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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는 <색, 계>와 같은 영화 만들 수 없다?
[우리힘의 눈] 전창근, 백범 김구 주연한 친일영화인에서 광복영화 대부
 
방학진   기사입력  2007/12/18 [12:26]
영화 <색, 계>가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기인 모양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1년에 평균 1.5편정도 밖에 영화를 안보는 영화 문외한이며,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굳이 영화평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관심이다.

영화 <색, 계>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딩모춘(丁默邨)
<색, 계>는 1939년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때 쑨원의 최측근이었으며 국민당의 주석으로서 장제스와 협력하던 왕징웨이가 우두머리인 친일괴뢰 정부와 이에 대항하는 국민당 그리고 공산당 사이에 벌이지는 첩보전을 그리고 있다. 왕징웨이 정권은 비밀공작조직 '76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조직의 책임자인 딩모춘을 제거하기 위해 국민당이 동원한 미인 정보원이 정핑루이다. 영화는 딩모춘과 정핑루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 후반 중국은 국공내전 직후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 등으로 인해 중국 민중의 삶이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진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이 영화에 나오는 농도 짙은 정사장면은 역사를 망각한 사치요 무지로까지 생각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MBC 정길화 PD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의 딩모춘이 친일파 처단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이 집행되었기에 이 사건을 소재로 자유로운 상상력을 더해 <색, 계>와 같은 영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영화가 관객들, 특히 중국의 관객들에게 용납이 되겠는가 말이다. 가령 우리 영화에서 딩모춘 자리에 노덕술이나 하판락 같은 악질 친일경찰을 대입시키고 아리따운 여배우를 상대역으로 해서 <색, 계>같은 작품을 하는 것이 아마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장개석 정부가 딩모춘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친일파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단죄되어야 했다. 잘못 끼어진 첫 단추의 업보는 지금도 계속된다. 청산의 미완은 상상력의 구속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색, 계>는 언제나 가능할 것인가.”

    올해 난징대학살 70주년에 맞춰 이 영화를 개봉한 감독의 무지를 굳이 탓할 수 없을 것 같다. 외신에 의하면 난징대학살 70주년인 올해와 내년 초 전 세계적으로 난징의 비극을 다룬 영화가 여러 편 준비 중이며 이미 올 초에 개봉된 어떤 작품은 아카데미상 수상도 유력하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국 못지않게 일제의 수난을 겪은 우리는 언제쯤 우리의 아픈 역사를 영화예술로 승화시켜 전 세계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을까. 일제시대가 축복이었고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국립대학 교수들이 있는 한 아직은 요원한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일제시대 국내 뿐 아니라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파란만장한 삶은 살다간 수많은 조선의 영웅 이야기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길 고대하며 이번 달에서는 친일영화인 한사람을 살펴보도록 하자. 

    <번지 없는 주막>으로 유명한 가수 백년설이 해방 후 취입한 레코드에는 <복지만리>라는 노래가 있다.

“달 실은 마차다 해실은 마차다 / 청대콩 벌판위에 휘파람을 불며간다 / 저 언덕을 넘어서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 황색기층 대륙 길에 어서가자 방울 소리 울리며”

이 노래를 1982년 가수 김연자도 리메이크할 정도였으니 백년설을 좋아하는 중년들에게는 매우 낯익은 노래다. 그러나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온 때는 1941년으로, 당시 조선에서 상영된 국책영화 <복지만리>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국책영화란 당시 조선총독부가 정책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만든 영화를 말한다. 7-80년대 반공영화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전창근
복지만리의 한 장면

영화 <복지만리>는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복된 땅을 일궈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다는 내용으로 일제의 만주 이주정책을 홍보하는 선전영화이다. 이 영화에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이가 바로 전창근(1908∼1975)이다.

전창근은 초창기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영화인 나운규, 윤봉춘과 더불어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그는 ‘회령 3인방’으로 불리며 당대 유명한 영화인이었다. 그러나 나운규, 윤봉춘과 달리 전창근은 한 때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일을 돕기도 했으나 끝내 친일의 길로 돌아서고 만다.

호방한 성격의 전창근은 18살 때인 1925년에 윤백남프로덕션에 입사해서 영화를 시작하다가 더 깊게 영화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조선보다 자유롭고 국제적인 도시였던 상하이의 무창대학에 들어간다. 상하이에서 전창근은 임시정부의 김구, 여운형 등을 만났다.

여운형의 소개로 그는 상하이에 있는 영화사인 대중화백합영편공사에 입사하여, 영화 <애국혼>의 각본을 쓴다. <애국혼>은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원제가 <안중근>이었으나 당시 상하이에 있던 일본의 압력으로 제목이 바뀐 것이다. <애국혼>은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유일한 항일 영화라고 한다. 주로 사회성 짙은 영화를 많이 제작한 전창근은 임시정부가 마련한 삼일절 기념행사에 오른 항일 연극 준비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또한 이 시절 조선에서 상하이로 망명한 영화인들과 더불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전설적인 영화인 김염 등과도 깊은 교류를 하게 된다.

전창근이 각본을 쓴 <애국혼>의 한 장면. 중국인 배우들이 출연했다

그러던 그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된 계기는 일본군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 때문으로 보인다. 1932년 일본군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조계 등이 있어 함부로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급기야 상하이에서 군사적 침략을 시작한다. 이 때 임시정부는 물론 대부분의 상하이파 영화인들은 몸을 피하거나 더 이상 영화작업에 안전하지 않은 상하이를 떠나게 된다. 전창근의 이 당시 자세한 행적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후 전창근이 다시 등장한 때는 1941년 영화 <복지만리>의 국내 개봉과 함께였다. 영화 제작기간이 3년이었다고 하니 적어도 전창근은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 직후인 1938년부터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전창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이 시기 일제의 총칼 앞에서 자신들의 지조를 버리고 생존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영화 <복지만리>는 당시 조선에서 여러 편의 친일영화를 제작한 이창용의 고려영화사와 일제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내세워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만주영화협회가 공동 제작한 영화였다. 이런 영화의 각본·감독·주연을 모두 전창근이 맡은 것이다. 1932년 전까지 그가 안중근을 그린 영화 <애국혼> 제작에 참여했고, 임시정부의 일을 도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전창근에게 확실한 전향의사를 약속 받았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한차례 중대한 변신을 감행한 전창근은 1942년 영화에서 연극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제1,2회 국민연극 경연대회에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옹호하는 작품을 연이어 출품한다.

그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방 직후에는 ‘광복영화’의 대부로 등장한다. 징용에 끌려갔던 청년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촌사업에 일생을 바친다는 내용의 <해방된 내 고향>(1947), 국군창설 역사를 다룬 <민족의 성벽>(1947) 등을 연출함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한미친선을 주제로 공보처에서 제작한 <불사조의 언덕>(1955), 심지어 항일독립운동의 이야기인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 <삼일독립운동>(1959), <아아! 백범 김구 선생>(1960) 등의 작품을 왕성히 제작한다. 특히, <아아! 백범 김구 선생>은 자신이 김구 역을 맡아 자신의 변절을 극적으로 희석시키고자 했는지 모른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서 안중근으로 출연한 전창근

1960년에는 서울시문화상을 받기도 한 그는 죽을 때까지 한국영화의 대부로 추앙받았으면 그의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하다. 심지어 어느 자료에 의하면 영화 <복지만리>를 민족의 정서를 잘 대변한 영화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전창근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그마나 천만다행인 것은, 영화 ,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 동막골>등을 통해 더 이상 <똘이 장군>같은 영화가 들어 설 여지를 없앰과 동시에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한층 높인 것처럼, 언젠가는 미완인 채로 남겨진 식민지 시절의 많은 이야기들에 대해서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의 관심이 집중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 필자인 방학진님은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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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2/18 [12: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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