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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이익과 사회적 대의는 비례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시민사회 몫, 노동분열책 경계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3/09/22 [14:02]

곤혹스럽고 불편하다는 것. 노무현 정부 들어 정부와 노동계의 대립을 둘러싼 시민 사회의 반응을 보면 선과 악, 아군과 적군의 경계가 분명치 않은 안개 속에 있는 듯한 혼란이나, 먹은 밥이 체 삭혀지지 않은 듯한 소화불량 증세를 느낄 때가 부쩍 잦다. 피아의 구별이 분명해 보이는 경우는 차라리 사람의 판단에 딱히 장애물을 던져주지는 않는다. 가령 마초 성향의 남성이 여성운동에 짐짓 비판적 조언을 하거나, 노동운동에 눈길도 주지 않던 사람이 노동계에서의 비정규직 소외를 운운할 때는, 그 내용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그저 귓등으로 넘겨버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스스로도 노동운동에 우호적이라고 말하는 진보적인 인사에게서 그와 같은 태도가 나올 때는 곤혹스럽다는 것 외에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한겨레 9월 8일자 최원식 씨의 칼럼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관련기사] 최원식, 대의와 이익, 한겨레신문(2003. 9. 8)

▲ 화물노동자의 파업모습     ©대자보
 '대의와 이익'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지금의 노동운동이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대의"보다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데 더 열심이라고 진단하는 데 기울어진 필자에게는 사회적 대의와 노동자의 권익은 별개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상호충돌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단정을 지으려면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노동자의 이익이 추구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권익 향상을 위한 노력이 곧 사회적 대의와 합치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약자의 자기 해방을 위한 노력은 곧 사회적 공익과 일치되는 것인 바, 이 두 개념은 애초부터 분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필자가 우려하는, 대의에 거스르는 노동자의 이익 추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적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최근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들을 겨냥하여 연봉 6000만원의 '노동 귀족'이라는 비아냥이 적지 않은 여론의 힘을 얻은 주요한 빌미가 된 현대자동차 사업장의 임금 협상의 경우를 들어보자. 그만한 액수에는 잔업과 철야, 연장 근무를 밥 먹듯 해야 하는 등 살을 깎아먹는 노동 조건이 전제되고 성과급 수당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음을 무시하더라도, 더욱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와 비할 수 없는 고임금임을 인정하더라도 그들이 비난을 들어야 할 이유는 있을 수 없다. 그만한 임금 협상의 쟁취는 선배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온 현대 노동자들 스스로의 축적된 역량의 대가일 뿐이다. 무엇보다 임금 인상과 직결되는 노동자의 지위 향상이 지금처럼 극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된 민주주의의 왜곡을 저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자식이 고졸 생산직 노동자로도 사람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하여 학력 불평등 해소에도 기여한다면 그것이 곧 사회적 공익에 합치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평등사회 건설'이라는 대의와 별종의 것인가?

▲밥꽃양의 비극을 아십니까? 오는 9월 27일 토요일 오후 4시 서울대 법대100주년기념관에서 그 진실을 확인해 보세요. 영화 밥ㆍ꽃ㆍ양 포스터 /    ©larnet.jinbo.net
드물게 노동자의 이익 추구가 배타적으로 비치는 경우가 있다면 남성노동자들의 고용 안정과 식당의 여성 조합원들의 해고를 맞바꾼 98년 현대자동차 노조의 경험이 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자본의 노동 분열책이라는 큰 틀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느낄 수 있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이나 임금인상이 당장 자신들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노동운동이 대기업 노조 중심이라는 비판도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시민 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하는 것이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맡겨놓거나 그들이 자신의 권익을 포기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대 노동자들이 '고액' 임금을 양보한다고 해서 그만큼의 이익이 하청 업체의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순진하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어쨌든 장기적으로는 전체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며 이 혜택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이 역사를 넓게 내다보는 태도일 것이다.

우리가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소수의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져 주는 척하며 이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분열시킴으로써 노동계와의 싸움에서 기선을 제압하려는 권력과 자본의 태도이다. 자신이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불평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에 있는 듯이 말하는 그 입으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역설하는 노무현 정부의 양심 불량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장단에 춤추는 소위 개혁적 인사들의 태도는 자신이 노동자의 우군이라 말하는 입버릇에 과연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을까.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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