 등 한국문학과 TV드라마를 통해 형상화된 전설 속의 실재 인물 그리고 송흥록, 신재효, 진채선, 임방울 등 판소리사의 대명창 등을 소재로 새로운 판소리 12바탕을 제작한다.  

이제 창작판소리는 또 다른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시작 “백범김구”를 우리는 기대해 마지 않는다. 내년 1월 22일 다시 열리는 2차 시연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 볼까? 그때 우리는 다시 백범의 가신 길을 생각하며 가슴 절이는 소리를 다시 들어보아야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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