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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영성,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교리아닌 영성과 운동의 그리스도교를 지향하며
 
류상태   기사입력  2009/03/04 [08:26]
이천년 역사를 이어온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맥을 크게 나누어 본다면 ‘교리의 그리스도교’와 ‘영성의 그리스도교’, 그리고 ‘운동의 그리스도교’, 이렇게 세 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 줄기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며 서로 접촉점이 없이 별도로 이어진 것도 아닙니다. 서로 얽히기도 하고 어느 한 쪽이 두드러지기도 하면서 긴장관계를 이루며 지금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그 중 인류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단연 교리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굳이 그리스도교의 세 줄기를 구분하여 논하려는 이유는, 세 줄기 중에서 인류 역사에 너무나 큰 슬픔을 안긴 하나의 줄기를 분리하여 제거하고, 나머지 두 줄기에 대해서도 왜곡된 부분이 많아 충분한 설명을 통해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교리의 그리스도교’란 배타적인 교리와 그에 따른 독선으로 세상에 갈등을 일으켜온 그리스도교의 부정적인 성향과 조직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의 교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교리란 배의 닻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닻이 강이나 바다의 모래바닥에 너무 깊이 박히면 배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결국 고철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며, 바닥에 든든히 고정되지 않으면 배는 이리저리 표류하게 되는데 교리도 그와 같다는 논지입니다. 교리가 갖는 위험한 성격을 잘 짚어내면서도 교리 자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 CBS노컷뉴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교 교리가 교회와 회중에 끼친 영향력은, 존 스토트가 지적한 양 극단의 위험을 피하며 조화를 이루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조직이란 마치 생명체와 같아서 어느 단계에 이르면 스스로 생존하고 팽창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마련인데, 그 조직의 생리를 제어하지 못한 교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언제나 교리를 무기로 삼아 그 구성원들을 옥죄었습니다. 

그러니까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대해진 교회조직 자체의 생리와, 조직의 상층부에 자리한 사제계급, 그리고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여 조직이 장수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해준 신학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 교회는 지난 역사를 통해 인류사회에 무서운 억압과 폭력을 자행하게 된 것입니다. 존 스토트의 비유대로라면 닻이 바닥에 너무 깊이 박혀 배가 썩어들어가면서 그 구성원 뿐 아니라 주변에 심각한 문제를 생산해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인류 역사에 커다란 슬픔을 안긴 ‘교리의 그리스도교’를 지구마을의 모든 그리스도교회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야 하며, 이 일에 실패한다면 그리스도교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교리 그리스도교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활발한 학문적 논의를 거쳐 교리의 함정에서 거의 벗어났으나 아직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그리스도교회의 일부, 근본주의가 횡행하는 미국, 그리고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식민지라 할만한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교리 그리스도교가 교회를 지배하는 어두움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많은 분들이 영성의 그리스도교를 주목하기에, 영성이란 무엇이며, 과연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먼저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운동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교의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성의 사전적 의미는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신령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비가시적이면서 초월적인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제가 짚어내고 싶은 문제점은 많은 분들이 ‘영성’을 말할 때 어떤 현상을 떠올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신과 직접 대면하거나 대화를 주고받는 등의 초월적인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기적이나 병고침, 신과의 대화나 대면 등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영성의 결과일수는 있어도 그 자체를 영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현상’에 집착하게 되면 진정한 영성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심개념은 ‘초월자와의 관계성’입니다. 초월자란 실존자와 구분되며 실존자의 한계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실존자의 상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존재나 법칙, 원리 등을 말합니다. 

제가 초월자의 개념을 실존자와는 구별된 ‘보다 상위의 존재’ 뿐 아니라 ‘법칙, 원리’까지 포함하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계신 분들이 불편을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신의 속성을 인격체 안에만 가두지 말고 초인격적 속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원화된 세계에서 이웃종교와의 원만한 대화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신에 대한 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세기부터 신의 궁극적 속성을 ‘존재라기보다는 지성’으로 파악한 중세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흐름을 잇는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한층 더 풍부하게 할 뿐 아니라 동양사상과의 폭넓은 대화를 가능케 하는 시대의 요청이기도 합니다. 신관에 대한 이런 폭넓은 이해를 위해 어느 학자는 이런 제안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님에 대해서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느님은 무엇인가? (What is God?)’라고도 물읍시다.” 

▲     © CBS노컷뉴스
신성의 궁극이 인격이건 인격을 뛰어넘는 초인격적인 그 무엇이건,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영성은 ‘현상’이 아니라 ‘관계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쉽게 말하면 방언을 하고 기적을 하는 것이 영성이 아니라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영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이 풍부하다”든가 “영성이 꽃피었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그 분(또는 그것)과 하나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 영성이 한 인격체 안에서 발아할 때, 즉 어떤 사람이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된 삶을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함부로 취급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돌뿌리 하나,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의 손길이 담긴 것으로 보기에 귀하게 여깁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영성이 발아하면 삶의 모든 영역으로 그 풍요로움이 흘러넘치게 되어 세상과 자연, 그리고 신이 부여한 우리 인생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게 되겠지요. 

또한 그리스도교 영성이 발아하면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연결된 존재로 봅니다. 환경이 어떻건 외모가 어떻건 돈벌이나 학벌이 어떻건 ‘하느님의 형상(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그 자체로 모든 사람을 귀하게 봅니다. 그래서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세상을 진취적이며 적극적으로 살아낼 힘과 소망을 갖게 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과 하나로 합일되어 신의 눈으로 보고 신의 입으로 말하고 신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대하기에,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심는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영성이 꽃핀 사람에게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를 비롯한 중세 신비주의자들이나 이슬람교의 영성을 꽃피운 수피들, 천주교 사제이면서 인도에서 종교간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든 앤소니 드 멜로 신부, 개신교에서 영성의 맥을 이어 꽃피우는 이현주 목사 등은 한 인격체 안에서 영성이 발아할 때 그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개인의 인격을 넘어 분출하는 그 향기가 세상을 얼마나 향내 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지를 보여주는 산 증인들입니다. 

* 이 칼럼은 격월간지 <공동선> 2009년 3+4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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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3/04 [08: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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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gnitariat 2009/03/04 [22:24] 수정 | 삭제
  • 누구도 언급하기 꺼리지만, 또 누구나 동의하는 문제....."영지주의"의 발전적 수용이 필요한 시점이죠. 아마 한국 교회에서 밥줄 끊길 각오없이는 외치기 어려운 문제일겁니다. 정말 기독교 다운 기독교는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가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