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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무자비한 폭력과 인권차별의 종교인가?
[류상태의 예수를 찾아]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이해와 상생을 위하여
 
류상태   기사입력  2009/02/14 [14:51]
요즘 들어 인터넷에 이슬람의 잔인성을 부각시키는 폭로 자료가 많이 나도는 것 같습니다. 이슬람의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기에, 그 근원지가 어디인지 짐작이 가는 저로서는 부끄러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이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슬람에 대해 특히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이 우리나라를 종교적으로 정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놓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이미 1~2만명에 이르는 선교사가 입국했으며, 현재 이슬람 신자도 30만명 수준으로 급증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중동의 막대한 석유 자금에 힘입은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한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이미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세워놓았고, 이슬람 은행과 대학까지 건립하려 하고 있으며, 2020년까지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이슬람화한다는 구체적 시한까지 세웠노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퍼뜨리는 진원지가 보수 개신교회 단체와 그 지도자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2009년 1월 23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이슬람 할퀴는 종교적 색안경’ 참조) 그러나 이슬람교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못되고 무자비한 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이슬람을 비난하는 개신교 근본주의보다 훨씬 너그러운 종교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철학을 전공하며 꾸란 해설서(꾸란 정경의 번역본이었지만, 이슬람에서는 번역된 꾸란은 해설서로 생각할 뿐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를 한번 정독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원에서도 비교종교학 관련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로 이웃종교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계속 갖고 있었기에 이슬람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문헌을 탐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개신교 목사로서 이슬람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내지 못했기에 함부로 평가할 위치에 있지 못합니다.

종교의 세계는 관련 서적 몇 권 읽는 것으로 쉽게 파악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몸소 살아내며 체험하지 않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심오한 부분이 종교의 세계에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 몸담고 있는 제가 감히, 지구마을에서 10억이 넘는 인구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는 형제종교에 대한 글을 쓰고자 나선 이유는 적어도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는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형제라 할 수 있는 이 두 세계종교는 많은 전통과 문화를 공유합니다. 한 하느님(아랍어로 알라)을 믿으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함께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이 하느님의 법을 전해준 모세를 존경하듯이 무슬림도 모세를 선지자로 받들며 존경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베푸신 기적들과, 십자가, 부활을 믿듯이 무슬림 역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기적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믿습니다. 다만 예수를 신의 본성을 가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기에 거부하며 위대한 선지자로서 존경할 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는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에게조차 존경심을 표하기는 커녕 사탄의 앞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두 종교는 서로 다른 견해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책(성서)에는 다른 종교를 포용해야 한다는 말을 찾기 어렵지만, 꾸란은 “진실로 너희의 종교는 하나다.”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꾸란의 이 구절을 대하고는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지요. 이슬람은 지금도 그리스도교를 형제종교로 인식합니다. 무슬림은 그리스도교 자체를 미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건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교리기독교일 뿐입니다. 

저는 무슬림이 무섭고 잔인한 우상숭배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라는 사실을, 또한 우리는 이슬람 형제들을 기꺼이 품어 안지 못했지만 무슬림은 이미 우리를 형제로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성서가 아니라 꾸란을 통해 배웠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성서를 주셨듯이 무슬림 형제들에게 꾸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측면만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서구의 그리스도교적인 문화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슬람 문화가 갖는 독특한 측면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과거 그리스도교 세계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왜곡도 수없이 많습니다. 마치 북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차단된 1960~70년대에 남한에 살았던 많은 어린이들이, 왜곡된 정보에 의해서 북에 사는 사람들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얼굴이 빨갛고 머리에 뿔이 났다고 생각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슬람의 폭력성과 여성인권 문제에 대하여 

이슬람교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대개 폭력성과 여성인권 문제를 듭니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갖는 폭력은 거의 방어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와 그에 따른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종교를 지키기 위한 폭력은 정당성을 갖는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물론 정도를 넘어선 폭력이 무슬림에 의해 저질러지기도 합니다. 이른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지요. 사람들은 그들을 이슬람 원리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결코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습니다. 테러는 정당한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몇 년 전, 한 무슬림을 만나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터키인으로 무슬림 선교사인 그 분은 “무슬림 테러리스트는 결코 이슬람 원리주의자일 수 없다.”고 말했지요. 

여성인권 문제도 일단 그들의 시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 여성들이 착용하는 히잡을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듭니다. 그러나 이 문제도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슬림 여성에게 히잡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들의 눈에서 해방시키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저는 무슬림으로 개종한 한국 여성에게서 히잡을 쓰고부터 남성들의 불편한 시선과 그로 인한 부자유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왜 수녀들이 머리에 두건을 쓰는 건 거룩한 것이고 우리가 히잡을 쓰는 건 여성에 대한 억압이 되나요? 서구화된 세계에서 여성은 상품화되어 있고 실제로 여성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슬람 여성에 대한 인권 문제는 서구적인 시각으로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전통과 문화가 빚어낸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생명의 열매인지 죽음의 열매인지(이렇게 흑백으로 나누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요)를 서구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여성인권 문제나 무슬림 테러리스트 문제로 이슬람 전체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어처구니가 없을 뿐 아니라 사악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자신이 범한 역사적 과오부터 돌아보아야 

어느 특정 사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그 특정 사안을 근거자료로 내세워 “이슬람은 이렇게 무자비한 종교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치졸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반드시 고쳐져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연쇄살인이 한국에서 일어난 장면을 보여주며 한국을 연쇄살인의 나라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낸다고 교인을 때려 숨지게 한 정신이상자인 목사의 안수기도 장면을 보여주며 기독교는 교인을 때리고 죽이는 종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슬람 세계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을 맹목적으로 찬양할 생각도 없습니다. 저 역시 현실세계에서 일부 무슬림이 저지르는 폭력과 과격성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그들이 갖는 과격성의 상당 부분은 제국주의의 힘을 등에 업은 그리스도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형제종교의 문제를 짚어내기보다는 이해하고 상생하는 쪽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이슬람이 안고 있는 문제, 또한 극복해야 할 문제는, 그리스도인인 제가 저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호되게 비판하며 거듭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무슬림 형제들에 의해 극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교인이 무슬림을, 무슬림이 그리스도교인을 비난하기 시작하면 지구마을은 감당하기 어려운 어두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신념체계이기에 “우리에게는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고, 그러기에 서로 비난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가 되어 지구마을 전체를 집어삼킬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종교란 단순히 지식활동을 통해 파악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체험이요 삶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드러난 현상만으로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건 매우 위험합니다. 하물며 특정 종교인들이 자기 시각으로 이웃종교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지구마을의 미래를 매우 위태롭게 만드는 일로 크게 삼가야 할 일입니다. 

오, 하느님! 형제종교를 이해하고 상생하려는 노력은 하지 못하고, 무지와 편견에 싸여 형제를 비난하는 독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주소서! 과거에 우리가 형제에게 어떤 짓을 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게 하시며 사죄케 하소서!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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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2/14 [14: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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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쩝.. 2009/08/06 [12:04] 수정 | 삭제
  •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를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는데
    < 다만 예수를 신의 본성을 가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기에 거부하며 위대한 선지자로서 존경할 뿐입니다.>

    글의 표현을 봐서는 류상태님도 동일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정말 목사 맞습니까..? 류상태님이 믿는 신은 누군지요..?
  • 임실사랑 2009/05/03 [16:20] 수정 | 삭제
  • 그럼 무슬림 국가에서 명예살인을 하는것, 간음했다고 돌로 쳐 죽이는것, 여성 할례를 하는것, 8살 여자 아이와 결혼하는 것, 자살폭탄 테러를 기독교 근본주의보다 좋게 본다는 이야기입니까?

    정신 차립시다.

    여자가 남편말을 듣지 않으면 알라에게 복종할때까지 때리라는 코란의 가르침이 더 낫다고 봅니까?
  • 임실사랑 2009/05/03 [16:15] 수정 | 삭제
  • “돌팔매 겁 안나”… 얼굴 내민 아프간 여성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카불 시내에는 진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청바지를 입고 얼굴을 과감히 드러낸 아프간 여성들이

    ‘항의 시위’에 나선 것. 시아파가 운영하는 종교학교에 모인 300명의 여성들은 국회를 향해 3km의 거리 행진을 감행했다.



    ‘죽음을 무릅쓴 시위’는 지난달 국회에서 통과된 시아파 가족법 폐지 탄원서를 내기 위해 이뤄졌다. 아프간 인구 15%를 차지하

    는 시아파의 가족 관계와 권리를 규정하는 이 법안은 부부강간과 아동결혼 등 여성악법을 합법화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질색할 정도”라고 비난하는 등 국제사회의 포화를 맞아왔다.



    그러나 평화롭게 시작된 시위는 곧 ‘전면전’으로 돌입했다. 보수 이슬람교도와 일부 남성들이 반대 시위대를 빠르게 조직해 시

    위 여성들에게 욕설과 돌팔매질을 퍼부었다. 공격이 거세질 때마다 여성들은 흩어지거나 버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돌에 맞아

    찢어진 플래카드를 들고서도 행진은 의연하게 이어졌다고 뉴욕타임스 등 외신이 전했다. 1000여명의 반대 시위대는 이들을

    “개”, “창녀”라고 부르며 맞섰다. “부모가 무슬림이라면 집으로 돌아가라.”는 한 성직자의 외침에 여성들은 “무슬림이라면 이런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차게 응수하기도 했다. 시위대간 충돌은 여성 경찰대가 시위 여성들을 팔로 감싸 ‘안전망’

    을 치면서 간신히 유혈사태를 피했다.



    시위 여성 대부분은 카불 대학에 재학 중인 여학생들이거나 여성 권리 운동가들이다. 이 중에는 탈레반 정부에서 비밀리에 여

    성운동을 이어온 아프간 여성혁명연합(RAWA)의 조직원도 포함돼 있다고 더 타임스가 보도했다.



    이번 법안은 하미르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8월 대선을 앞두고 입김 센 시아파 종교세력에 ‘뇌물’로 준 것이라는 추측이 우

    세하다. 이달 초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의에 모인 세계 정상들의 비난에 카르자이 대통령은 법안 재검토를 지시했으나, 시

    아파 종교지도자들이 “서구 국가들은 참견하지 말라.”고 강하게 비호해 폐지는 어려울 전망이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2009년 4월 17일자 서울신문

  • 불꽃남자 2009/04/06 [06:57] 수정 | 삭제
  • 무슬림이 안고있는 문제는 무슬림이 해결한다? 무슬림이 안고있는문제를 무슬림은 문제로 인식하고있는줄 아시나봐요? 자연정화의 힘을 바라는 겁니까? 문제가 있으면 법에 의해서든 뭐에 의해서든 해결이 되야되는 겁니다. 사람생명이 직결되는 문제일 수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구요. 정화능력을 상실한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라도 정화되야 하는 겁니다. 도올의 기독교 비판은 그가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은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제발 부탁인데 엉성한 종교평화론 내세우지 말아주세요. 글쓴이가 말하고 있는건 종교평화가 아니라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뭐 글쓴이가 종교다원주의자라면 정말 할말 없지만...
  • 불꽃남자 2009/04/06 [06:50] 수정 | 삭제
  • 글쓴이가 대체 어느정도까지 이슬람에 대해서 경험을 하고있는지 궁금하군요. 책 몇권가지고? 아니면 이슬람 선교사의 증언에 의하여? 겨우 그정도라면 겨우 그정도의 경험가지고 이슬람을 말하는게 우습기만 하군요. 물론 기독교 근본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나 원리적으로는 같겠지요. 기독교의 과오부터 반성하자? 당연히 그래야지요. 허나 길에만 나가면 돌아다니는 사람의 반수가 터키사람이며 200만명 이상의 터키인이 거주하고 있는 이나라에서 뉴스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이슬람의 소식과 이슬람선교에 헌신하시는 선교사님의 증언을 들을때는 고작 책 몇권과 이슬람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는 이슬람 선교사에게 주워들은 몇마디로 종교의 이해와 상생, 무지와 편견을 이야기하는 글쓴이의 허접한 종교평화의 외침에 그냥 웃음만 날 뿐입니다.
  • 2009/03/17 [19:18] 수정 | 삭제
  • 아직 어느 종교건 허벌나게 싸워라는 교리를 가르치는 종교는 못봤다. 추종하는 넘들의 질이 문제지.... 추종하는 넘들의 질이 낮은 종교는 이땅에 들어오면 안된다. 그넘들은 꼭 테러를 가르치거든... 해외에서 그런사례 많이봤다.
  • 이준 2009/02/25 [09:25] 수정 | 삭제
  • 열린 생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