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고민하며 생각해왔던 문제를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자매형제님들과 조심스럽게 나누고 싶습니다. (앞으로 개신교를 지칭할 때는 ‘기독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개신교’라고 명확하게 표현하겠습니다. ‘기독교’라는 말이 현재 개신교를 지칭하는 말로 넓게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본래 단어가 가진 뜻은 ‘그리스도교’의 한자어로서, 개신교 뿐 아니라 가톨릭과 정교회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을 제외한 신교를 지칭할 때는 ‘개신교’로, 가톨릭과 정교회를 포함한 기독교 전체를 말할 때는 ‘그리스도교’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막연한 거부감마저 갖고 있었습니다. 종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너무 많은 제약을 가하고, 결국 신도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제가 대학 입학 후 2년 정도 지나 개신교에 입문하게 된 이유는 모든 사람을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의 자녀로 품어주신 예수님의 무한한 생명존중사상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라는 가사의 찬송가를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기억이 아직도 저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조건적 절대사랑’으로 정리된 저의 그리스도교관이 큰 혼란을 맞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르치는 하느님의 사랑이란, 말로는 아무 조건이 없는 무한사랑이었지만 실제로는 교리에 의해 큰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주류 그리스도교회에서 말하는 신의 무한한 사랑은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 들어오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였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신의 절대사랑이 오히려 가혹한 저주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저를 오랫동안 괴롭힌 또 하나의 의문점은, 신에 의해 베풀어지는 사랑이 절대적인 것만큼이나 인간도 자기 생명을 바쳐 신을 전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신이 인간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주었기에 인간도 신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쳐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순교신앙에 대한 찬미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 교회가 시작된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신구교를 막론하고, 하느님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섬기거나 절할 수 없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거룩한 성인들로 추앙을 받았고, 대대로 교회와 신도들의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순교자에 대해 그리스도교인들이 보내는 경외감과 찬사는 우리나라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표적인 순교자로 주기철 목사님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 분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께서 ‘아빠 하느님’이라고 가르쳐주신 그리스도교의 신이 자기 자식과도 같은 신도들에게 순교신앙을 진정으로 원하시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식의 희생을 원한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는 신이 모든 사람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외아들을 내어줄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는 신이라면 그 신도들의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지난 이천년 동안 별 고민이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순교신앙을 찬미해 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건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조직을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발칙한 의문이 드는 것은 오로지 저의 무지와 삐딱한 성향 때문일까요? 제가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청년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신앙에 대한 찬사를 들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어온 질문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그 시대의 그 분이었다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제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늘 “아니오”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누군가, “당신이 일제시대의 목사였다면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다면,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기철 목사님 같은 큰 그릇이 못 된다는 점을 먼저 인정하고 싶습니다. 그 분의 정결한 신앙과 기개, 신념은 함부로 폄하할 수 없는 존경스러운 면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분과는 다른 저의 신념과 신앙에 따라 신사참배를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목회하는 교회 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를 각오하는 신자들이 있다면 적극 말렸을 것입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분명 부당한 짓이며 저항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죄’라는 교리적인 이유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저에게는 종교 교리에 의해 생명을 경시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차라리 겉으로는 신사에 절을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가정에 대한 책임도 다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의 희생을 저는 더욱 가치있게 여기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어떤 숭고한 교리도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며, 또한 교리가 사람의 생명보다 위에 자리 잡는 순간, 그 교리는 사람 잡는 도구로 전락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교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사람을 위하여 있다”로, 또한 “사람이 종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말씀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어떤 종교도 교리를 위해 그 구성원들에게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거나 찬미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리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이며 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가정을 거느린 신도들에게 ‘거룩하고 순수한 순교신앙’을 지키라고 요구하기에는 그들에게 딸린 자식들, 봉양해야 할 부모들이 저에겐 너무나 소중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의 하느님도, 또한 그 분을 ‘아빠 하느님’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신 우리 주님께서도, 완고한 교리보다는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선택하시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교회는 순교신앙을 찬미하는 그 이면에 신의 뜻보다는 교회 조직을 위한 논리가 숨어있지는 않았는지, 또한 순교신앙을 찬미하는 것이 자칫 생명경시풍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천년을 이어온 그리스도교 역사를 냉정히 살펴보면, 교회가 존경하고 찬미하는 순교자들 중에는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죽은 분들도 매우 많습니다. 배타적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결연히 목숨을 내놓았다면, 그건 교리가 사람을 죽인 것이며, 그런 순교신앙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저는 그리스도교인들, 좀 더 넓게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한 유일신종교 삼형제가 ‘순교를 각오하는 신앙’이 아니라 ‘순교하지 않아도 되는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들 유일신 종교들이 순교자를 많이 배출하지 않아도 되는 열린 종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가 앞장서서 이천년 동안 간직해왔던 교리적 배타와 독선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편협하고 배타적인 교리 대신 모든 생명을 아무 조건 없이 신의 자녀로 인식하고 가르쳐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너무나도 따뜻한 포용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작년 여름에 발생했던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같은 끔찍한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 이 칼럼은 격월간지인 <공동선> 2008년 9+10월호에 실린 글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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